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01. 인생 역전했는데요, 짜잔 사라졌습니다!
내 도X코인이 대박이 터졌다.
떡상해 버렸다. 진짜 그야말로 말 그대로 초대박이었다.
내 수중에 백억에 가까운, 수십억의 돈이 생겼으니까.
‘와, 나. 이게 공이 몇 개야……?’
정말 놀랍게도 한순간에 억 소리 나는 부자가 돼 버렸다.
아주 옛날에 대학교 선배의 꼬드김에 넘어가 사 놓고 까먹었던 코인이…… 이렇게 될 줄이야.
지난 세월이 떠올랐다.
1년 전 부모님과 오빠가 나를 빼고 간 여행에서 사고로 모두 죽은 뒤로 혼자가 되었다.
부모님은 생전에 집안과 절연했기 때문인지 덕분에 장례에 오는 친척들은 없었다.
부모님께 죄송하지만 사는 게 힘들어 물려주신 얼마 안 되는 재산을 주식에 넣었다.
한 번 사는 인생, 내 집 마련도 못할 것 같으니 로또보다는 이게 나을 것 같았다.
그리고 모조리 잃고 나서야 주식 따위는 나와 맞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다 일명 ‘좆소’라 불리는 회사가 너무 힘들어 관둬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 주변에서 최근 하도 코인, 코인 하길래 예전에 나도 사 놨던 도X코인이 떠올랐다.
“쯧쯔, 이래서 지방대는 뽑는 게 아닌데.”
상사는 입만 열면 사람을 후려치기 바빴고 나는 그 밑에서 회사 탈출만을 꿈꿨다.
더 좋은 회사로 이직할 가능성이 흐릿하기만 한 이 세상에서 믿을 건 일확천금밖에 없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하게 성공해 버렸지, 그것도 초대박으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 어머니 잘 지내시나요? 엄마 아빠 딸 인생 역전했어요.
‘김 과장 개자식! 잘 있어라! 하하하하!’
안녕히 계세요, 여러분!
전 이 세상의 모든 굴레와 속박을 벗어던지고 제 행복을 찾아 떠납니다.
나는 그날로 사직서로 김 과장의 뺨을 후려치지……는 못 했고.
회사를 그만뒀다.
‘일단 해외여행부터 즐긴다!’
일단 모은 돈으로 너무나 가고 싶었던 섬으로 향하는 퍼스트 클래스를 예약했다.
그것까지는 좋았다. 참 좋았는데 말이지…….
비행기 사고가 났다.
로또 확률보다도 낮다는 비행기 추락 사고가!
그리고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다.
‘젠장, 이게 무슨 날벼락이야?! 아이고, 다시 생각해도 억울하다, 엉엉엉, 내 코인! 내 돈!’
정말이지, 그 몇십억을 제대로 써 보지도 못한 채 뒈진 것이다.
차라리 라스베이거스에서 펑펑 쓰다 죽었으면 모를까.
퍼스트 클래스에서! 아직 기내식도 못 먹었는데!
‘이대로 못 죽어 못 죽는다고!!’
흐엉엉엉.
이럴 줄 알았으면 덜 구질구질하게 살아 볼걸!
내 돈! 내 해외여행! 엉엉엉!
김과장 그 새끼 뺨은 한번 때려 볼걸!
* * *
엉엉 울다가 긴 잠에서 깨어나듯 눈을 떴을 때, 낯선 천장이 보였다.
뭐야, 죽어서도 꿈을 꾸나?
“이, 이, 일어나셨습니까! 샤를리즈 공녀님!”
내가 눈을 뜨고 몸을 일으키자, 소스라치게 놀란 사람이 보였다.
곧바로 홱 뛰어가 버리는 바람에 얼굴은 보지 못했다.
‘여긴 어디지? 가구들이 왜 이래?’
멍하니 풍경을 보다 그대로 섰다.
마침 근처에 거울이 있어 내 모습을 비춰 보았다.
거울을 보자마자 나는 입을 살짝 벌렸다.
“와, 미쳤네.”
몹시도 예쁜 여자가 거울 안에서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살짝 윤기를 잃었지만 치렁치렁한 분홍색 머리카락, 도도하게 치켜 뜬 붉은색 눈동자.
가늘지만 우아하게 뻗은 맵시 있는 몸매까지.
잠을 못 잔 것 같이 조금 퀭하고 창백한 안색이 안쓰럽긴 했지만 흠이 되지 않을 정도로 예뻤다.
오묘한 눈꼬리를 보고 있자니, 이 사람이 유혹하면 ‘언니! 사랑해요!’ 하고 미친 듯이 팬질을 할 것 같았다.
한참이나 거울을 즐겁게 바라보다가 멈칫했다.
‘잠깐, 아까 나간 사람이 분명 ‘샤를리즈’라고 했지 않나? 익숙한 이름인데…….’
왜 익숙하지? 생각하는 도중에 방을 보고 흠칫했다.
“술병?”
세상에 이게 다 뭐야…….
방 안이 온통 엉망이었다.
어질러진 술병 하며, 술이 쏟아진 듯 잔뜩 적셔진 침대와 장식 천까지.
저기 정리된 병들을 봐서는 조금 전에 나간 사람이 정리하고 있던 게 아닌가 싶었다.
발을 옮기다 말고 발끝에 뭔가 채였다.
두루마리? 웬 서양 영화에서 볼법한 둘둘 말린 양피지였다.
신기하게도 이게 부웅 떠오르더니, 저절로 펴지는 것이 아닌가.
“뭐, 뭐야.”
[신입니다.
미안한데, 내 세계의 오류를 바로잡기 위해 불렀수다.
제한 시간 1년 동안 악녀로서 ‘아스킨 레무트’와 약혼을 유지하시오.
단, 절대 가짜 영혼임을 들키지 말 것.
성공 시, 당신의 도X코인을 돌려드립니다.]
“……보이스 피싱?”
나도 모르게 나온 감상은 이거였다.
아니, 말도 안 되는 소리인 거 아는데 이것밖에 할 말이 없었다.
‘잠깐만 지금 이 외모에, 악녀, 거기다 샤를리즈면…….’
키워드가 조합되는 동시에 뇌리에 번개처럼 스치는 것이 있었다.
이내 이것들 전부 어디에서 봤는지를 기억해냈다.
이 모든 건 전부 내가 읽었던 19금 피폐 소설 『폭군의 황후로 살아남기』 속에서 나왔던 악녀에 대한 묘사였다!
샤를리즈는 여주인공이 등장하기 전까지 남자 주인공과 외할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패악을 부려 온 악녀로, 여주인공이 이 악녀가 만든 피해자들을 하나씩 보듬어 주면서 남자들을 집착남으로 만들어 서로 싸우게 만드는 내용이었다.
악녀를 한 줄로 표현하자면 그야말로 ‘개망나니’였다.
술을 좋아했을 뿐만 아니라 끔찍할 정도로 미남을 밝혀 이 소설에 나오는 미남은 한 번씩 건드려 본다거나…….
권력을 이용해 폭력을 사주하거나.
술에 취해 직접 두드려 패는 등. 그녀의 악행을 열거하면 끝도 없었다.
머리가 조금 지끈거렸다.
‘뭐야, 양피지 어디 갔어?’
어느 순간 허공에 떠 있던 양피지가 사라져 있다.
아무리 둘러봐도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럼 그 내용이 진짜란 말이야?
‘나 돌아가서 내 돈 만져 볼 수 있어?’
숨이 꼴깍 넘어간다.
물론 과정이 쉽지만은 않을 것 같았다.
‘아스킨 레무트’면 책 속에선 여주를 도와 악녀를 죽이는데 일조한 인물이잖아…….’
악녀의 약혼자, 그러나 악녀에게 가장 호되게 당해 악녀를 증오하는 인물이었다.
근데 딱 1년만 약혼 유지하면 된다고 하잖아?
그럼 돌아가 돈을 돌려받는다고? 너무 좋은데?
혼란을 느끼는 동시에 문이 살그머니 열렸다. 그러고는 두 사람이 황급히 들어왔다.
나이가 지긋한 부인이었다. 그녀는 나를 보기 무섭게 입을 벙긋거렸다.
“샤, 샤를리즈 아가씨…… 공작님께서 찾으십니다.”
“…….”
공작이라면, 샤를리즈의 외할아버지 아닌가?
그 순간 희미하지만 머릿속으로 웬 잘생긴 할아버지 얼굴이 둥실 떠올랐다.
이어서 몇몇 기억이 떠올랐는데, 이 악녀 ‘샤를리즈’의 기억임을 알 수 있었다.
이를 통해 샤를리즈가 평소 할아버지를 어떻게 대하는지도 알 수 있었다.
‘내가 악녀가 아니란 걸 들키면 안 된다고 했지?’
그럼 일단은 얌전히 움직여 볼까.
“그래.”
내가 대충 자리에서 일어나자 옆에 있던 하녀가 쪼르르 달려와 내게 숄을 덮어 주었다.
그런데 이 하녀 언니, 왜인지 내가 쳐다보자 울먹이면서 숄을 다듬기 바빴다.
“모, 모, 모시겠습니다.”
이 19금 소설 『폭군의 황후로 살아남기』 줄여서 『폭황살』은 이름에 괜히 ‘살아남기’가 들어간 게 아니었다.
남자 주인공은 폭군이지만, 폭군을 포함해 여러 미친 서브남들이 등장해서 집착 감금 맛집으로 유명했던 것이다.
‘개중 가장 또라이 같아서 왜 주인공 삼았나 싶은 남주가 폭군 록시디언. 바로 이 악녀 ‘샤를리즈’의 오빠였지?’
샤를리즈는 여주인공의 시누이로서 아주 여러 방면으로 괴롭히는 것은 물론이요, 자신이 눈독 들인 미남이 여주에게만 관심을 보이자 질투를 보였다.
한마디로 여주를 굴리는데 다방면으로 악독하게 굴어 대던 인물이었다는 뜻이다.
“저어, 고, 고, 공녀님?”
생각을 하는 동안 걸음을 멈춘 탓에 어느새 하녀가 나를 보고 있었다.
빤히 쳐다보자, 어떻게 해석한 건지 하녀 언니가 벌벌 떨면서 고개를 조아렸다.
나는 어색하지 않게끔 슬쩍 입을 열었다.
“나 어디 가는 거니?”
“그, 그, 어제 전용 응접실에서 수, 술을 드시며 즈, 즐거운 시간을 보내신 탓에…… 아침에 공작님께서 뵙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내 질문이나 모습이 이상하지 않았던 건지, 조아린 하녀 언니에게서 답이 흘러나왔다.
그러고는 걸으면서 듣기를, 본래 샤를리즈는 커다란 사고를 치고 잠시 여행이란 이름의 추방을 당했던 상태로, 그 기간이 끝나 어제 막 집으로 돌아와 거나한 술판을 벌였다고 한다.
‘아, 어쩐지 방이 술병으로 가득하고 개판이더라.’
얼굴이 퀭했던 건 술 때문이었나…….
지금 함께 걷는 이 부인은 샤를리즈를 어린 시절부터 키운 유모 라르빌 부인이었다.
“공작님…… 공녀님을 모셔왔습니다.”
방에 들어와 맞이하게 된 건 기억 속에 있는 샤를리즈의 외조부, 알츠베이트 공작이었다.
잘생긴 노인이기는 하나, 눈빛이 서늘해서 어쩐지 무섭기 짝이 없었다.
“앉거라.”
라르빌 부인이 머리를 조아렸다. 나는 눈을 굴리며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대체 상황이 어떻게 된 건지 잠깐 두고 보자.’
내가 자리에 앉기 무섭게 라르빌 부인이 밖으로 나가며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허어, 기어이 네 버릇을 못 참고 술판을 벌였더구나.”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공작이 턱을 문질렀다.
공작의 옆에는 단 한 사람만이 서 있었는데, 어째 나를 향한 시선이 곱지만은 않았다.
“돌아와서는 적당히 하라 말한 것이 어제였다.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았거늘…… 쯧, 어째서 이런 못난 행동을 자꾸 보이길 해, 보이길.”
쯧쯧, 혀를 차는 공작의 표정은 서늘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 눈이 처음 보았을 때 보다는 살짝 풀어져 있었다. 해석하자면 좀 철이 없는 손녀를 보는 느낌?
“네가 없는 사이 알아야 할 사실이 하나 생겼다.”
그러나 이도 잠시 더욱 차가워진 얼굴로 돌아왔다.
“네 약혼자, 레무트 공작이 파혼을 요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