Dark Match 32.
챔피언으로서 더없이 비겁한 행위.
사실, 신이 케빈 오윈스 ‘따위’를 상대로 굳이 그렇게 할 필요는 없었다.
왜냐면 신은 커리어 초창기에나 심판을 도구(?)로 사용했지, 이후로는 업계에서 존중을 배우며 성장했다.
그렇기에 신이 방금 심판을 이용한 것은, 척 보기에도 상대가 했던 방식을 그대로 돌려주겠다는 의미였다.
엔지기리에 맞은 케빈이 링을 굴렀고 신은 자신이 도구(?)로 썼던 심판과 어깨동무를 하며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가볍게 주먹을 내밀었고 어안이 벙벙해져 서있던 심판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피스트 범프에 응했다.
팬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시간을 조금 끌어야겠다 싶었던 신은 링 아래에서 걱정스러운 얼굴로 지켜보던 트리플H에게 신호를 보냈다.
그는 곧바로 알아차렸다.
‘일류’의 세계였다.
두 남자는 눈빛을 잠시 주고받은 것만으로 현재 상황을 통해 똑같은 생각을 한 가지 공유했다.
그건 바로.
트리플H가 시간을 끄는 거였다.
신은 일부러 바닥에서 끙끙 앓고 있는 케빈의 곁으로 다가가 도발했다.
“그냥 누워있어, 인마.”
“큭…….”
앓고 있는 케빈.
그 엉덩이를 툭툭 차며 놀리고 있자니 이내 흥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
링 위로 올라오려는 트리플H.
에이프런 위에 발을 디디고 로프를 넘어오려던 그를 심판이 제지했다.
“너 이 새끼! 제대로 안 해?!”
“먼저 제대로 안 한 건 당신 아들이지! 헌터! 분하면 어디 덤비시던가!”
“끄그그윽, 이 새끼가……!”
“헌터! 그만! 그만!!”
트리플H가 발광하면서 달려들자 심판이 억지로 막아냈다. 나는 피식 웃으며 헌터와 신경전을 벌였다.
그리고 기다렸다.
케빈이 내 뒤를 노리는 걸.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팬들의 챈트가 이어졌다.
나의 주의를 끌기 위함일까.
슬슬 오겠다고 생각한 나는 이윽고 누군가 내 다리 사이로 손을 뻗어 단단히 허벅지를 붙잡는 것을 느꼈다.
몸이 뒤로 넘어갔다.
롤 업.
트리플H가 눈치 빠르게 심판을 놔주었는지 곧바로 카운트가 세어졌다.
[1……!]
[2……!]
나는 몸을 튕겨서 빠져나왔다.
위쪽으로 한 바퀴 굴러서 자세를 바로 잡자, 반대편으로 튕겨져 나가 무릎을 꿇고 있는 케빈이 보였다.
그렇다면 쓸 기술은 딱 하나.
나는 곧바로 내달렸다.
무릎을 들었다.
쩌억-!!
[Waaaaaaaaaaaaaaaaaaaggghhh!]
케빈의 몸이 넘어갔고 함께 뒤엉켜서 바닥을 구른 나는 핀 폴을 했다.
[1……!]
[2……!]
[3……!]
그걸로 3경기도 끝.
[케빈 오윈스가 제거되었습니다.]
나는 중심을 잃고 쓰러졌다.
“후우, 후우.”
아무리 그래도 3경기째.
체력이 안 달릴 수가 없었다.
시간으로는 거의 25분 가까이 흘렀고 일반적인 경기였다면 지금 시점에서 끝이 나는 게 평범한 흐름이었다.
하지만 아직 4경기가 남았다.
그것도 가장 ‘큰’ 경기가.
[Rooooooooooaaaaaaaaaaaaar!!]
쿠구구구구궁-!!
호쾌하고 묵직한 인트로와 함께 그론 스트로먼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2미터를 훌쩍 넘기는 키.
거인 레슬러.
등장만으로도 시선을 잡아끄는 것이 바로 그론 스트로먼이라는 남자였다.
하지만 그걸로는 부족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업계에서는 겉모습뿐만이 아니라 다른 장점도 보여줄 수 있어야만 했다.
그런 의미에서 봤을 때 스트로먼은 확실히 아직 좋은 선수는 아니었다.
기술적으로는 많이 부족했고 선수로서의 카리스마도 덩치가 거대한 것 이외에는 거의 없다고 해도 좋았다.
더군다나 마이크워크를 할 줄 아는 능력도 없었으니 그가 MXT의 4번 타자로 나오는 건 놀라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 모든 부족함을 뛰어넘고 그가 마지막으로 나온 이유는, 분명한 각본이 존재하기 때문이었다.
WWF에서는 지난 7월, MXT에서 이루어졌던 빅 죠와 스트로먼의 4연전을 짧게 편집해 메인 쇼만 시청하는 팬들도 스토리를 알 수 있게 해주었다.
거기다 해설자들까지도 스트로먼을 소개할 때 그걸 강조해 이야기했다.
[This Guy Is A Monster!]
[Look At That Size Of Him!!]
일단 그렇게 운을 떼고.
[제기랄! 하지만 단순한 괴물이 아닙니다! 이 남자는 지금 신에게 갚아줄 게 있습니다! 분명히 있습니다!!]
[지금 병원에서 수술을 마친 빅 죠가 지켜보고 있을 겁니다! 이 남자는 그를 위해서 링에 오르고 있습니다!]
바로 그거였다.
단순히 WWF에서 스테레오하게 내세우던 자이언트 몬스터가 아니라 스트로먼에게는 드라마가 존재했다.
[스트로먼이 죠에게 당신을 이기는 방법을 가르쳐달라고 이야기했었죠?]
[그렇습니다. 꽤 흥미로운 부분이라고 저는 생각하는데요. 스트로먼이 단순무식한 남자는 아니라는 겁니다.]
[그렇죠! 하지만 그 상대는 신입니다! 세 명의 MXT 선수들을 상대로 승리를 챙겼던 바로 그 신이라고요!]
[하지만 점점 힘들어하는 게 보이는군요. 건틀릿 매치는 이런 부분이 항상 문제입니다. 변수가 나올 수 있죠.]
그렇게 긴장감을 선사하면서.
스트로먼이 링에 올랐다.
다른 선수들과 달리 탑 로프를 넘어 링으로 들어온 그는 곧바로 바닥에 반쯤 누워 있던 신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이어지는 바디 슬램.
콰앙-!
초장부터 그렇게 힘을 과시한 스트로먼은 4경기째에 접어들어 체력이 떨어진 신을 단숨에 몰아붙였다.
하지만 신은 포기하지 않았다.
[1……!]
[2……!]
핀 폴이 이루어질 때마다 아슬아슬한 순간에 벗어났고, 스트로먼은 콧김을 씩씩 몰아쉬며 공격을 이어갔다.
단순한 경기 양상이었다.
하지만 팬들은 경기에 집중했다.
스트로먼의 드라마 때문이었다.
그리고 경기에서 그게 드러났다.
신을 공격해 코너까지 몰아붙인 스트로먼은 빅 죠의 기술을 사용했다.
일단 신이 가슴을 펴게 만들고.
쉬잇.
입술에 검지를 가져다대 팬들이 순간적으로 모두 입을 다물게 만든 뒤.
신의 가슴에 찹을 날렸다.
쩌억-!!
“끄흑?!”
고통에 못 이겨 무릎을 꿇는 신.
빅 죠에게도 한 방 맞아봤지만 역시 힘 조절이 제대로 되지 않는 스트로먼에게 맞는 것이 훨씬 더 아팠다.
[Uoooooooooooooooooohhh!]
비명을 내지르는 팬들.
그들은 내 통증에 공감해주는 동시에 빅 죠의 기술을 사용하는 스트로먼의 모습을 보고 박수를 보냈다.
잠시 서있던 스트로먼은 아무 말 없이 검지를 들어 머리 위를 가리켰다.
……사실 죠가 죽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나름 그를 기리는 동작.
[Waaaaaaaaaaaaaaaaaaggghhh!]
팬들이 환호했다.
괴물이 자신의 감정을 드러냈다.
그로써 그는 레슬러가 되었다.
고통스러워하던 신이 자리에서 일어섰고 스트로먼이 그 앞으로 다가왔다.
다시 시작되는 싸움.
하지만 이상하게도.
경기의 막바지에 이르러 스트로먼은 락 업을 제안하듯 팔을 뻗어왔다.
신은 피식 웃으며 거기에 응했다.
거인 레슬러는 대부분이 락 업을 하더라도 짧게 가져가는 게 보통이었고 체인 레슬링은 거의 하지도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남들에 비해 훨씬 거대한 그들은 몸의 유연성이 떨어졌고 동시에 굳이 그런 식으로 경기를 할 이유도 없었다.
하지만 스트로먼은 달랐다.
또한 빅 죠 역시도 달랐다.
빅 죠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지만 전성기 시절 거인의 한계를 벗어난 유연성을 바탕으로 팬들의 눈에 들었다.
핸드 스프링도 할 정도였다.
그렇기에 기회는 자주 오지 않았지만 같은 거인과 경기를 할 때면 체인 레슬링을 자주 선보였다.
비록 지금은 나이를 먹어 그런 능력이 많이 쇠퇴했고, 새로 유입된 팬들은 과거의 죠가 어떤 남자였는지 기억하지 못했지만.
이 스트로먼은 달랐다.
그가 죠의 뒤를 이었다.
두 사람이 부딪혔다.
쿵-!
물론 힘에서 더 우위를 점하는 것은 스트로먼이었다. 그는 신을 단숨에 몰아붙이고는 헤드록으로 전환했다.
서브미션을 빠져나온 신은 뒤로 돌아들어가 스트로먼의 팔을 꺾었다.
그러자니 잠깐 괴로워하던 스트로먼은 뒤로 물러서며 자신의 팔을 꺾은 신이 코너에 몸을 부딪치게 했다.
영리한 판단.
[Waaaaaaaaaaaaaaagggghhh!]
팬들이 환호했다.
하지만 신은 팔을 놓지 않았고 연이어 꺾으면서 스트로먼을 압박했다.
그리고 그 직후.
“후우.”
한 차례 심호흡을 한 스트로먼이 바닥을 한 바퀴 구르며 관절기를 풀어냈고 바로 신의 안면에 펀치를 날렸다.
[Uooooooooooooohhh!]
날렵한 행동에 놀라는 팬들.
그리고 속도는 더 빨라졌다.
이제 막 20대 후반에 들어선 스트로먼의 신체 능력은 놀라울 정도였다.
그는 신과 함께 체인 레슬링을 계속 이어가면서 좋은 경기를 만들어갔다.
그 리드는 신이 맡았다.
“좋아. 천천히.”
“……옙.”
스트로먼은 초보였지만 바보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 재능은 출중했다.
그렇기에. 신이 없을 때도 꾸준하게 연습을 한 성과가 발휘되었다. 스트로먼은 능숙하게 경기를 만들어갔다.
그리고 어느 순간.
“후읍-!”
신을 번쩍 들어 사이드 슬램으로 메치고는 완전히 주도권을 가져왔다.
신은 방어에 급급했다.
안 그래도 거대하고 힘이 강한 스트로먼을 상대하는데, 벌써 네 번째 경기였다 지치지 않으면 이상했다.
“좋아! 잘한다! 스트로먼!”
이번이 마지막이고, 확실하게 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헌터가 스트로먼을 응원하며 흥분한 모습을 보였다.
빠악-!
“우욱……!”
옆구리를 파고드는 펀치.
거기에 몸이 반쯤 공중에 떠올랐던 신은 바닥을 구르며 고통스러워했다.
숨을 몰아쉬던 스트로먼은 이내 탑 턴버클 위로 올라갔고, 그 모습을 본 팬들이 놀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Uooooooooooooooohhhh……!]
자이언트는 이래서 주목을 받았다.
조금만 민첩한 모습을 보이거나 평소 그런 이들이 하지 않는 무브를 시늉만 해도 팬들이 주목했다.
마치 춤과도 같았다.
같은 동작이라도 팔다리가 긴 쪽이 확연히 좋은 그림이 나오듯이, 레슬링도 그런 면에서 크기가 중요했다.
물론 그로 인해 오는 단점이 아예 없진 않았지만, 스트로먼은 생각했다.
빅 죠가 해주었던 말을.
[Size, Does Matter.]
크기는 중요하다.
자신에게는 강점이 있다.
문제는 그 강점을.
‘최대한 잘 다뤄야지.’
스트로먼은 탑 턴버클 위에서 그동안 계속 준비했던 무브를 사용하기 위해 몸을 곧게 펴고 일어섰다.
[Uooooooooooooooooooohhh!!]
팬들의 목소리가 링을 뒤덮었다.
거기에 순간 꺾일 뻔했다.
하지만 스트로먼은 기억해냈다.
항상 불편했던 거인의 삶을.
몸에 맞는 물건을 구하려면 남들보다 배는 고생해야만 했고 그게 안 되면 돈을 더 들여 개조해야 했다.
자동차 좌석도.
옷도.
신발도.
항상 부모님께 죄송했었다.
원망도 조금은 했다.
하지만 지금은.
이 몸으로 주목을 받았다.
‘좋아.’
스트로먼이 단단히 중심을 잡자 자리에 누워있던 신이 일어나 비틀거리며 자신을 향해서 돌아섰다.
그걸 보고.
스트로먼은 힘껏 뛰었다.
그리고 양발을 앞으로 내질렀다.
미사일 드롭킥.
최대한 몸에 힘을 빼고.
상대의 몸통에 닿기만 하듯이.
콰앙-!!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위력은 컸다.
반대편으로 나가떨어진 신은 바닥을 데굴데굴 굴러 코너에 부딪힌 뒤에서야 겨우 움직임을 멈췄다.
[Waaaaaaaaaaaaaaaaggghhhh!!]
팬들이 흥분해 날뛰었다.
스트로먼의 미사일 드롭킥은 그만큼 멋진 무브였다. 괴물이 벌떡 일어나 신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그리고 이어지는 핀 폴.
[1……!]
[2……!]
어깨를 들어 벗어나는 신.
이번에는 정말로 위험했다.
그걸 표현하기 위해 일부러 더 거칠게 숨을 몰아쉰 신은 스트로먼이 자신의 머리채를 붙잡는 것을 느꼈다.
미사일 드롭킥으로도 끝낼 수 없다면 피니시 무브를 사용할 때였다.
스트로먼은 자신의 앞에 일어선 신을 그대로 한쪽 어깨에 들쳐 멨다.
[러닝 파워 슬램인가요?!]
[스트로먼의 피니시 무브로군요!]
[신은 다시 빠져나올 것인가……!]
흥분해 외치는 해설자들.
그 말을 들었는지 신은 스트로먼의 어깨 위에서 반격을 시도했다.
엘보.
뻐억-!
신의 팔꿈치가 깔끔하게 그 관자놀이에 꽂혔다. 스트로먼의 몸이 흔들리면서 신은 밑으로 내려오려고 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후읍……!”
스트로먼은 오히려 힘을 주었다.
그는 러닝 파워 슬램을 사용하기 위해서 신의 몸을 앞으로 당겼고 각도가 기울어지는 타이밍이었다.
신은 몸을 비틀어 프랑켄슈타이너로 대응하려 했지만, 불가능했다.
“우어어어!!”
스트로먼의 거체가 앞으로 달려 휙 뛰어올랐고, 그대로 신의 몸을 자신의 몸에 겹친 채 함께 지면에 떨어졌다.
그것이 러닝 파워 슬램.
투-콰앙-!!
“거, 흑……!”
신은 순간 호흡을 하지 못했다.
다시 핀 폴이 이어졌다.
[1……!]
[2……!]
여기에서.
경기를 지켜보고 있던 이들 대부분이 스트로먼의 강력한 힘을 느꼈다.
하지만 한 가지 이상한 게 있었다.
벌써 4경기째.
지칠 대로 지친 상황.
거기다 앞선 선수들도 각자 피니시 무브까지는 아니더라도 스트로먼의 미사일 드롭킥처럼 시그니처를 하나씩 신에게 선사했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신은 무너지지 않았다.
팬들이 그걸 원했다.
번쩍.
신이 호쾌하게 팔을 위로 든 순간.
[Waaaaaaaaaaaaaaagggghhhh!!]
경기장 안에 쩌렁쩌렁 울리는 팬들의 목소리가 바로 그 사실을 증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