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레슬링의 신-609화 (609/634)

Dark Match 95.

프로레슬링은 재미있다.

다른 무술과는 다른 맛이 느껴졌다.

오랜만에 몸을 움직이며 땀을 흠뻑 흘린 신은 자신을 향한 선수들의 시선을 느끼며 락커룸으로 돌아갔다.

‘다들 좀 경계하는 모양이군.’

그래도 괜찮았다.

이런 상황은 매번 겪어왔다.

베트남에서, 자신을 믿지 않는 베트남 사람들과 동양인이라면서 무시하는 미군 사이에서 계속 일을 해왔다.

그러므로 답은 간단했다.

천천히 자신의 실력을 보여주고, 그들의 인정을 받아내면 그만이었다.

‘그거면 됐지.’

자신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인생이란 언제나 자신의 생각과 다른 일이 벌어지기 마련이었고, 그것을 얼마나 잘 수습하느냐에 달렸다.

신이 샤워실에 들어가고 얼마 뒤.

‘이 빌어먹을 원숭이 놈.’

크러셔가 락커룸 안으로 들어섰다.

아직 기믹이 준비되어있지 않은 신과는 달리, 다른 선수들은 이후 대회에서 쓸 각본 회의가 남아있었다.

그래서 다들 남아 있는 상황에서 몰래 빠져나온 그는 아까 전 빌에게 먹은 쪽을 여기서 풀고자 했다.

1970년대의 락커룸은 전쟁터였다.

다들 도둑을 의심해 락커룸을 자물쇠로 채우고 다녔다. 실제로 금품 따위가 사라지는 일이 꽤나 잦았다.

하루 일해서 벌어먹고 도시와 도시를 옮겨 다니는 부랑자 같은 선수들도 있어서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크러셔는 몰래 창고에서 가져온 절단기를 꺼내 신의 락커를 따고 그 안의 가방을 꺼내들었다.

‘엿이나 좀 먹어보라지.’

그리고 그걸 건물 뒤편에 있는 쓰레기장에 휙 던져 넣은 뒤, 일부러 발로 밟아 쓰레기와 뒤섞이게 만들었다.

이후 유유히 귀환.

“크러셔, 어딜 다녀온 거야?”

“재미있는 일이 있을 겁니다.”

파워풀 딕의 물음에 낄낄 웃으며 답한 크러셔는 이어진 회의에서 조용히 동양인의 반응이 나오길 기다렸다.

한편.

락커룸 바깥으로 나온 신은 락커룸에 떨어져 있는 절단기를 보고는 대충 상황을 알아차렸다.

‘기름때가 묻었군.’

도둑이 들었나?

순간 그런 생각을 한 신은 갈아입을 옷이 없다는 걸 깨닫고는 허리에 타월을 두른 채 훈련장으로 향했다.

훈련장에서 한창 각본에 대해 이야기를 하던 퍼시 앤 빌과 선수들은, 거의 알몸인 채 나타난 신을 보고는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었지만, 떡 벌어진 어깨와 제대로 잡힌 근육이 여기 있는 그 누구보다도 더 대단했다.

그렇기에 순간적으로 다들 무슨 반응을 해야 하는지 갈피를 못 잡았다.

하지만 개중에서도 미리 준비를 하고 있던 크러셔는 배를 부여잡고 미친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푸하하하하! 저게 뭐야?!”

“…….”

“아니, 뭐. 게이 포르노 배우야? 그쪽에서는 너희가 좀 수요가 있던가?”

“크러셔!”

“아, 진짜 미치겠네~.”

빌이 크게 나무랐지만 크러셔는 자신의 옆에 서있는 딕의 눈치를 살피며 계속해서 신을 조롱했다.

딕도 나쁜 반응은 아니었다.

애써 웃음을 참았고 체면을 차리려는 듯 헛기침을 했다. 다른 선수들 역시도 점차적으로 웃는 모습이었다.

모두들 알아차렸을 것이다.

으레 선수들이 신참에게 하듯이 크러셔가 저 동양인의 가방을 가져다 쓰레기장에 처박았다는 사실을.

허나 증거도 없는 상황에서 신에게 조금은 호의적인 빌도 쉽사리 크러셔를 범인으로 지목할 수는 없엇다.

바로 그때였다.

“너로군.”

“뭐?”

“너야. 남의 락커 자물쇠를 부수고 그 안의 짐을 빼돌린 쥐새끼가.”

“……?”

신이 크러셔에게 다가섰다.

보통 신참은 두 가지 반응이었다.

무시하거나.

아첨을 하며 비위를 맞추거나.

하지만 신은 어느 쪽도 아니었고 그것이 모두를 다시 놀라게 만들었다.

또한 그 무뚝뚝한 표정에서 나오는 포스가 순간 모두를 쫄게 만들었다.

크러셔는 당황해 되물었다.

“무, 무슨 소리야?! 증거 있어?!”

“그 떨리는 목소리. 당황한 표정.”

“고작 그런 걸로……?”

“네 손의 기름때 자국도 그렇지.”

크러셔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까 그 절단기 손잡이에 붙어 있던 기름때 자국이 선명하게 손바닥에 찍혀 있는 상황이었다.

“내 가방 어디 있어?”

“크러셔!”

일이 그렇게 되자 빌 역시도 할 말이 생겼다.

“가방 돌려줘!”

“아니, 썅! 여기가 고등학교요?”

크러셔는 어이가 없어 외쳤다.

상황이 반전되었다.

크러셔가 저질렀다는 정황이 밝혀지자 딕을 비롯한 선수들이 시선을 피하면서 귀찮은 일을 피하고자 했다.

업계의 Bullying이란 그런 법이었다.

정확히 선후배 관계가 없는 이곳에서는 파벌과 친해지거나 하지 않는 이상 약자는 괴롭힘을 당하기 마련.

그리고.

이제는 명백히 크러셔가 약자였다.

“크러셔.”

“에이 시팔!”

크러셔는 신의 가슴을 퍽 쳤다.

하지만 그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손목을 잘못 쓴 크러셔가 아파할 정도였다.

주변의 시선이 좋지 못한 것을 느낀 크러셔는 훈련장을 나서며 그대로 한 마디를 내뱉었다.

“저 병신 가방은 쓰레기장에 있으니 알아서 잘 찾으시고! 저는 인정 못 합니다! 뭔 동양인이 프로레슬러야?!”

“…….”

“…….”

분위기는 최악이었다.

다들 불링을 당한 신에게 좋지 못한 시선을 보내는 가운데, 빌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상황을 수습했다.

“일단.”

그러나.

선수들 중 그 누구에게도 일을 맡길 수 없는 상황. 결국 빌은 스스로 쓰레기장에 짐을 찾으러 가야만 했다.

* * *

그렇게 최악의 분위기 속에서 신을 포함한 선수들이 집으로 돌아갔다.

퍼시 앤 빌은 또 다시 긴 한숨과 함께 이번 일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먼저, 신에게 부정적인 퍼시가 짜증을 내며 빌을 나무랐다.

“동양인을 쓰는 게 아니었다니까.”

“아직 쓰지도 않았잖아.”

“그 놈 하나 때문에 분위기가 개판이잖아! 굳이 그렇게 까지 해가며 선수로 영입할 필요가 있었던 거야?”

“능력은 있으니까.”

“빌, 잘 생각해봐.”

퍼시가 하나하나 이야기했다.

“프로레슬링에서 중요한 건 하나야. 티셔츠를 얼마나 팔 수 있는가지.”

“소규모로 도매상에서 떼다가 프린팅 하나만 추가하는 티셔츠잖아.”

“사업은 확장성이 있어야지!”

퍼시가 열변을 토했다.

“지금 저쪽에 바트 맥센이 하는 짓을 봤어? 시리얼! 무려 시리얼에 선수들 얼굴을 넣는다고 한다니까!”

“그래, 알고 있어.”

“그 시리얼에 동양인 얼굴이 나오면 누가 사겠어? 넌 동양인 시리얼이 나오면 쌀 냄새 나서 사먹을 거야?”

“…….”

“동양인은 안 돼. 빌.”

“꼭 그런 것도 아니야.”

“뭐?”

“가면을 씌우면 되잖아.”

“가면……?”

“Beaner 루차도르처럼 말이야. 일단 그 전에 하나 물어봐야겠는데.”

Beaner.

‘콩이나 먹는 놈’이라는 뜻으로 히스패닉을 비하하는 멸칭이었다.

“신, 그놈이 ‘인종’ 하나만 빼면 충분히 쓸 만하다고 생각하는 거지?”

“그야 물론이지.”

퍼시는 가볍게 혀를 찼다.

“힘은 진퉁이야.”

수플렉스는 상대가 합을 맞춰줘야만 가능한 기술이었다. 힘을 주는 상대를 뽑아드는 건 지극히 어려웠다.

그걸 버티는 것조차도.

하지만 신은 그걸 해냈다.

프로레슬러로서 엄청난 장점.

더군다나 몸도 훌륭해서 분명히 강하다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다.

“근데 지금 첫 단추를 개 같이 뀄잖아. 크러셔 그 놈 성격이면 신을 자르기 전까지 나오지도 않을 텐데.”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 뿐이지.”

“뭐?”

“실제로 붙이는 거야.”

빌은 단호하게 이야기했다.

* * *

Shoot.

각본을 통해서 수행되는 쇼인 프로레슬링에서 각본을 벗어난 모든 상황을 뜻하는 말이었다.

그리고 대부분은, 선수들 간에 감정의 골이 깊어 갑작스러운 실제 공격을 이야기할 때 자주 쓰였다.

1970년대는 프로레슬링이 정착되기 이전의 시기였고, 선수들도 대부분 다른 직업을 가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프로’긴 하지만 ‘프로 의식’은 적었고 자기가 기분이 나쁘면 곧바로 상대와 진짜 싸우기도 했다.

물론 그런 일이 많지는 않았지만.

분기 별로 한 번씩 사고가 일어나서 그런 일을 잘 조율하고 선수들을 통제하는 것도 프로모터의 미덕이었다.

그리고 퍼시 앤 빌은, 선수들 간에 발생하는 그런 분쟁을 교묘하게 이용할 줄 아는 프로모터였다.

훈련으로부터 며칠 뒤.

평소처럼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의 작은 체육관에서 대회가 열렸다.

지역 방송국 카메라가 세팅 되었고 퍼시 앤 빌과 선수들이 백스테이지에서 오늘 경기에 대해 이야기했다.

“오늘 관객은 153명이다!”

[Uooohh!]

선수들이 신음을 흘렸다.

153명이면 꽤 많았다.

“좋지? 시합은 다섯 개!”

태그 팀 경기가 하나.

나머지 네 경기는 싱글.

메인 이벤트는 물론 GCW 챔피언인 파워풀 딕과 그 상대로 변호사 캐릭터인 로이어-라이어가 붙을 거고.

“승자는, 물론 딕이다!”

당연한 결과였다.

여기 온 관객의 절반 이상은 파워풀 딕의 근육을 보기 위해 온 여성 팬들.

그런 상황에서 딕이 멋지게 이기는 드라마가 업계에 있어서는 최고였다.

한편, 자리에 앉아 그 말을 들은 신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결과를 미리 이야기한다고?’

무슨 상황이지 싶었다.

다른 경기들도 그랬다.

누구하고 누가 싸워서 누가 이긴다 말한 뒤, 그 선수들끼리 의자를 가지고 모여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지막.

“두 번째 경기는 신과 갱 크러셔가 한다!”

거기에 다들 놀랐다.

“하!”

반면, 크게 웃음을 터뜨리는 크러셔.

“승자는 누굽니까!”

“알아서 정해라!”

빌이 단호하게 이야기했다.

뭔가 자신이 크게 오해하고 있나 싶었던 신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빌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물었다.

“저기, 빌.”

“……뭔가?”

“저희 둘이서 승패를 정하다니. 승부 조작을 하라는 말씀이십니까?”

“뭐?”

빌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순간 이 친구가 뭔가 단단히 오해하고 있나 싶었던 빌은, 순간적으로 그 생각을 정정해주려고 했지만.

‘뭐 그럴 리는 없겠지.’

다른 의미겠다 싶어 그냥 이렇게 말했다.

“잘 들어. 신.”

“옙.”

“프로레슬링은 관객의 반응을 빼앗는 싸움이다. 경기에 이기더라도 반응이 개판이면 인정을 받지 못해.”

“……옙.”

“크러셔는 인기가 좋은 놈이다. 네가 쉽사리 이길 수는 없을 거야. 그래도 발버둥은 쳐봐야지 않겠나?”

“한 번 해보겠습니다.”

“좋아, 화려하고 멋지게.”

빌은 신의 어깨를 툭 쳤다.

오늘 그는 마스크를 쓸 예정이었다.

바로 그때.

두 사람의 대화가 끝나자 뒤쪽에 있던 크러셔가 가까이 다가왔다.

“어이 신참!”

“…….”

“마스크 하나 쓴다고 뭐가 달라지나? 좋아, 어쨌든 네가 오늘 할 일은 간단해. 링 위에 나가서 나한테 개처럼 두들겨 맞고 패배하는 거지.”

신은 대답할 가치도 느끼지 못했다.

‘오만하군.’

상대를 얕보고 저렇게 도발하는 놈은 전장터에서도 꼭 먼저 사망했다.

이번에도 그러리라.

대화는 그렇게 끝이 났다.

크러셔는 한껏 저 건방진 동양인을 밟아줄 기회라 생각하고는 여유를 부리면서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 사이, 신은 링에 오르기 위해 몸을 풀면서 정신을 집중했다.

그리고 쇼가 시작되었다.

[Welcome To G~C~W~!]

[Waaaaaaaaaaggghhhh!]

링 아나운서의 외침과 함께 경기장에 모여 있던 관객들이 박수를 보냈다.

153명의 관객.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모여든 이들은 즐거운 마음으로 공연을 기다렸고 얼마 후 음악이 울려 퍼졌다.

싸구려 커튼에 조악한 음악.

저작권조차 신경 쓰지 않고서 영국의 메탈 밴드, ‘킹’의 노래가 나왔다.

그 부분은 방송에는 교묘하게 편집되었다. 애초에 딱히 전문성을 바라기 힘든 인디 단체의 쇼였으니까.

모든 부분이 그랬다.

링 위의 심판은 퍼시였고 링 아래에서 해설을 하는 것은 빌이었다.

“아~ 썬더 로니의 공격!”

첫 경기는 무난했다.

두 명의 남자가 주먹을 주고받다 가벼운 기술이 오갔고 그대로 쓰리 카운트로 경기를 끝냈다.

[Waaaaaaaaaaaaggghhh!!]

관객들도 환호를 보냈다.

그리고 이어지는 두 번째 경기.

“갱 크러셔와 신의 시합입니다!”

광고가 나가는 동안 링 위의 아나운서가 다음 경기를 소개했고 여성 팬들이 비명을 내지르면서 좋아했다.

갱 크러셔.

갓 스무 살, 항만 노동자 같은 지저분한 차림의 청년이 갱스터 영화의 테마를 틀고 링 위로 올라왔다.

잘생긴 얼굴과 셔츠, 멜빵 바지.

여성 팬들의 마음을 이끄는 모습은 확실히 빅 리그로 가겠다는 그 자신의 야망과 걸맞을 정도였다.

그리고 이어지는 신의 음악.

급조된 시합과 캐릭터였으므로 아무런 음악도 나오지 않았고, 팬들은 놀란 눈으로 신을 바라보았다.

상반신을 드러낸 검은 팬츠 차림.

얼굴에 검은 마스크를 뒤집어 쓴 그는 자세히 보면 동양인이라는 사실을 알아볼 정도였지만, 다들 몰랐다.

거대한 체격.

편견은 쉽사리 깨지지 않는 법.

사람들은 갱 크러셔의 두 배 가까운 덩치를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렇게 링에 오른 신.

그리고 크러셔.

방송이 다시 시작되었고 힘차게 링 벨이 울리며 경기가 시작되었다.

“좋아, 간다!”

자신만만하게 달려드는 크러셔.

허리를 낮춘 채 다가오는 그 자세에는 빈틈투성이였고, 신은 머릿속에서 빌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최대한 화려하게.

팬들의 관심을 끌 수 있도록.

따라서 나온 동작은, 간단했다.

터엉-!

돌진해온 크러셔가 신의 다리를 양손으로 붙잡고 넘어뜨리려고 들었다.

하지만 신은 넘어가지 않았다.

“엇……?!”

순간 그가 당황한 사이.

신은 크러셔의 허리를 붙잡고 상대방이 버티거나 말거나 번쩍 들었다.

거꾸로 들어올린 상태에서.

그대로 주저앉았다.

투콰앙-!!

파일 드라이버.

[……………………………….]

경기장 전체가 침묵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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