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 Match 77.
“……부탁드리죠.”
레스너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신을 때려죽일 듯했던 그가 이러는 이유는 간단했다.
잃을 게 있기 때문이었다.
반대로 신은 잃을 게 없었다.
막말로 진짜 이대로 레스너와 싸워 영구적인 장애가 남고 그로 인해 은퇴하게 되어도 괜찮다는 태도였다.
신이 그렇게 나온다면 아무리 레스너라도 한 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레스너가 프로레슬링 업계로 돌아온 이유는 어디까지나 ‘돈’ 때문이었다.
지금의 업계는 돈이 됐다.
더군다나 레스너 본인도 업계에서 최상급의 대우를 받을 수 있는 화려한 경력을 그동안 쌓아둔 상태였다.
그러므로 종합격투기를 떠나 편하게 노후 자금이라도 벌 생각으로 프로레슬링 업계에 돌아온 것이었다.
누구도 신경 쓰지 않고 적당히.
시키는 일만 하고.
계속 그럴 생각이었다.
지금 눈앞에 있는 개자식만 아니었다면 분명히 그렇게 되었을 터였다.
레스너가 이를 아득바득 갈았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테이커는 조심스럽게 상황을 중재하고자 했다.
이미 은퇴한 몸으로서 자신이 나서는 게 사실 딱히 좋은 상황은 아니라는 사실을 직감하고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역시.
아끼는 후배 두 놈이 진짜로 싸움이 붙은 것을 그냥 두고볼 순 없었다.
“신, 너는?”
“저쪽에서 간곡히 부탁하는데, 사과를 안 받아줄 수도 없는 노릇이죠.”
“……착각하지 마라.”
레스너가 다시 눈을 부라렸다.
“주먹질도 제대로 못하는 네놈이 또 무슨 더러운 수단을 써서 내 몸을 상하게 할지가 불안한 것 뿐이니까.”
“뭐야, 그런 각오도 안 해뒀어?”
“다시 한 번 말하지.”
“부디.”
“난 그저 내 할 일만 하고 돈만 받아가면 그만이야. 그리고. 너는 종합격투기에서 헤비급 왕좌를 차지해봤었던 날 이길 자격이 절대로 없어.”
“이야, 근거가 겨우 그거야?”
“넌 그냥 가짜에 불과해. 그렇다고 옛날 양반들처럼 터프하지도 않고. 그냥 그런 척만 하고 있을 뿐이잖아.”
“아주 날 등신으로 보는군.”
신이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그리고는 대답했다.
“레스너, 나는 여기에 있는 이 남자가 락콜드를 머리부터 지면에 수직으로 꽂는 순간을 보면서 자라왔어.”
그리고 테이커를 가리켰다.
“바로 거기에 반했지. 멋진 순간이었어. 또, 그걸 버텨내고 일어서는 락콜드를 보며 전율할 수밖에 없었지.”
“하지만 넌 그 반도 못 따라가지.”
“그래, 그럴지도 모르지. 네가 활동하던 그 시기에 비해 우리는 너무 물렁한 레슬링을 하고 있는지도 몰라.”
하지만.
그렇기에 만들어냈다.
자신만의 방식을.
그리고 그걸로 증명해냈다.
프로레슬링이 무엇인지.
“너를 뺀 모두가 날 인정하지.”
“웃기는 소리로군.”
“너 같은 놈은 이해 못할 이야기야. 넌 업계 자체를 폄훼하니까 그 비뚤어진 시선으로 뭐가 느껴지겠어?”
“그렇다면 납득 시켜보던가.”
“내가 왜? 아니, 오히려 납득을 못하겠으면 그쪽이 꺼지는 게 맞잖아?”
“난 계약에 따라 각본을 수행하고 있을 뿐이야. 왜 그걸 부정하는지 모르겠군. 아니면 복수 때문이냐?”
“그럴 리가 있겠어? 레스너. 그 건은 이미 내가 네 손바닥을 박살 내면서 서로 푼 문제라고 생각하는데.”
“그러면 전자로군.”
“맞아, 나는 네가 이 업계에 끼치는 해악이 정말로 마음에 들지 않아.”
“해악? 내 덕에 ACW는 WWF와 맞설 정도로 시청률이 올랐는데? 그러고 보니 네 애인이 그쪽 회장이었지?”
“그 이야기는 안 꺼내는 게 네 앞으로의 신상에 좋을 텐데. 레스너.”
“왜, 회장 딸이랑 붙어먹어서 아이콘이 된 주제에 정곡을 찔리셨나?”
“……그만해라.”
테이커가 끼어들었다.
“신, 일단 이건 비즈니스다. 레스너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과 그걸 표현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라고.”
“알고 있습니다.”
“레스너, 너도 사과해라. 아무리 그래도 개인사를 건드린 건 좀 심했다.”
“……그러죠. 미안하게 됐다.”
레스너가 마지 못해 이야기했다.
테이커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거나, 너희 둘의 행동은 모두 비즈니스에 큰 도움이 되었다. 대립에 대한 팬들의 반응이 엄청나지.”
그렇기에 협력했으면 좋겠다.
“결국, 레스너. 너는 돈을 위해 이 업계로 돌아온 거고. 신, 넌…….”
“돈은 그 과정 중 하나일 뿐이죠.”
“그런 의미에서 레스너도 아예 협조성이 없다고 볼 수는 없겠지. 어쨌든 자기 역할은 훌륭하게 수행하니까.”
그 말에 잠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는 두 사람.
레스너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어이가 없군.”
“그러게 말이야. 정말 우습지 않아? 그 차이 하나가 우리 두 사람의 사이를 이렇게 벌려놨으니 말이야.”
바로 그때였다.
테이커가 미소를 지었다.
“흠.”
거기에 순간 신과 레스너가 의아해 돌아보았고, 데드맨은 이내 자신이 웃은 이유에 대해서 설명했다.
“뭔가 좀 아이러니하군.”
“……? 뭐가요.”
“케이페이브처럼 느껴져.”
“지금 이 상황이요?”
“그래, 레스너와 너는 진짜로 대립하고 있지.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이건 신, 네가 말한 ‘현실과 맞닿아 있는 스타일’의 각본이 아니더냐?”
“뭐, 그렇긴 하죠.”
“레스너, 넌 여기 이 친구를 잘 못 믿는 모양이지만. ……내가 보증하지.”
“테이커.”
“이 친구는 내 연승을 가져가고 그걸 정말로 완벽하게 소화해냈어. 만약에 이 친구가 아니었다면 자네가 가져갔을지도 모르는 내 연승을 말이야.”
“그걸 누가 가져갑니까.”
너요, 너.
신은 어이가 없어 생각했다.
전생에서 디 캐스켓-테이커의 위대한 연승을 끊었던 것은 바로 눈앞의 남자, 브룩 레스너였다.
하지만 지금은 자신이었다.
그렇기에 신은 절대 레스너에게 자신이 패배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물론 거기에는 많은 정치적 요소가 포함되어서, ACW의 부사장인 데릭 비숍은 레스너를 밀고 싶은 모양이지만.
마냥 그렇게 했다가는 PWA와 WWF의 연합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그럴 수만도 없는 상황이었다.
즉.
선수들 둘의 합의가 중요했다.
“놀라운 일이로군요. 테이커 당신이 이런 남자를 인정할 줄은 몰랐어요.”
“함께 일해보면 느낄 거다.”
“…….”
잠시 고민에 빠진 레스너.
신도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나쁘지는 않군.’
브룩 레스너와 아예 최악의 관계를 맺을 생각까지는 절대 없었다
어쨌든 간에 함께 일했을 때 시너지가 나오는 파트너인 건 사실이니까.
숀 시나나 러셀 오메가, 랜스 오튼, 사모아 고와는 다른 형태의 케미.
보다 야성적인 대립이라고 할 수 있는 두 사람의 싸움은 팬들로부터 엄청난 호응을 얻고 있었다.
하지만.
절대로 이쪽이 숙이고 들어가는 입장에서 관계를 맺을 생각은 없었다.
그리고 이 업계의 중심에 선 자이자 업계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레스너와 대적할 아이콘 레벨의 선수로서.
신은 이길 생각이었다.
종합격투기에서는 져도 좋다.
그건 레스너가 전문이니까.
하지만 프로레슬링은.
“내가 전문이지.”
“뭐?”
“나에게 맡겨봐라. 레스너. 너조차도 만족할 만한 레벨로 대립이 진행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도록 하지.”
“만약에 안 되면?”
“네 실력이 부족한 거겠지.”
“하!”
레스너가 신의 앞에서 처음으로 긍정적인 방향의 웃음을 터뜨렸다.
방금 신의 대답은 솔직히 말해서 꽤나 마음에 들었다. 자신의 실력에 절대적인 자신감이 있다는 게 느껴졌다.
그래서.
그게 허세인지 아니라면 진짜인지는 한번 확인해도 좋을 것 같았다.
“좋다, 신.”
테이커의 체면도 있으니까.
“어디 한번 해봐라. 네놈이 각본을 제시하면 보고 거기 맞춰두록 하지.”
단.
“각본을 수행한 뒤 반응이 미적지근하다면 각오해두는 게 좋을 거다.”
“걱정 마라. 레스너.”
신은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넌 이제 한 달 뒤면 나에게 제발 승리를 바치게 해달라면서 빌고 있을 테니까 말이야.”
“…….”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테이커는 저도 모르게 계속 웃음이 나오는 것을 느꼈다.
확실히 멋진 대립이었다.
각본상으로나.
현실로나.
그렇게 두 사람이 아주 약간은 협력할 기색을 보이기 시작했다.
* * *
회의가 끝나자, 레스너는 곧바로 일이 있으면 메일로 보내두라면서 자신의 저택으로 돌아갔다.
개인주의의 끝판왕 같은 놈이다.
테이커와도 가볍게 인사를 나눈 뒤 떠나는 녀석을 바라보며 나는 참았던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러자니 테이커가 다가왔다.
“좀 괜찮냐?”
“맥주나 한 잔 사주시죠.”
“네 부름에 내가 여기에 와준 건데 오히려 네가 사야 하는 거 아니냐?”
“그럼 그럴까요.”
“좋다. 할 이야기도 있고.”
“……?”
“레스너에 관해서다.”
“아까 다 끝난 거 아니었어요?”
“그렇긴 하다만, 신 너도 확인해둬야 할 부분이 있을 듯해서 말이야.”
“뭐죠?”
“일단 이동하자.”
테이커가 나를 이끌었다.
주차장에 있던 픽업 트럭에 올라탄 테이커와 나는 근처의 펍으로 향해 맥주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눴다.
팬들이 쉽게 알아보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변장까지 하고서 말이다.
그리고 이어진 이야기는.
예상과는 조금 달랐다.
“사실, 그 자식을 확실하게 발라버릴 만한 방법을 말해주고 싶지만.”
“그런 게 있나요?”
“총을 쏘면 그놈도 죽겠지.”
“……?”
“물론 넌 그런 방법을 쓰지 않고서도 레스너의 인정을 받았지만.”
“제가요? 전혀 안 그런 거 같던데요. 선배님 말씀은 찰떡같이 듣는데 제 말은 완전 개무시했잖아요?”
“아니야. 신. 레스너는 내심 네가 만만히 볼 만한 선수가 아니라는 사실을 느끼고 있을 거다.”
“제가 좀 보여주긴 했죠.”
“다들 그렇게 나갔어야지. 다른 놈들은 너무 샌님이야. 우리 시절의 그런 패기가 없단 말이다.”
“언제 꼰대-테이커가 되셨어요?”
“늙으면 다 그래.”
맥주를 홀짝이는 테이커.
“아무튼, 너도 정말 레스너가 미워서 싸운 건 아닐 테고. 결국에는 같이 잘 해보자고 생각하는 거 아니냐?”
“사실 그렇죠.”
나는 쓰게 웃었다.
“레스너는 괴물 같은 재능의 소유자에요. 어딜 가더라도 스포츠 업계에서는 탑 급이 될 수 있는 남자죠.”
그래서 사실 레스너가 돌아왔다는 사실 자체는 나도 환영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두 가지가 문제죠.”
그 개차반 같은 인성.
그리고 업계를 무시하는 태도.
“파트-타이머는 파트-타이머 나름의 역할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쇼의 중심이 아니라 그 옆에서 감초 역할만 하더라도 충분하잖아요.”
“그게 낫지.”
“테이커 당신도, 몸 좀 다시 만들고 하면 레슬 임페리움에서 한 경기 정도는 괜찮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다만.”
“…….”
“후배들 자리를 뺏을 순 없지.”
“뭐, 아예 나머지가 다 빠지는 것도 아니고 그 정도는 괜찮지 싶은데요.”
이 사람도 전생과는 태도가 많이 달라져 솔직히 말하자면 꽤 놀라웠다.
전생에 테이커는 무려 2020년까지 꾸준히 레슬 임페리움 같은 초대형 쇼에 출연하며 큰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몸 상태는 점점 망가져서 좋은 경기를 보여줄 수 없게 되었고, 말년에는 나쁜 평가를 받았다.
그게 언제나 아쉬웠다.
유종의 미를 거두고 떠나는 그런 은퇴가 테이커에게는 어울렸을 텐데.
하지만 이제는.
적어도 내가 생각했을 때는 그렇게 된 듯해서 기쁜 마음이 들었다.
말인즉슨 내가 테이커가 뒤를 맡기고 은퇴할 수 있을 정도로 멋지게 시대를 이었다는 뜻이 아닐까.
“아무튼.”
건배를 제안하는 테이커.
“지금 이 시대의 주역인 네가 그렇다면 그 말이 맞는 거겠지.”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 실제로 위클리 쇼에는 제대로 나오지도 않는 레스너가 업계의 최종 보스로 군림하는 그림은…… 다른 선수들을 무시하는 것밖에 더 되나?”
“그렇죠. 그래서 데릭 비숍이 등신 같다고 다들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친구, 용케 아직까지 회사에서 안 잘리고 일하고 있군.”
“뭐, 그래도 나름대로 자기 고집만 안 부리면 일은 잘하는 사람이니까.”
“……누가 떠오르는데.”
“저희 장인어른이요?”
“오, 벌써 그렇게 됐나?”
“결혼 아직 안 했거든요. 초대 드려서 오기로 하셨으면서 왜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십니까?”
“그편이 더 재미있으니까.”
“…….”
“카리스마 아이콘 SIN이 당황한 얼굴을 볼 수 있는 귀중한 기회거든.”
너털웃음을 터뜨리는 테이커.
나는 말없이 그 잔에 내 맥주잔을 부딪치고는 그대로 쭈욱 원샷했다.
그래, 좋다.
브룩 레스너.
네가 절대로 토를 달 수 없을 정도로 멋진 대립을 진행하도록 하자.
“어떤 방식으로?”
“아니, 그걸 지금 말해야 합니까?”
“나니까 알려다오.”
“어, 일단.”
“응?”
“그 자식 집부터 부술 겁니다.”
“…….”
얼이 빠진 테이커의 표정을 볼 수 있는 것도 꽤 귀중한 기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