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 Match 73.
“폴.”
레스너의 목소리에 뒤를 돌아본 헤이건은 다음 순간 눈앞에 날아드는 뭔가를 받아내야만 했다.
ACW 월드 챔피언 벨트였다.
“이거 좀 맡아줘.”
“브룩…….”
“쓸데없이 무겁기만 해서.”
어이가 없다는 듯 웃은 레스너는 그대로 헤이건을 지나쳐 탑승 수속을 위해 게이트 안쪽으로 향했다.
2014년 1월 27일.
ACW의 1월 페이퍼뷰인 ‘풀 스로틀’을 촬영하기 위해 이동하는 중이었다.
주변의 팬들이 말을 걸어왔지만 레스너는 무시하고 지나쳤고, 벨트를 들고 있던 헤이건은 쓰게 웃었다.
그는 많은 선수들이 선망하는 월드 챔피언 벨트에 아무 가치도 느끼지 않는 듯했다.
실제로 그러했다.
어차피 각본에 따라 오가는 벨트일 뿐이었다. 그렇기에 레스너는 여기 목숨을 거는 이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어차피 가짜일 뿐인데’.
신이나 러셀 같은 선수들이 저 벨트를 항상 철저하게 관리하고 잘 가지고 다닌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하지만.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겠지.’
헤이건은 한숨을 내쉬었다.
레스너는 언제나 최고였으니까.
데뷔 직후부터 ‘Next Big Thing’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레스너는 고작 6개월 만에 월드 챔피언을 따냈다.
그 누구도 받아본 적이 없던 푸시.
그걸 레스너는 자신의 천재적인 재능으로 소화해냈고, 단숨에 테이커처럼 높은 위상의 선수들과 붙게 되었다.
데뷔 후 최단 기간 메인 이벤터.
최연소 월드 챔피언.
각종 기록을 써내려간 레스너가 프로레슬링을 ‘어차피 가짜’라고 폄하하는 것도 마냥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왜냐면 그는.
누군가 그 가짜를 수행하기 위해 흘리는 피와 땀, 그리고 눈물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남자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현재 이 업계에 종사하고 있는 선수들 대부분이 레스너에게 반발하게 되는 이유이기도 했다.
업계에 대한 존중도 없고.
매주 쇼에 나오는 것도 아니면서.
월드 타이틀은 가지고 있고 온갖 푸시는 혼자 다 받아먹으면서 업계의 최종보스 포지션을 굳혀나갔으니까.
그리고 그게 먹혔다.
팬들은 브룩 레스너라는 선수를 보면서 열광했으며 그 등장 때마다 시청률은 항상 가파른 폭으로 상승했다.
‘그러니 열이 받을 수밖에.’
여기에서 보통 사회적 지능이 있는 인간이면 다른 선수들을 존중하며 자기 이미지를 보호하려고 들겠지만.
레스너는 달랐다.
그는 약자와 강자를 구분했다.
강자는 존중하고.
약자는 무시하는 모습을 보였으며.
현재는 업계에서 현역으로 활동하는 그 누구도 강자로 인정하지 않았다.
애초에 신인이었던 2002년에도 테이커나 헌터 같은 선수가 아니면 철저하게 무시했던 남자가 레스너인데.
종합격투기에서 큰 성공을 거두고서 돌아온 지금은 그러한 태도가 더 커졌으면 커졌지 작아졌을 수는 없었다.
‘I Don’t Give A Sh-t.’
그것이 레스너의 대답이었다.
그는 링에서 주어진 대로 자기 역할을 수행했고, 그게 끝나면 집으로 돌아가 사냥을 하면서 철저히 은둔했다.
무리의 우두머리로서 군림하되 지배하지는 않으면서 이 업계를 점차 깊은 수렁으로 빨아들여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레스너로 인해 시청률은 나날이 상승하고 있는데다가 업계 또한 성장에 성장을 거듭하고 있었다.
상황이 마냥 이렇다 보니 ACW를 포함해 각 단체의 락커룸 분위기는 전반적으로 어수선할 수밖에 없었다.
레스너는 선수들뿐만 아니라 직원들까지도 무시했고, 다들 그런 상황에서는 의욕이 생길 수가 없었다.
‘안 좋은 상황이군.’
러셀 오메가는 한숨을 내쉬었다.
ACW 풀 스로틀.
[자자, 카메라 잡고.]
데릭 비숍만이 신이 났다.
아니, 그 이외에 현장 일은 전혀 관심이 없는 사업팀 역시도 신이 났다.
어쨌든 ACW는 브룩 레스너의 파급 효과로 인해 잘 나가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로 인해 발생하는 부작용들이 조금씩 ACW를 좀먹어 나갔다.
물론 러셀도 가만히 있지만은 않았고 어떻게든 파트-타이머 문제를 해결해보고자 노력하기는 했지만.
당장 상품성에서 밀리는데 지금 당장의 돈에 미친 사업가들이 러셀과 선수들의 의견을 들어줄 리 없었다.
“후우.”
한숨을 내쉰 러셀은 메인이벤트의 리허설이 이어질 때까지 기다렸다.
풀 스로틀의 메인이벤트.
브룩 레스너 VS ALL.
킹스 럼블의 럼블 매치와 같은 경기 방식의 이벤트성 매치였다.
참가자는 총 스무 명으로 레스너가 링 밖으로 한 사람씩 넘길 때마다 다음 참가자가 난입하는 시스템.
거기에서 러셀은 20번.
브룩 레스너와 그나마 잘 싸우지만 F5 한 방에 역전을 당하는 각본이 예정되어있는 상태였다.
‘이래도 좋은 걸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며, 러셀은 이어지는 리허설에서 등장을 수행했다.
움직이는 동안 카메라가 그를 촬영했고 링 위에 브룩 레스너를 대신해서 서 있는 직원을 노려보면서 입장하는 것이, 상당히 비참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있겠는가.
지금 업계는 브룩 레스너라는 압도적인 FA에게 맞춰 돌아가고 있는데.
* * *
경기장에 전자음이 울려 퍼졌다.
[Waaaaaaaaaaaaaaaaaggghhh!!]
그 순간 자리에서 일어서는 팬들.
붉은 조명이 경기장 전체를 물들이며 The Beast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브룩 레스너.
The Beast.
The Conqueror.
옆에 폴 헤이건을 대동한 채, 허리에는 ACW 월드 챔피언 벨트를 찬 그가 천천히 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훌쩍 뛰어.
로프를 붙잡고 크게 흔들었다.
퍼퍼퍼퍼퍼퍼펑-!
그 순간 크게 터져 오르는 폭죽.
경기장 바깥에 설치된 장치에서 분사된 폭죽이 그 입장을 화려하게 장식해주었다.
‘오늘도 별것 아닌 일이다’.
레스너는 그렇게 생각했다.
종합격투기 때처럼 오픈 핑거 글러브와 트렁크를 입은 그는 링 위에 서서 헤이건과 말을 주고받았다.
“사람 더럽게 많군.”
“브룩…….”
“알았어, 살살 할게.”
말과는 달리, 레스너는 자신의 체내에 흐르는 테스토스테론을 절제할 마음이 없는 상태였다.
누구든 와라.
수플렉스로 꽂아주마.
그런 생각을 하며 레스너는 다음으로 나오는 선수를 기다렸다.
2번 선수.
드류 맥킨마이어.
[Uooooooooooooooooooooohhh!]
깜짝 놀라는 팬들.
날카로운 스코티시 백파이프 소리와 함께 드류가 천천히 링으로 나왔다.
PWA에 소속된 그는 최근 들어 각본 상으로 레스너를 계속 귀찮게 하는 몇몇 선수들 중 하나였다.
그 큰 키와 잘생긴 얼굴, 근육질의 몸매는 아무리 레스너라고 해도 어느 정도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약자’라고 설정해둔 생각을 바꿀 마음은 없었지만.
드류가 링 위로 올라와 곧바로 클레이모어를 날리려 들었고, 레스너는 옆으로 피하며 그 뒤를 잡았다.
곧바로 이어지는 저먼 수플렉스.
투콰앙-!
레스너는 링 위에서 마구잡이로 난동을 부리며 자신의 힘을 과시했다.
확실한 메인 이벤터 레벨로 성장한 드류조차도 지금의 압도적인 레스너에게는 상대가 될 수 없었다.
그렇기에 계속 이어지는 Vs ALL 매치는 이 브룩 레스너라는 야수의 차력 쇼에 가까운 구성으로 구성되었다.
시간에 따라 선수들이 계속 나오는 방식이었지만, 딱히 필요도 없었다.
레스너는 다음 선수가 나오기 전에 이미 먼저 나온 선수를 링 밖으로 넘길 정도로 압도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렇게 한 명 한 명.
팬들은 그 모습에 취했다.
원래 강자가 보이는 카리스마와 힘이 강렬할수록 대중들은 거기에 매료되는 법이었다.
그리스 신화의 헤라클레스처럼.
[Suplex City-!]
짝! 짝! 짝짝짝!
[Suplex City-!]
짝! 짝! 짝짝짝!
[Suplex City-!]
짝! 짝! 짝짝짝!
팬들이 레스너의 새로운 챈트를 외쳐주면서, 경기는 그리 나쁘지 않은 분위기 속에 계속해서 이어졌다.
레스너는 괴물이었다.
종합격투기에서 훌륭한 커리어를 쌓아온 이 남자는, 이제는 그 누구도 쉽사리 건들 수 없느 존재가 되었다.
실전에서 자신을 증명한 괴물을 누가 감히 나서 맞서고 반응을 가져와서 이긴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아무도 없으리라.
적어도 현역 중에서는 말이다.
팬들도 그렇게 생각했다.
레스너의 강함은 압도적이었고 충분한 설득력이 있었다. 열 명 이상을 넘겨버려도 토를 다는 선수는 없었다.
레스너는 숫자를 세나갔다.
스무 명까지만 넘겨버리면 퇴근.
그게 끝나면 통장으로 페이퍼뷰 수당인 칠백만 달러가 곧바로 꽂혔다.
그 돈으로 사랑하는 가족을 먹여 살리면서 행복하고 조용한 삶을 산다.
바로 그게, 브룩 레스너라는 사나이가 현재 그리고 있는 자신의 미래.
거기에 프로레슬링에 대한 존중이라고는 조금도 없었지만 그게 브룩 레스너라고 하는 사나이였다.
열셋, 열넷.
열다, 열여.
열일곱, 열여덟.
열아홉.
[Uoooooooooooooooooohhhh!!]
그리고 마지막.
스물.
카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울려 퍼지는 음악.
러셀 오메가가 등장했다.
[Waaaaaaaaaaaaaaaaaggghhh!!]
팬들의 환호를 들은 레스너는 어이가 없다는 듯 웃으며 그를 맞이했다.
하트 패밀리에서 태어나 WWF로부터 배신을 당하고 여기에 이른 선수.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로레슬링에 환멸이 나지 않았다는 점에서, 레스너는 절대 그를 좋게 생각하지 않았다.
‘등신 같은 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물론 실력은 꽤 괜찮았지만.
레스너는 러셀을 저먼으로 넘겼다.
투콰앙-!!
경기의 막바지.
[Yeeeeeeeeeeeeeeeeaaahhh!!]
팬들도 즐거워하는 가운데, 러셀이 벌떡 일어나 레스너의 뒤를 잡았다.
그리고 자신도 저먼으로 넘겼다.
투콰앙!!
쓰러지는 레스너.
숨을 몰아쉰 야수 앞에서 러셀은 그대로 오메가 슈터를 사용하려 했다.
하지만 허리가 꺾이기 직전.
몸을 비틀며 러셀을 떨쳐낸 레스너는 그대로 자리에 누운 상태에서 상대를 향해 힘껏 태클을 걸었다.
콰앙-!!
“끄, 헉?!”
순간 눈이 동그랗게 뜨이는 러셀.
준비도 되지 않은 상대에게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태클을 걸어버렸으므로 어찌 보자면 당연한 일이었다.
링 아래의 헤이건도 순간 자신의 역할을 잊고 크게 한숨을 쉬었을 정도.
하지만 레스너는 무시했다.
어차피 자신이 어떻게 하더라도 러셀이 뭔가를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러셀은 고통스러워했고.
레스너는 그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각본을 조금 어겨가면서까지 보다 화려한 마무리를 지으려 했다.
링 밖으로 F5.
준비되어있지 않았던 러셀은 바깥에 떨어지면서 하마터면 크게 다칠 뻔했지만, 팬들은 크게 열광했다.
[Waaaaaaaaaaaaaaaaggghhhh!!]
이게 레스너의 가장 역겨운 부분 중 하나였다.
그는 팬들의 마음을 귀신같이 읽었으며 자신이 어떻게 하면 좋은 반응을 얻을 수 있을지를 본능적으로 알았다.
따라서 백스테이지로 돌아간 러셀이 이 건에 대해 걸고 넘어져도, 비숍이 반응이 좋다며 커버 쳐주는 것이었다.
그렇게 경기가 끝나는 듯했다.
스무 명째까지 처리한 레스너는 로프를 붙잡고는 있는 힘껏 포효했다.
하지만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Waaaaaaaaaaaaaaaaaaggghhh!!]
팬들도 환호를 보냈고.
스무 명까지 완벽하게 넘겨버렸는데도 경기가 끝났음을 알리는 링 벨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 뭐야.”
레스너는 땀으로 범벅인 채 링 아래를 내려다보며 상황을 확인했다.
그러자니 바리게이트 앞에 기대 앉아 있던 러셀 오메가가 씨익 웃었다.
“무슨 일이야?”
“각본이 좀 바뀌었어.”
“무슨, 그게 또 뭐야?”
“한 명 더 나올 거다.”
“……?”
러셀도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이 되서야 겨우 알 수 있게 된 비밀 각본.
한 사람이 더 나온다.
그 말에 전혀 짐작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린 레스너는 뭐가 됐던 비숍에게 지랄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일은 따로 돈을 더 받아내야 다음에 또 같은 일이 안 벌어질 듯했다.
어쨌든.
넘겨버리면 되겠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입장로 쪽을 슬며시 돌아보자, 팬들에게도 그 사실을 알리 듯이 카운트가 시작되었다.
[Uooooooooooooooohhh……!]
아직 경기가 끝나지 않았다.
[뭐죠?! 누가 나오는 거죠?!]
[한 명이 더 있군요!!]
레스너에게 도전을 표명한 레슬러가 한 명 더 존재했다. 해설자들이 그 사실을 목이 터져라 팬들에게 알렸고.
9.
8.
7.
6.
5.
4.
3.
2.
1.
그리고.
0.
검은 배경에 흰색 숫자.
0 중앙에 있는 공간이 줄어들며 이내 그 양옆으로 무언가 삐져나왔다.
완성되는 역십자.
그리고 그 앞의 해골.
이어지는.
한 남자의 테마.
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
순간 말을 잇지 못하는 팬들.
하지만 이내.
경기장 전체에 챈트가 울려 퍼졌다.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뭐야?’
의아해 돌아보는 레스너.
그리고 그가 돌아왔다.
SIN.
6개월 이상의 장기 부상.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 벌크는 자신의 전성기 시절, 아니, 그보다 더 크게 부푼 상태였다.
하지만 그뿐만이 아니었다.
손에 들린, 슬레지 해머까지.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
레스너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