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 Match 37.
하지만 끝내.
신은 탭을 치지 않았다.
버텨내고 버텨내면서 비명을 내지르던 그는 로프를 향해서 나아갔다.
[Russell! Russell! Russell! Russell! Russell! Russell! Russell! Russell!]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경기는 최고의 순간으로 치달았다.
두 선수 모두 한계를 넘어선 반응을 끌어냈고 치열하게 기술을 주고받으면서 어떻게든 승리를 차지하려 했다.
무너지지 않았다.
허리가 꺾여도.
킥을 맞아도.
두 사람은 결코 쓰리 카운트를 내어주거나 항복조차도 선언하지 않았다.
신의 손이 로프를 쥐었다.
“로프 브레이크!”
심판의 선언과 함께 러셀이 오메가 슈터를 풀었다. 그러고는 자신도 힘이 빠졌는지 중심을 잃고 쓰러졌다.
팬들이 박수를 보냈다.
[Fight Forever!]
짝! 짝! 짝짝짝!
[Fight Forever!]
짝! 짝! 짝짝짝!
[Fight Forever!]
짝! 짝! 짝짝짝!
길고 긴 경기였지만 팬들의 집중력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모두가 이 경기에 깊이 몰입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가장 원하는 건 두 사람.
신과 러셀이었다.
비틀거리며 일어서던 중 시선이 마주친 두 사람은 경기의 마지막으로 향하기 위한 주먹질을 주고받았다.
퍼억-!
빠악!!
신이 러셀을.
러셀이 신을.
이미 몸은 만신창이었고 지금 당장에라도 쓰러져 쉬고 싶은 기분이었지만 결코 그럴 수는 없었다.
러셀 오메가는 특히 더 그랬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였다.
물론, 이후로도 챔피언십 매치는 계속해서 치를 수 있을 터였다. 분명 러셀 오메가는 신과 수없이 싸울 터.
하지만.
그런 그가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라고 표현한 이유는, 사실 간단했다.
지금 이 순간이 아니면 신을 따라갈 수 없다. 그가 앞으로 고독하게 업계의 정점에 서는 걸 지켜봐야 하리라.
러셀은 그게 싫었다.
이미 숀 시나라는 아이콘을 띄워주며 숱하게 그런 경험을 해본 그였다.
하지만 적어도, 신과는 그런 관계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가 원하듯이 동등한 수준의 선수가 되고 싶었다.
그러므로 이 경기를 이겨야만 했다.
여기에서마저 진다면.
러셀 오메가는 신보다 한 수 아래의 선수라는 생각을, 팬들이 할 터였다.
러셀은 신의 뒤를 잡았다.
[Uooooooooooooooooooohhh?!]
이어지는 일렉트릭 체어 포지션.
신을 목말에 태운 상태에서 바로 러셀 오메가의 피니시 무브인 원 윙드 앤젤이 나오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신이 뒤쪽으로 빠져나왔다.
그리고 상대를 밀어내는 신.
러셀이 로프 반동하는 모습을 본 팬들은 안티크라이스트를 떠올렸다.
신이 러셀을 번쩍 들어 올렸으나.
넘기지는 못하고 러셀이 신의 안면을 밀며 그 손아귀에서 빠져나왔다.
퍼억-!!
순간 이어지는 러셀의 롤링 소베트.
신이 허리를 숙였고 러셀은 다시 목말을 태워 어깨 위로 번쩍 들어올렸다.
[Uoooooooooooooooooooohhh?!]
그리고 이어지는.
원 윙드 앤젤.
신의 머리가 지면에 추락했다.
투-콰앙-!!
링에서 울려 퍼지는 소리는 순간적으로 팬들 모두를 침묵하게 만들었다.
곧바로 이어지는 핀 폴.
모두가 카운트를 따라 외쳤다.
[1……!]
[2……!!]
[3……!!]
땡땡땡-!!
[Waaaaaaaaaaaaaaaaaaggghhh!]
경기장 전체가 환호에 휩싸였다.
길고 길었던 경기가 끝났다.
러셀 오메가의 승리였다.
챔피언이 바뀌었다.
그 과정을 끝까지 본 관객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보내기 시작했다.
신, 그리고 러셀 오메가.
두 사람은 또 다시 한계를 넘었다.
완벽이라는 단어에 가까운 멋진 경기를 선보였으며 팬들은 자연히 강렬한 고양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개중에서도 MXT 선수들은 오늘 경기를 보고 가장 깊이 감탄하고 있었다.
프로레슬러의 이상과 같은 모습.
링 위에 널브러져 있는 신과 러셀.
치열한 싸움의 증명.
이어서 심판이 벨트를 가져오자, 일어선 러셀이 신에게 탈환한 ACW 월드 챔피언십을 소중한 듯 안았다.
그리고 신이 일어섰다.
두 사람은 바닥에 주저앉았다.
싸움은 끝났고.
러셀 오메가가 일었다.
“허억, 허억…….”
“푸후우, 후우우…….”
숨을 몰아쉬며, 땀투성이가 되어 신은 러셀의 어깨를 툭툭 두들겨주었다.
러셀도 웃으며 신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Russell! Russell! Russell! Russell! Russell! Russell! Russell! Russell!]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멋진 경기를 보여준 두 사람에게 팬들은 어마어마한 환호로 보답을 했다.
신이 먼저 뒤돌았고, 쿨하게 퇴장하면서 러셀 오메가의 시간이 찾아왔다.
코너 로프를 밟고 위로 올라간 러셀은 벨트를 머리 위로 번쩍 들었다.
퍼퍼퍼퍼퍼퍼퍼퍼퍼퍼퍼퍼퍼퍼펑!!
터져 오르는 폭죽.
흩날리는 종이 꽃잎.
새 챔피언에 대한 예우를 갖춘 채.
2012 대시 앳 더 비치는 그렇게 환상적인 순간을 남기며 막을 내렸다.
* * *
끝났다.
‘어깨의 짐을 덜었군.’
상대에게 벨트를 잘 넘겨주었다.
백스테이지로 돌아온 나는 새 챔피언에 등극한 러셀을 축하해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MXT 선수들도 찾아와 우리에게 감사하다고 말했다.
딱히 그럴 만한 행동을 한 것 같지 않았던 나는 쓰게 웃었지만, 이 경기가 녀석들의 심장에 불을 당긴 거겠지.
나는 생각했다.
만약 내 존재가 누군가의 영감이 되고, 그렇게 프로레슬링이라는 업이 나를 거쳐 더 크게 발전할 수 있다면.
그건 정말 영광스러운 일이겠지.
‘직업 만족도 200퍼센트군.’
오히려 져줄 수 있어 기뻤다.
내가 만들어온 시간들이 다른 선수를 위해 사용되고, 다른 선수들의 시간이 다시 나를 위해서 사용되고.
그게 프로레슬링 업계였다.
러셀이 축하를 받는 동안 MXT 선수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자니, 옆에 있던 크로우가 내 앞으로 다가왔다.
“뭐야, 신.”
순간 MXT 선수들이 숨을 멈췄다.
크로우.
그들에게는 내가 신인 시절 테이커를 만났을 때만큼 큰 충격이 있겠지.
“넌 싸운 뒤에 다 친구가 되는군.”
“다 줘팼으니 당연하죠.”
나는 씨익 웃으며 농담으로 넘겼다.
그러자니 크로우는 잔뜩 긴장한 신인들을 살짝 겁주듯 이야기했다.
“그나저나, WWF 소속의 개자식들이 이 ACW 락커룸에 오는 것도 오랜만이군. 이거 옛날 같았으면 다 엉덩이를 걷어차서 내쫓는 건데 말이야.”
“…….”
“…….”
“…….”
아니.
이제 곧 갈(?) 양반이 엄한 애들 괴롭히는 건 약간 전통과도 같은 건가.
테이커도 성격과 맞지 않게 신인들을 데리고 노는 걸 아주 좋아하셨지.
‘그곳에서는 행복하시죠. 테이커.’
나도 늙었나 보다.
먼 곳으로 떠난 테이커만 생각하면 아직도 눈물을 글썽이게 되니 말이다.
……어쨌거나.
“애들 좀 그만 괴롭히십쇼. 크로우.”
“이건 전(前) 락커룸 리더로서 정당한 권리야. 신. 불만이면 저쪽에 있는 새 리더와 이야기를 해보시던가.”
크로우가 짓궂게 말했다.
새 락커룸 리더.
그건 러셀을 말하는 것이었다.
“아무튼, 어떻게 보자면 이제 ‘누구’ 때문에 단체 간에 좀 간질거릴 정도로 좋은 분위가 형성되어서 말이야.”
크로우가 날 돌아보았다.
“너희에게도 기회를 주지.”
“예?”
“그게 무슨…….”
“맥주 가지러 가자.”
“그렇게 다른 단체 애들을 멋대로 이용하셨다가 헌터가 화라도 내면요?”
“내가 책임지지.”
내 질문에 대답한 크로우가 MXT 선수들을 데리고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좀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
그 말마따나.
‘옛날에는 상상도 못했지.’
로건과 트리플H가 각 단체에서 최고로 대립하던 시절은, 좀 끔찍했다.
막말로 진짜 서로 만나면 각목으로 싸움이 벌어질 거 같은 분위기였다.
하지만 지금은 좀 더 부드러운 분위기가 형성이 되었다고 해야 하나.
어쨌거나.
그렇게 MXT 선수들까지 합류해 꽤 괜찮은 분위기에서 파티가 시작되었다.
러셀과 내 머리에 얼음 버켓이 쏟아졌고, 다들 점점 취해 맥주를 물처럼 마셔대며 흥에 겨워 떠들어댔다.
가장 뜨거운 여름 밤.
대시 앳 더 비치가 지나갔다.
* * *
그로부터 며칠 뒤.
티파니와 나는 오랜만에 아무 일 없이 집에서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약혼했지만, 우리의 생활이 그 이후로 극적으로 바뀌거나 하지는 않았다.
……뭐, 엄마가 자꾸 힘 좀 쓰라면서 뱀을 갈아서 만든 보약을 보내준다는 점을 빼면 이전과 다름없었다.
새벽에는 내가 먼저 일어난다.
근처를 돌며 러닝을 하고 오면, 요가를 하고 있던 티파니와 함께 입주 가정부가 차려준 아침식사를 했다.
그리고 같이 프로레슬링을 시청하면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점심식사를 하고 운동을 한 번 더 했다.
이번에는 저택 지하에 만들어둔 링에서 매트 레슬링을 했는데, 티파니가 도와주면서 함께 기술을 연마했다.
아, 뭐.
그러다 눈이 확 맞으면 또 다른 운동을 하러 가기도 하고 그런 것인데.
오늘은 거기까지는 안 가고 우리는 손을 잡고 정원을 산책하며 가장 좋아하는 일에 관해 대화를 나눴다.
당연히 프로레슬링이었다.
“슬슬 신인을 콜 업 시킬까 해요.”
“누구?”
“고민 중이에요. 섬머 수플렉스에서 MXT 선수들하고 당신이 잘 싸워준 덕에 생각보다 선택지가 많아져서.”
“흠.”
“헌터는 MXT 선수들이 이제 막 빛을 보기 시작했는데 콜 업을 해가냐면서 절규하지만, 뭐 어쩌겠어요?”
“그, 그건 그렇군.”
왠지 좀 무서워졌다.
“좋은 선수는 얼른 빛을 보게 해줘야죠. 사실, 현역 시절은 짧다면 짧을 수밖에 없잖아요.”
“그 말이 맞지.”
“당신 생각은 어때요?”
“내가 아이디어를 내는 게 좋은 일인지…… 솔직히 잘 모르겠는데.”
“어머, 이제 와서 그래요?”
티파니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지금까지 잘만 관여했으면서.”
“틀린 말은 아니군.”
나는 피식 웃어버렸다.
하긴.
맞는 말이었다.
‘좋건 싫건.’
전생과 다른 형태로 지금의 이 업계를 만든 것은 다름 아닌 바로 나였다.
이게 옳은가.
그건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걸 앞으로 나 이외의 다른 누군가가 알 수 있을 리도 없을 테고.
그러므로.
내가 해야만 했다.
“뭐, 일단 상황을 파악해보자고.”
업계는 매년 새로운 선수들이 데뷔하고 은퇴를 하기도 하면서 계속 물갈이(?)가 되는 형태로 유지되었다.
물론, 메이저 프로레슬링 단체에서 잘 자리를 잡지 못하더라도 인디로 내려가 이름값과 실력을 쌓고 돌아오는 경우도 많기는 했지만.
MXT나 GCW(ACW의) 같은 산하 단체로 인해 그런 경우가 많이 줄었다.
그런 산하 단체는 일본이나 멕시코 쪽에서 대형 스타였던 이들을 데려와 쇼를 만들었고, 그렇기에 주로 마니아 팬들로부터 큰 인기를 끌었다.
‘개중에 동양인은 없지만.’
씁쓸한 부분이기는 했다.
아 물론, 내가 같은 동양인이라고 더 대우해주거나 그런 것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실력이 있어야지.
그래도 문턱조차 밟는 이들이 없다시피 한 것은 좀, 그래도 어딘가 씁쓸해지는 부분이 있다고 해야 하나.
그렇게 말하자.
티파니는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그럴 리가요.”
“음……?”
“물론 절대다수는 아니지만, 인디 쪽 레슬러들 중에서는 동양인도 많아졌어요. 물론, 당신을 보고 자란 아이들이라 아직은 20대 초반이지만.”
그래도 그들이 성장하면.
“WWF에서도 당신이나 다른 선수들의 뒤를 잇는 훌륭한 동양인 선수가 나오지 않겠어요?”
“……그런가.”
“참 아이러니하죠.”
프로레슬링은 보수적인 스포츠였다.
하지만 그곳에서 현재 미국의 어떤 곳보다도 크게 동양인의 파워가 강해지고 있다. 참 재미있는 현상이었다.
오히려 미국 내에 나와 같은 동아시아인의 비율이 얼마나 되는지를 생각해보면 많은 편이라는 게 바로.
티파니 맥센의 생각이었다.
“그렇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나도 존 마이클스의 전성기에 그의 레슬링을 보면서 성장해, 결국 선수로서 활동할 때까지 오래도 걸렸으니.
내가 정보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인디 단체에 동양인 선수들이 있으면 몇 년 뒤에나 볼 수 있을 터였다.
“PWA로 영입해도 되고요.”
“나중에 부상 각본 같은 걸로 쉬면서 인디 투어나 좀 돌아보고 싶어.”
“후후, 당신 못 쉴 텐데요.”
“…….”
“에이, 쉴 마음도 없으면서.”
“아니, 쉬고 싶은데요. 회장님.”
“잠은 죽어서나 자는 거라고요.”
요새.
음.
티파니를 볼 때마다, 아주 가끔, 어쩐지 모르게, 지금은 먼 곳에 계신 바트 맥센 전 회장님이 생각났다.
‘그곳에도 레슬링이 있기를, 바트.’
나는 고집이 세고 좀 미쳤던 영감님을 떠올리며 씁쓸하게 웃었다.
“아니, 나중에 좀 얼굴이라도 슬쩍 비추고 오라니까요. 말은 않지만 당신을 꽤 보고 싶어 하는 거 같던데.”
“잠은 죽어서 자라면서요.”
“장인어른 뵙는 것도 일이죠.”
“……그런가?”
“예, 거기다 당신하고 바트는 친구잖아요? 그것도 죽이 좀 잘 맞는.”
“누가 그래?”
“본인이, 그러던데.”
약간 당황하는 티파니.
나는 거기에서 잠깐 말을 실수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재빨리 정정했다.
그래.
이곳에서는 통용되지 않는 말이지만 나는 한국계고 그 사실을 무척이나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편이었다.
우리 아버지가 항상 말씀하셨다.
결혼은 가족과 가족 간의 결합.
그러므로.
“좋아, 다녀오지. 하루 정도.”
“정말요? 아버지가 기뻐할 거예요.”
“노노노, 그렇게 아름다운 드라마가 아니야. 티파니. 잘 들어보라고.”
“……?”
“휴가 내. 그리고 우리 집에서 하룻밤 자고 와. 나는 당신 집에 가서 바트하고 멋진 하룻밤을 보낼 테니까.”
나는 씨익 웃으며 선언했다.
그렇게 싸구려 할리우드 코미디 영화 플롯과 같은 일이 성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