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ther’s Day 11.
그 어떤 여자도 날 길들일 수 없다.
그렇게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았으며 그러면서 내 존재를 증명해왔다.
땀내 나는 놈들 사이에서 맥주를 마시고, 존경받는 남자에게 인정받으며 레슬러로서 내 삶을 구가해왔다.
아메리칸 마초.
그게 나였다.
거기에 나는 동양인이었기 때문에 그들보다는 다소 지능이 높았다.
……인종차별을 하는 게 아니라 동양인으로서의 Nerd적 습성을 자조한 것이니 아무 문제가 없는 발언이었다.
아니, 뭐.
어쨌거나.
나는 그렇게 살아왔다.
동양계 미국인의 편견 그대로의 사람이 아니라, 당당히 이 멍청한 사회가 원하는 대로의 인간이 되었다.
남성적인 활동에 집착하고.
근육을 키우고 힘을 숭상하고.
다들 그랬다.
그게 미국이라는 사회가 바라는 남성성이었다.
지역마다 차이가 있기는 했지만 우리는 그런 게 옳다고 배우며 자랐다.
하지만 개중에서도.
나는 나였다.
사랑을 만났고, 사랑이 생겼다.
두 개의 사랑.
그 둘에게 가장 큰 사랑을 보여주라는 믹 졸리의 말은…… 솔직히 말해서 Bull-Sh-t처럼 느껴졌다.
아니, 뭔지는 알겠는데.
‘너무 심했잖아요. 믹.’
그때의 경기 영상을 다시 찾아본 나는 커리어 내내 최초이자 최후로 장의사 캐릭터가 깨진 테이커를 보았다.
믹 졸리는 헬 인 어 셀의 꼭대기에서 철조망이 붕괴해 링으로 추락했다.
범프 링에 구멍이 움푹 파였고, 그때 그 사고에서 믹 졸리는 입술 아래가 찢어져 구멍이 뻥 뚫렸다.
그리고 수염에 자기 이빨이 붙은 상태에서 웃으며 일어나 경기를 했다.
내가 주니어였으면 울었을 거다.
그리고 평생 프로레슬링이라고는 쳐다도 안 봤겠지.
신기하게도 믹의 딸인 노엘은 프로레슬링 팟캐스트를 운영하는 골수 덕후로 자라났지만 말이다.
‘이상한 가족이야.’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래도 대충 마음이 잡혔다.
경기장에 도착해서 만난 맥과 잭에게도 이 이야기를 전해주자 곧장 웃음을 터뜨리며 그 말에 동의했다.
“거참. 어려운 일인데.”
“그래도 믹은 했다는 거 아니야. 테이커하고 경기 끝나고 곧바로 애 학예회에 참석하고 그랬다고 하니까.”
“마벨 코믹스에 나오는 슈퍼 히어로도 못하는 짓 아니냐? 젠장, 멋진 아빠 되기 한번 더럽게 어렵네.”
“멋진 남편도.”
“가정 붕괴의 위기를 겪고 있는 가장들을 위해 건배를 하고 싶지만.”
“……무슨 소리야?”
맥이 나를 돌아보았다.
“뭐?”
“거기에 너도 포함되는 건 아니지. 신. 너는 아내가 프로레슬링과 가장 가깝게 지내는 사람이잖아.”
“아니, 그거랑 링에 오르는 남편 걱정을 하는 건 다른 문제인데.”
“거기다 금수저고.”
“맞네!”
“…….”
이게 이렇게 된다고?
* * *
프로레슬링의 대립은 보통 저번 대립에서 리드를 잡은 쪽부터 먼저 링에 나와 이야기를 진행하기 마련이었다.
그렇기에 8월 3주차.
먼저 마이크워크를 진행하는 것은 지난주 입장로 구조물 위에서의 스완턴 밤으로 기세를 잡은 잭 하디였다.
그가 테마곡 속에 링으로 오르자 팬들의 어마어마한 환호가 쏟아졌다.
선수가 더 격한 범프를 구사할수록 팬들의 존중은 커지기 마련이었다.
잭 하디의 스완턴 밤은 뉴튜브의 실시간 인기 동영상 1위에 랭크될 정도로 많은 화제성을 불러 일으켰다.
[Jack! Jack! Jack! Jack! Jack! Jack! Jack! Jack! Jack! Jack! Jack!]
수많은 이들이 기억할 ‘순간’을 만들어낸 잭에게 환호가 쏟아졌고 그는 마이크를 손에 쥐고 입을 열었다.
[결국 이게 프로레슬링이군.]
[Yeeeeeeeeeeeeeeeeeeaaahhh!]
[체어샷에 경기를 방해받으니까 참고 넘어갈 수 없겠더라고. 내 가족의 안전을 위해, 그리고 내 명예를 위해. 이제는 맞서 싸워야 할 때야.]
잭이 고개를 들었다.
자신과 가족을 위해.
전형적인 선역의 마이크워크.
거기에 가정을 꾸리며 변화한 잭 하디의 성격이 더해지면서 보다 진정성 있는 모습이 되었다.
거기다 그 대립 상대가.
[가족과.]
형이었으니까.
아이러니였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 가족과 싸운다.
씁쓸한 표정의 잭 하디.
그걸 지켜보고 있자니 이내 한 남자의 테마가 경기장 안에 울려 퍼졌다.
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
바로 나였다.
[Waaaaaaaaaaaaaaaaaaggghhh!!]
팬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목이 결리는 걸 느끼고는 뚜둑 꺾은 나는 ACW 월드 챔피언 벨트를 어깨에 짊어진 채 입장로로 나아갔다.
지난주의 그 스완턴 밤.
나는 맥 하디와의 대결에서 승리했지만, 그걸 맞고 뻗어서 쇼의 마지막 부분을 장식하지 못했다.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하지만 지금 말하고 싶은 것은 그게 아니었다.
나는 링으로 올라가 잭 하디와 얼굴을 마주보고 선 채 입을 열었다.
“아이러니하군.”
가족을 지키기 위해 형과 동생이 죽어라고 다툰다. 나는 모두가 생각하고 있을 그 사실을 입 밖으로 내었다.
[Uoooooooooooooohhh……!]
팬들이 동요햇다.
“안 그래? 잭. 너희 하디 보이즈는 환상적인 경력을 쌓아왔지. 그런데 너에게 스포트라이트가 집중되면서 형은 점차적으로 망가지기 시작했고.”
“네가 우리 일에 대해서…….”
“왈가왈부하지 말라고? 글쎄다.”
나는 잭의 말을 끊어냈다.
“너희 두 놈은 복귀 장소를 잘못 정했어. 챔피언 앞에서 자기들이 뭐라도 되는 양 떠들어댔단 말이지.”
그렇다면 응당 그에 대한 대가를 치루는 게 마땅한 일 아니겠는가.
“너는 아무것도 몰라. 신.”
잭이 위협적으로 내게 다가왔다.
“나는 나 자신을 끝없이 증명한 결과로 이 위치까지 올라왔어. 그런데도 형은 항상 내 탓만 하더군. 그게 얼마나 열 받고 역겨운 일인지 알아?”
“워워,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나는 어이가 없어 되물었다.
“네 형은 네가 친 그 온갖 사고를 모조리 다 수습해줬다고! 그런데도 동생은 항상 앞길을 가로막고 스포트라이트를 독점했지! 나라도 미쳤을 거야!”
나는 어이가 없어 이야기했다.
물론 이건 잭 하디 스스로도 인정하는 부분이었다. 맥이 자신을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해주었는지.
하지만.
“내가 그걸 모른다고 생각해? 하지만 그런 선의가 형의 열등감을 받아줘야 한다는 말은 아니잖아!”
잭이 버럭 소리쳤다.
“지긋지긋하다고!”
“그럼에도, 넌 여기에 서있지.”
그 한마디로 분위기가 변했다.
[Uooooooooooooooohhh……!]
관객들이 술렁거렸다.
잭 하디는 숨을 몰아쉬었고 나는 그 앞에서 싱긋 웃으며 링을 가리켰다.
“나라고 모를 것 같아, 잭? 네가 지금 어떤 마음을 품고 내게 그 스완턴 밤을 날렸는지? 오, 잘 알고 있지.”
프로레슬러로 살았다.
가족이 생긴 뒤에는 이게 그들을 먹여 살릴 수단이 되었다. 잭 하디는 이제 가장의 짐을 지고 링에 올랐다.
그래서 생긴 책임감.
삶에 대한 헌신.
황폐했던 마음의 회복.
그렇기에 찾아오는 공포.
하지만 일단, 여기에서 그것에 대해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것은 우리가 남자로서 짊어져야 할 짐이니까.
그 대신.
“스완턴 밤을 날릴 때 관객들의 반응. 그게 뉴튜브 실시간 인기 동영상 1위를 차지했다는 달성감까지.”
인정해라. 잭.
우리는 프로레슬러다.
최고의 선수고.
최고의 아버지고.
최고의 남편이 될.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챈트가 쏟아졌다.
두 팔을 양옆으로 쫙 펼친 나는 잭의 대답을 기다리며 씨익 웃었다.
그러자니 놈도 웃었고.
“그래, 챔피언.”
내게 다가왔다.
“많은 시간이 흐르고, 내가 변해도 항상 잊지 못하는 사실이 있지. 난 언제나 어디에서나 내가 원하는 대로 스완턴 밤을 날려 왔다는 거야.”
[Yeeeeeeeeeeeeeeaaahhh!!]
“그리고 방금 확실히 깨달았어. 망가진 형의 정신을 되돌리면서, 네 어깨에 있는 챔피언 벨트까지 빼앗아올 수 있는 방법을.”
그렇게 경기가 성사되었다.
* * *
8월 3주차 나이트로의 메인이벤트.
신 VS 잭 하디.
스타게이트의 메인이벤트를 차지하더라도 전혀 위화감이 없는 매치 업이 위클리 쇼에서 벌어졌다.
하지만 거기에 하나가 더해졌다.
땡땡땡!
[Waaaaaaaaaaaaaaaaaaggghhh!]
링 벨이 울리고, 팬들의 엄청난 환호 속에 대치해 선 잭과 나.
바로 그 순간 경기장의 조명이 꺼지면서 피아노곡 하나가 연주되었다.
[Uoooooooooooooohhh……!]
바로 맥 하디였다.
지난주 잭의 난입에 대한 변주.
입장로 위로 모습을 드러낸 맥은 크게 웃더니 이내 아나운서 석으로 향해 멋대로 헤드폰을 끼고 앉았다.
나와 잭은 황당해 그 얼굴을 바라보았고 맥은 손짓으로 우리에게 경기를 시작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광기에 물든 형의 해설.
그의 장점을 가장 잘 드러내는 난입이었다.
나와 잭은 잠깐 어안이 벙벙해져 서있다 이내 움직였다.
[DELETE! DELETE! DELETE!]
우리 두 사람 다 느꼈다.
링 아래의 맥 하디도 계속해서 신경 써야 하는 경기가 되었다.
하지만 일단은 눈앞의 상대가 더 중요했으므로 잭과 나는 락 업으로 맞붙으며 경기를 시작했다.
끝없는 관리와 트레이닝으로 현대 프로레슬러 중에서 내 체격 조건은 상당히 좋은 편에 속했다.
188Cm의 키. 105~110kg 정도의 몸무게에 체지방률도 10% 대를 유지했다.
그렇기에 누구와 붙더라도 웬만하면 우위를 가져간 상태에서 시작했다.
탑 독 운영.
잭을 코너까지 몰아붙인 나는 심판이 말리는 틈을 타 살짝 빠졌다가 그대로 헤드벗을 날렸다.
쩌억!
코를 움켜쥐며 옆으로 피하는 잭.
그걸 따라가서 어퍼컷을 날리고 코너 운영을 하면서 경기를 이어나갔다.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Jack! Jack! Jack! Jack! Jack! Jack! Jack! Jack! Jack! Jack! Jack!]
챈트는 아주 잘 나왔다.
하지만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양쪽 모두가 환호를 받는다고 했을 때 반응은 약자 쪽으로 기운다는 점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중요한 순간에 잭의 반격을 허용하면서 지금의 이 반응을 보다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코너에 너덜너덜한 빨랫감처럼 매달려 있는 잭. 그 팔을 잡아당겨 반대편의 코너로 힘껏 내던졌다.
그리고 따라가는 와중.
달려간 잭이 로프를 밟고 뛰어올라 그대로 회전하며 내게 떨어졌다.
위스퍼 인 더 윈드.
[Waaaaaaaaaaaaaaaaggghhh?!]
놀라며 환호하는 관객들.
코크스크류로 떨어지는 잭을 받아내며 함께 쓰러진 나는 어깨를 시큰하게 달구는 충격이 옅어지는 걸 느꼈다.
“잭.”
살짝 말을 걸었다.
“이제 두렵지 않은 거냐?”
“그럴 리가.”
잭이 고개를 내저었다.
어렸을 적부터 한량과도 같은 모습으로 살았던 잭 하디는 아버지가 되고 나서 자신의 많은 모습을 바꿨다.
하지만 그 여파로 자신의 원래 모습을 잃고 말았다.
나 역시 그럴 수 있다는 두려움으로 찾아간 선배.
그는 우리에게 조언해줬다.
‘무엇이든지 최고로.’
Maximum Effort.
잭이 자리에서 일어섰고, 그런 식으로 리드를 가져가려 하면서 경기는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하지만 내가 누구인가.
챔피언.
Alpha.
Man On Fire.
수없이 많은 멋진 수식어로 대표되는 존재인 만큼, 한 번의 공격으로 당장 주도권을 내어주지는 않았다.
언더 독과 탑 독의 싸움.
경기는 치열하게 이어졌고, 나는 잭의 화려하고도 위험한 공격을 최대한 위험하지 않게 받아주었다.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Jack! Jack! Jack! Jack! Jack! Jack! Jack! Jack! Jack! Jack! Jack!]
챈트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팬들이 우리 둘 모두를 응원하는 가운데, 탑 턴 버클에 오른 나는 순간적으로 잭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두려워.’
딸을 다시는 보지 못할까 봐.
한 번의 실수로도 죽을 수 있는 것이 프로레슬링이었다. 그렇기에 난 잭의 이야기에 너무나도 공감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믹 졸리가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사람들이 기억하는 건 순간이야.’
우리는 순간을 만드는 자들.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죽지 않는다.
절대로.
왜냐면 나와.
우리가 있으니까.
링 밖을 돌아보자 한창 신이 나 떠들고 있는 맥 하디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내 앞에는 잭 하디가 쓰러진 채로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계속되는 경기로 인해 많이 지쳤으나, 간간히 비추는 그 눈빛은 너무나도 또렷했다.
내 기술을 받아주기 위해.
그걸 믿고.
나는 몸을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