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 Match 94.
퍼시와 빌은 멍청하지는 않았다.
스파링이 끝난 뒤, 그들은 내게 곧바로 계약을 제안했고 나는 나쁘지 않은 수당으로 계약을 성사시켰다.
한 경기에 25달러.
그들이 나를 인종적인 눈으로 본 것을 진작 알아챘지만 나는 일부러 그걸 모르는 척하며 내 힘을 보여주었다.
그리하여.
나는 GCW의 선수가 되었다.
매주 정기적으로 체육관에 모여서 훈련을 하며 한 달에 한 번씩 대회를 열어서 선수들의 기량을 선보인다.
로스앤젤레스 바깥에서 대회를 여는 일도 있어서 2주에 한 번씩 스케줄이 잡히는 일도 많다고 들었다.
나쁘지는 않았다.
나는 미국에 대해서 알고 싶었다.
그를 위해서 내가 가진 능력을 활용할 수 있는 프로레슬링이 제격일 터.
몸을 움직이며 상대와 겨루는 일은 정말 질리도록 많이 해봤으니 말이다.
물론.
목숨과 목숨이 걸려 있는 그때와 비교하면 지금은 천국이나 다름없었다.
계약을 마치고 교회로 돌아온 나는 최목사에게 상황을 설명하고는 GCW의 연락이 오는 걸 기다렸다.
빠짐없이 세탁소에 출근해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현재의 미국에 대해 이래저래 느끼고 배웠다.
베트남전이 완전히 끝났다.
미국은 그전부터 발을 뺐고 이제는 미국 전역에 전쟁에 대한 공포나 신경증이 많이 줄어든 상태였다.
그리하여 미국인들은 평화를 되찾았지만, 그 흔적은 아직 남아있었다.
히피는 곳곳에 조금씩 보였고.
그들이 마약을 빨면서 사랑에 대해서 노래했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서는 흑인들이 분노를 참고 있었다.
전쟁은 끝났다.
하지만 증오는 계속 생산되었다.
동양인과 백인을 향한 분노.
개중에서도 흑인들은 주로 힘이 없는 동양인들을 공격할 때가 많았다.
동양인들도 흑인을 싫어했다.
하지만 그 누가 먼저 총을 쏘고 그리하여 증오가 촉발된 건지는 몰랐다.
흑인들의 말처럼, 동양인이 괜히 가만히 있는 흑인을 범죄자로 의심하면서 화를 불러일으켰을 수도 있고.
반대로 동양인들이 증오 범죄에 노출되어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뭉칠 수밖에 없었을 가능성도 있었다.
안타까운 일이었다.
증오의 연쇄는 어느덧 그 기원조차 불분명했지만 사람들은 계속 싸웠다.
그런 상황에서 나는 언제나 단 하나만을 생각하며 살아가려고 노력했다.
나 자신의 안위.
크릭스와의 일도 그랬다.
나는 단지 소매치기를 당해서 그걸 되돌려줬을 뿐이었다. 보다 더한 공포로 아예 상대의 의지를 꺾어놓았다.
하지만 크릭스는 그걸 이해하지 못했고 나는 다시금 행동에 들어갔다.
그래서 겨우 잠잠해졌지만.
혹시나 나중에 그 일이 희미해졌을 때 또 다시 일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만약 그렇다면.
‘다시 나서야겠지.’
부디 그럴 일이 없기를 바랄 뿐.
다행히 이후로는 평화로운 날이 이어졌고, 며칠 뒤에는 GCW의 빌 홉킨스로부터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일요일에 체육관 집합.
그 말에 따라 일이 많다는 사장님께 양해를 구하고 휴가를 낸 나는 주소지에 적힌 체육관으로 찾아갔다.
“신!”
체육관 안으로 들어서자 링 앞에 서있던 빌 홉킨스가 나를 반겼다.
“잘 왔네!”
“안녕하십니까.”
“그래, 레슬링할 준비는 됐나?”
“언제라도요.”
“하하! 좋군! 여기…… 다 모인 것은 아니지만 자네의 동료들일세.”
“그렇습니까.”
나는 링 위를 바라보았다.
선수들 두 명이 엎치락뒤치락 싸우고 그 주변에서 매트를 깔고 운동을 하는 사내들이 눈에 들어왔다.
대부분이 백인.
흑인도 몇몇 보였다.
그들은 내 모습을 보고는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 신경 쓰지 말게.”
“제가 뭐 잘못이라도?”
“아니, 그게…….”
시선을 피하는 빌 홉킨스.
“일단 옷 갈아입고 오게.”
“옙.”
고개를 끄덕인 나는 빌 홉킨스가 일러줬던 대로 가져온 체육복을 입고 다시 링으로 돌아갔다.
역기를 비롯한 온갖 도구들이 가득한 곳에서 남자들이 고함을 지르며 땀을 흘리고 있는 와중.
“왔나.”
퍼시 홉킨스가 다가왔다.
“기초부터 하지.”
“잘 부탁드립니다.”
빌과는 달리 그는 약간 까칠한 태도였으나 이제는 적어도 공과 사를 확실히 구분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일단 스트레칭부터 했다.
몸을 유연하게 늘리는 건 부상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는데 도움을 준다.
그게 퍼시의 설명이었다.
“꽤 유연하군.”
“감사합니다.”
“집에서도 꾸준히 하는 게 좋아. 훈련은 일주일에 한 번이지만 여기 놈들은 모조리 집에서도 하고 있으니까.”
“굳이 한 번인 이유가 있습니까?”
“돈 때문이지.”
“…….”
“우리는 든든한 뒷배가 있지도 않고 적당히 캘리포니아 지역에서 유명해진 레슬링 단체일 뿐이야.”
“그러고 보니.”
“응?”
“파워풀 딕이었죠.”
“아, 딕 말인가?”
퍼시가 고개를 끄덕였다.
GCW의 간판스타로 섹시한 이미지로 많은 여성 팬을 끄는 레슬러였다.
수염과 온몸에 털.
길게 기른 금발.
마초적인 이미지로 수많은 레슬러들 사이에서 당당히 주인공인 바로 딕.
……사실, GCW의 팬이라는 최 목사에게서 직접 전해들은 정보였다.
“그래, 저 친구 덕이지.”
퍼시는 솔직하게 인정했다.
이후 다른 훈련이 이어졌다.
링 위에서 구르며 매트에 적응했다.
“꽤 괜찮군.”
퍼시는 다시 그렇게 말했다.
Pretty Good.
파앙-!!
이어서 링 위에서 낙법.
“무슨 무술을 배웠나?”
“딱히, 정의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정말 뭐든지 배웠다.
그리고 그걸 어느 정도 변형시켜서 프로레슬링에 적용하는 것이었다.
결국 모든 일에는 법칙이 있고 하나의 마스터라고 할 수 있는 자는 그것을 응용하는 법에도 익숙하기 마련.
나는 프로레슬링이라는 이 격투기가 어떤 시스템으로 돌아가는 것인지 퍼시에게 자세히 배웠다.
물론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 없지는 않았다. 예를 들자면 내가 퍼시와의 스파링에서 사용하기도 했던 탑 턴버클 위에서 떨어지는 공격이라던가.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결국 프로레슬링이란 쓰리 카운트를 따내면 이기는 스포츠였으니 좀 더 효율적인 방법이 있을 텐데.
“상대의 공격에 잘 반응해주는 것도 중요하단 말이야. 맞고서 안 아픈 척을 하고 있으면 상대가 어떻게 돼?”
“그게 매너입니까?”
“뭐? 어, 그렇다고 할 수 있지.”
퍼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비효율성을 가지고 승리를 쟁취하는 게 프로레슬링인가 싶었다.
‘상대를 조롱한다는 느낌이군.’
강한 레슬러들은 그래서 일부러 공격을 맞고도 그냥 버티는 것 같았다.
지극히 남성적인.
그리고 비효율적인.
하지만 거기에서 미를 추구하는.
상대의 공격을 피하지 않고 정직하게 맞아주며 승자를 정하는 스포츠.
그렇게 나는 퍼시에게 동작을 배우며 프로레슬링에 대해 익혀나갔다.
솔직히 말하자면.
꽤 즐거운 시간이었다.
* * *
퍼시 홉킨스는 수많은 프로레슬러를 봐온 사내였다.
그 흉내를 내려고 하는 이들도 많이 봐왔다. 모두가 프로레슬러는 가짜라면서 폄하하는 일이 많은 시대였다.
하지만 업계의 최전선에서 계속 선수들을 봐온 그의 생각은 이러했다.
프로레슬링은 힘들었다.
상대의 공격을 받아준다는 것은 어지간한 담력이나 신뢰가 있지 않고서는 절대로 성립할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링에 오르는 건 소수.
대중은 프로레슬링이 진짜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모든 게 짜여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없다고 봐도 좋았다.
하지만 프로레슬링은 열악했다.
그래서 좀 제대로 애슬리트로서 능력을 발휘하는 이들은 다른 리그로 빠져나가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남는 건 뒤가 없는 이들뿐.
인생에서 패배한 이들뿐.
그럼에도 사내는 타인에게 인정받기 위해 사는 동물이다.
따라서 그들은 관객들의 환호를 받을수록 더 흥분해서 날뛰었고 경기 중에 부상을 입는 경우도 많았다.
그런 상황에서 이 동양인이 잘 적응해 선수로서 활동할 수 있을까 싶었지만 그것은 기우에 불과했다.
‘이 녀석은 진짜다.’
모든 동작에 금방 익숙해졌다.
이후로도 퍼시는 기본적인 동작들을 가르치면서 신이 과연 프로레슬러로서 얼마나 재능을 가졌는지를 시험했다.
그리고 결과가 나왔다.
그 운동 능력은 가공할 만한 레벨이었으며 도저히 동양인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였다.
‘돌연변이인가?’
순간 그런 생각이 들 정도.
길쭉하게 뻗은 다리로 뛰어 올라 2미터 가까운 높이에서 드롭킥을 차넣는 광경을 본 모두가 경악했다.
하지만.
드롭킥이 왜 드롭킥이겠는가.
공중에서 떨어져 내리는 동작이 가장 중요하기에 드롭킥이라고 불렸다.
즉, 다음 낙법이 중요했는데.
파앙-!
신은 그조차도 완벽하게 해냈다.
“허허.”
이 미친놈.
그런 소리를 애써 삼킨 퍼시는 무표정한 얼굴을 한 채 신에게 다가섰다.
동양인이라는 사실에서 오는 거부감과 더불어 자신을 엿 먹였던 놈을 순수하게 칭찬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태도는 훌륭했다.
“나쁘지는 않군.”
“감사합니다.”
신은 그렇게 여겨졌다.
무뚝뚝했지만 군인 출신이라 기본적으로 성실했고 타인과의 교류도 레슬러들과 비교해서 잘 맺었다.
즉.
‘인종’ 하나만을 빼면 퍼시 홉킨스가 뭐라고 잴 부분은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건.
경기장에 하나둘씩 모인 열 명 가량의 선수들도 모두 하는 생각이었다.
개중에 한 남자가 나섰다.
파워풀 딕.
“이봐, 퍼시.”
“딕…….”
“이 친구, 왜 소개를 안 해줘?”
“어, 어. 우리 새 선수네.”
“뭐?”
“새 선수야.”
“허 참, 우리 이제 망했나? 나 슬슬 다른 단체 알아보면 되는 건가?”
“아니, 그럴 리가 없잖나.”
“그러면 왜, ‘이런’ 친구를?”
딕이 미소를 지었다.
말은 안했지만 다들 동의했다.
‘동양인’.
세탁소에나 보는 그런 인종이 프로레슬러로서 영입되었다는 사실에 모두가 순간 의아해한 것이었다.
그것이 그들에게는 당연했다.
동양인? 나쁘지 않다.
하지만 프로레슬러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신의 능력을 어느 정도는 믿었던 빌은 얌전히 그를 타일렀다.
“진정하게나. 동양인이라고 해도 거기에 맞는 역할이 분명히 있겠지.”
“아니, 빌.”
그렇게 말한 것은 올해로 정확히 20세가 된 청년 레슬러, 갱 크러셔였다.
1950년대 마피아 콘셉트로 ‘스카페이스’를 따라 해서 건방진 기믹을 장착해 나름대로 인기를 끌고 있었다.
거기다 GCW 내에서 약삭빠른 태도로 선배들의 사랑도 받았지만, 솔직히 퍼시 앤 빌은 그다지 크러셔에게 정을 주지 않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가 뒤에서 공공연연이 자신은 더 큰 물에서 놀 것이며 이 GCW는 교두보에 불과하다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이게 말이나 됩니까?”
“크러셔.”
“제기랄, 저 원숭이에게 돈 쓸 바에야 제 급여나 좀 올려주시라고요.”
“우리는 선수가 더 필요해.”
“솔직히 이 정도까지 몰락했을 줄은 몰랐습니다. 아무리 네바다 놈들 수작에 당했다고 해도 동양인이라뇨!”
“덩치도 좋고 힘도 좋아. 근육도 있어. 거기다 기술도 금방 배우지. 그런 친구를 안 쓸 필요가 있나?”
“아니…….”
크러셔는 주변의 눈치를 살폈다.
파워풀 딕에게로 향한 시선.
분명히 이렇게 나선 것도 다 파워풀 딕의 눈치를 보고서 한 말이리라.
크러셔는 이 GCW에서 유일하게 파워풀 딕만큼은 인정했고 종종 함께 다른 단체로 가는 상상을 하는 듯했다.
그렇기에 빌도 개의치 않고 말했다.
“자네 능력이나 신경 쓰게.”
“예? 뭐라고요?”
“솔직히 말하자면 자네 기술도 형편없고 몸 상태도 최악이잖나. 좋은 기믹으로 못 올라가는 것도 그래서지.”
“이런 썅! 말 다 했습니까?!”
“아니, 확실히 말해두지. 자네는 저 친구보다 나을 게 하등 없다고.”
“크윽……!”
자신이 존경하는 파워풀 딕 앞에서 쪽을 당했기 때문일까.
크러셔는 곧바로 얼굴이 벌게져 락커룸으로 들어갔고, 빌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링 위의 신 말고는 모두가 놀라 빌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는 와중.
빌은 나직이 이야기했다.
“딕.”
“……예, 빌.”
“저 친구 좀 지켜보게나.”
“누구요. 크러셔? 아니면 저 동양인 친구?”
“당연히.”
동양인 쪽이었다.
“크러셔는 솔직히 지금 나가도 별반 타격이 없는 상황이니까.”
“글쎄요. 그래도 나름대로 인기 끄는 친구 아닙니까? 여자애들이 저 다음으로 좋아하는 게 크러션데요.”
“그건 그렇지.”
하지만 누군가 말했다.
사업가는, 그리고 사람이라면 응당 미래를 그릴 줄 알아야 한다고.
그런 의미에서 봤을 때.
크러셔보다는 저 뭔지 모를 엄청난 재능의 동양인에게 한 표 던지고 싶은 게, 지금의 빌의 마음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