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레슬링의 신-615화 (615/634)

Dark Match 101.

최악의 분위기였다.

마스크를 벗은 신이 자신들의 생각하던 백인이 아님을 안 관객들은, 어처구니없게도 태도가 금방 변했다.

철저한 침묵.

그리고 경멸.

팬들은 배신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신은 지금껏 단 한 번도 링 위에서 자신이 백인이라고 말한 적이 없었다.

사람들이 멋대로 생각했을 뿐.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

길고 긴 침묵 속.

땡땡땡-!

링 벨이 울리면서 신을 상대하게 된 WWF의 매드 탈론이 앞으로 나섰다.

기믹 상, 경기복에 매의 깃털을 꽂고 페이스 페인팅까지 한 그는 엄연히 락커룸에서 실전 강자 중 하나였다.

이전에 술집에서 바운서로 일했으며 범죄 경력으로 체포되기까지 했었다.

그리고 그는 지금.

‘이건 기회야.’

마스크를 벗은 신의 모습을 보고 자신이 겟-오버할 기회임을 느꼈다.

팬들이 느끼는 배신감.

믿었던 선수가 동양인이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느끼는 분노.

그런 상황에서 자신이 신을 쓰러뜨린다면 모두가 열광하리라.

‘좋아.’

길게 심호흡을 한 탈론은 곧바로 신에게 달려들며 펀치를 날렸다.

오랜 바운서 생활로 다져진 펀치는, 사실 그다지 기술이 있지는 않았지만.

매드 탈론은 터프한 사내였고 서로 주먹을 주고받으면서 상대를 점점 무너뜨려가는 스타일의 소유자였다.

단단한 주먹이 신의 턱에 꽂혔다.

쩌억-!!

고요한 가운데.

매드 탈론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 자식, 목이 왜 이렇게 굵어?’

자신의 펀치가 통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은 탈론은 곧바로 주먹을 거두며 뒤로 물러서려고 했다.

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신이 사라졌다.

“어?”

그리고 다리를 붙잡혔다.

테이크다운.

콰앙-!

중심을 잡을 새도 없이 쓰러진 탈론은 이어 신이 자신의 목에 팔을 휘감자 지면에 바싹 붙어 버티려고 했다.

하지만.

“……?!”

신은 그대로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고 앉아 있는 탈론을 뽑아들었다.

데드리프트 수플렉스.

[Uooooooohhh……?!]

무반응으로 일관하던 팬들도 순간적으로 놀라 소리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시합이 지극히 실전에 가깝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관계자들은 더더욱 경악을 금치 못했다.

탈론 역시도 힘을 주어 버텼으나.

신은 그걸 모조리 무시하고 저항하는 상대를 자신의 힘으로 뽑아들었다.

투콰앙-!!

나가떨어지는 탈론.

바트 맥센은 자신이 잘못 생각했음을 깨닫고는 입술을 질근 깨물었다.

안 된다.

WWF에 소속된 선수의 이미지가 이 이상으로 나빠지게 할 수는 없었다.

‘제기랄.’

매드 탈론이 쪽도 쓰지 못하고 박살 나는 가운데, 바트는 생각했다.

각본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 * *

대회는 침묵 속에서 마무리되었다.

팬들은 충격에 빠진 채 돌아갔다.

자신들이 알고 있던 영웅이 사실 그 누구보다 자신들이 무시하며 지낸 동양인이라는 사실로 크게 놀랐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 빌은 예상보다 팬들의 반응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일을 끝마치고 돌아가려는 신을 붙잡고 잠깐 이야기했다.

“오늘 아주 미친 짓을 했군.”

“오히려 마스크를 쓰고 있던 게 더 미친 짓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건 그래. 우리 모두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고 했던 셈이지. 자네가 그걸 원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예, 처음에는 긴가민가했지만 이제는 확실히 말할 수 있습니다. 저는 딱히 제가 동양인이라는 사실이 부끄럽거나 숨기고 싶지도 않다는 걸요.”

“뭔가, 사람이 변했군.”

“예?”

“아니, 내가 자네를 이해한 거겠지.”

“…….”

“조용하지만, 스스로를 굽힐 마음은 없는. 그게 바로 자네였군. 그래.”

“그럼요.”

신은 쓰게 웃었다.

“더 이상 당신 안에 있는 동양인은 아닙니다.”

“그래, 그래.”

빌도 미소를 지었다.

신은 더 이상 자신의 안에서 생각하던 막연한 동양인이 아니었다.

바로 그게 중요했다.

사실.

1970년대의 팬들이 프로레슬링에서조차 인종차별에 대한 의식을 지녔느냐고 하면 그건 절대로 아니었다.

때때로 일본인 레슬러들이 찾아와서 교류전을 펼칠 때마다 그들은 신기해하며 아낌없는 응원을 보내주었다.

이후로 몇 년 지나지 않아, 동양인의 특징이 진하게 드러나는 혼혈, ‘릭 스팀보트’가 데뷔했다.

그는 업계에 전설적인 족적을 남긴 레슬러였으며 ‘더 드래곤’이라는 별명으로 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사이 차별에 대한 의식이 더 나아지거나 한 건 절대로 아니었다.

하지만 팬들은 프로레슬링은 프로레슬링으로 봤고 거기에 인종차별이 들어갈 이유는 전혀 없었다.

물론.

태생부터가 미국인인 스팀보트를 동양에서 온 무술고수 같은 느낌으로 부킹한 것은 사실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팬들은 그를 사랑했다.

그렇기 때문에 상황을 이렇게 몰아넣은 것은 전적으로 오너들의 책임이 크다고 할 수 있었다.

퍼시 앤 빌.

그리고 바트 맥센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지레짐작으로 신은 안 될 것이고, 안 되리라고 판단했기에 가면을 씌워 이런 일까지 벌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시대의 흐름을 읽고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가진 의식을 바꿀 수 있는 자들은 지극히 소수에 불과했다.

바트 맥센과 퍼시 앤 빌은 그저 일개 사업가에 불과했고.

SHIN은 이방인이었다.

그리고.

그 외의 사람들도 그랬다.

대회가 끝나고 며칠 뒤.

GCW의 방송을 맡고 있는 LA 지역 방송국으로부터 일방적으로 방송 계약 해지 통보가 날아들었다.

계약을 어겼다는 이유였다.

“미풍양속을 해치는 부분에 대해 우리가 방송을 진행할 수가 없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통보서를 받아든 빌은 어이가 없어지는 것을 느끼며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지역 방송국에서 단순히 동양인이 나왔다고 해서 방송을 금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교묘하게 이야기를 짜냈다.

‘쇼에서 백인으로 그려진 남자가 갑자기 동양인이라고 밝혀졌을 때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을지 모르겠다.’

바로 그런 이유였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소식을 들은 바트도 격분했다.

“아니, 이게 말이나 되나?!”

“다음 대회는 어떻게 하죠?”

“어쩌긴 뭘 어째! 그 빌어먹을 동양인 놈을 빼놓고 진행하는 수밖…….”

바트는 순간 말을 멈췄다.

그리고 깊은 고민에 빠졌다.

만약에 신을 빼놓고 대회를 진행한다면, 녀석이 이기게 되는 셈이었다.

경기에서 지지도 않고.

그렇다고 갑자기 동양인임이 밝혀져서 쪽을 당하고 야유를 받지도 않고.

자기 의지대로 마스크를 벗고 마지막 경기도 승리하면서 끝이 난다?

‘그렇게 둘 수는 없지.’

바트는 이를 빠득 갈았다.

“보스?”

그러자 되묻는 롭슨.

“그대로 진행해.”

“방송국은요?”

“무시해. 어차피 GCW는 사라질 단체고. 정 돈이 안 된다 싶으면 비디오 판매 수익으로 메꾸면 그만이니까.”

“…….”

“그렇게까지 놈이 싫으신 겁니까?”

옆에 앉아있던 기간트가 말했다.

어쩐지 한심하다는 듯한 표정이었지만 바트 맥센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야 물론이지!”

“왜요?”

“날 속였으니까!”

말이 안 통하는 사람이었다.

바트 맥센은 그저 신을 어떻게든 자신 앞에 굴복시킬 생각뿐이었다.

그래야만 자신이 상대보다도 더 나은 남자라는 사실이 증명되니까.

참 비뚤어진 마초 의식이라고밖에 볼 수 없는 성격이었다.

하지만 기간트의 생각은 달랐다.

‘그 자식.’

그는 신이 자신의 ‘약점’을 남들 앞에서 드러낸 것을 보고 솔직히 말해서 꽤 멋지다고 생각하는 쪽이었다.

그래서.

솔직히 말하자면 꽤 기대가 됐다.

‘깡다구가 있어 보인단 말이지.’

과연 어떻게 될까.

안드레 더 기간트 VS 신.

신 VS 안드레 더 기간트.

대회까지 2주가 남았다.

* * *

대회로부터 일주일 뒤, 이른 새벽.

아직 해가 뜨지도 않았고 하늘이 새파란 가운데, 신은 코리아타운 입구의 골목에 멍하니 서있었다.

벽에 붙어있는 포스터.

얼마 전 비가 와서 떨어지기 직전으로 너덜거리는 포스터에는, 안드레 더 기간트가 그려져 있는 상태였다.

팔짱을 끼고 있는 백인 남성.

그 옆에는 조그맣게 VS SHIN이라는 글자가 보였다. 아예 사진은 넣어주지도 않아 신은 그만 피식 웃었다.

‘결국 이런 거군.’

확실히 느껴졌다.

자신이 어떤 취급을 받고 있는지, 그리고 프로레슬링 업계가 대충 어떤 곳인지가 이제는 알 것 같았다.

이곳에서 얼마나 실력이 있는지 같은 건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그 남자의 마음에 드느냐였다.

바트 맥센.

그리고 대중은 거기에 열광했다.

자신의 자리는 없었다.

이유가 어쨌든.

자신은 동양인임을 숨기고 프로레슬러로 일해 왔고, 거기에 팬들이 배신감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할 수 있는 건 많지 않았다.

자신은 미국에 이민 온 지 이제 반년도 채 되지 않는 동양인이었다.

힘은 없었고.

숫자도 적었다.

코리아 타운의 동양인들도 딱히 프로레슬링에 관심을 가지지는 않아 자신을 응원하러 올 리가 없었다.

그야말로, 적지 그 자체.

하지만.

사선이야 얼마든지 넘어왔다.

신은 특히나 가장 고독하고 아픈 상황에서도 언제나 방법을 찾아냈다.

이번에도 그럴 터였다.

방법은 보였다.

지금 자신에게 주어진 시련을 이겨내지는 못하더라도, 확실하게 한 방을 먹일 수 있을 만한 방법이.

그때를 기다리며.

신은 조용히 자신을 단련했다.

* * *

그렇게 결전의 날이 찾아왔다.

GCW와 WWF의 교류전이 계속해서 그래왔던 것처럼 이번에도 이천여 명 규모의 경기장이 전석 매진되었다.

다들 신의 정체가 밝혀진 것이 문제가 되지는 않을까 걱정을 했지만 다행히도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관객들의 속까지는 알 수 없었다. 그들 모두가 신에 대한 배신감으로 쓰레기를 던지기 위해 티켓을 구입한 걸 수도 있었으니 말이다.

혹은 안드레 더 기간트라는 거인이 신을 박살 내는 그림을 원해서 티켓을 구매했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았다.

어쨌든.

긍정적인 지표는 절대로 아니었지만 신 본인은 그런 와중에도 침착했다.

메인이벤트.

안드레 더 기간트 VS 신.

그 경기가 시작될 때까지 락커룸에 앉아 가만히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대회는 좋은 반응 속에 이어졌다.

하지만 관계자들은 모두 이 대회가 메인이벤트를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선역들에게 환호를 보내고 악역에게 야유를 보내는 관객들이었지만.

모두 마음은 딴 곳에 가있었다.

메인이벤트 경기.

그렇게 시간이 지난 끝에 드디어 오늘 모두가 기대하고 경기장을 찾은 메인이벤트 경기가 시작되었다.

빠밤-빰-!

신의 테마 음악이 먼저 나왔다.

그가 요청했던 로키의 메인 테마곡.

이번에도 똑같았다.

신은 자신의 짧은 커리어 최초로 마스크를 벗은 채 링으로 입장했다.

관객들의 반응은 ‘없었다’.

다들 복잡한 얼굴이었다.

아무리 신이 동양인이었다는 사실에 실망하기는 했어도, 그들이 그전까지 신에게 환호를 보냈다는 사실은 지워지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다들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는 것이었다.

링 위로 올라가는 신.

짧게 심호흡을 한 그는 가볍게 몸을 풀며 기간트가 나오는 것을 기다렸다.

오늘 경기는 방송에 나가지 않았기 때문에 딱히 해설이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바트 맥센은 빌과 함께 해설자석에서 계속 코멘트를 이어갔다.

“모두 저 선수가 동양인일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는데요! 놀랍군요!”

“애초에 딱히 백인이라고 말한 적도 없지만 말이죠.”

퍼시가 초를 치기는 했지만.

혹시라도 나중에 이 비디오를 판매하기 위해서는 해설로 스토리를 삽입하는 게 여러모로 이득일 터였다.

WWF에서 급하게 가져온 카메라가 링 위에 묵묵히 서있는 신을 비췄다.

그런 가운데.

불길하고 웅장한 괴물의 음악과 함께 링으로 나온 기간트가 신과 얼굴을 마주 보고 섰다.

30센티미터를 넘는 키 차이.

체중도 기간트가 100킬로그램 이상 무거웠다. 도저히 체급 싸움으로는 맞붙을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기간트도 다소 가벼운 마음으로 다음과 같이 농담을 던졌다.

“날 들 수나 있겠나?”

그 말에.

신은 고개를 끄덕이는 대신 링 아래에서 신이 나 해설을 이어가고 있는 바트 맥센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놈 얼굴에 처박아주지.”

호기로운 대답.

두 사람이 뒤로 물러섰고.

땡땡땡-!

이내 링 벨이 울려 퍼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