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아, 안 돼!”
뭐라고?!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안 돼, 내 코인! 돌아가야 한다고!’
공작은 조금 놀란 눈치기는 했으나 곧 그러려니 하는 차가운 얼굴이었다.
“허어, 그러게 처신을 잘하라고, 내 그토록 말했거늘.”
“아, 안 돼요, 할아버지. 절대 안 돼요!”
공작의 표정으로 정제된 사나움이 스쳤다.
‘감히 가진 것도 없으면서 건방지게 말이지…….’ 하는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난 파혼을 허락할 생각 없다. 너도 괜한 소리 할 생각 말고 네 약혼자 간수 잘 하거라.”
“네, 네!”
공작은 내게 이리 말하고는 고개를 돌려, 옆에 있던 나를 몰래 못마땅하게 보던 사람에게로 말을 걸었다.
“필시 레무트 공작이 자신 있게 파혼을 요구할 만한 배경이 있겠지. 당장 알아와.”
“예, 공작님.”
그러거나 말거나 내 머릿속엔 단 한 가지 사실만 맴돌고 있었다.
딱 1년. 1년만 그 남자와 약혼을 유지하면 된다……!
하지만 상대는 파혼을 강력하게 원하고 있는 상황.
‘일단 그 남자를 반드시 만나 봐야겠어.’
내가 이리 결심하는 사이 공작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못마땅함이 가득한 시선이었다.
“하던 대로 네 멋대로 해도 좋으나 괜히 그놈의 반반한 낯짝에 넘어가 파혼을 수락할 생각은 추호도 마라. 물론 그놈에게 갚을 만한 돈도 없겠지만.”
그 어떤 순간에도 파혼만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의지라니, 이게 웬 떡이냐.
내 눈에는 날개 달린 천사처럼 보였다.
세상에, 내 코인을 돌려주실 천사로 보이시네요.
나는 결연하게 끄덕였다.
“네, 할아버지!”
그러자 아주 잠시 멈칫한 공작이 나를 얼떨떨하게 보았다.
* * *
악녀로서의 생활은 꽤 윤택했다.
당연하다.
샤를리즈는 기본적으로 이 세계 최고의 재벌 상속녀이자 사랑받는 금지옥엽 공녀였다.
더군다나 내가 알기로 남자 주인공인 폭군과의 사이도 좋은 편이었다.
그러니 하고 싶은 건 꼭 해야 직성이 풀리고, 욕심내면 꼭 손에 넣어야 발 뻗고 자는 이기적이며 사치스러운 망나니 악녀가 됐지.
‘수십 억을 못 써 보고 죽었더니 다이아몬드 수저로 눈을 떴어요.’
참 좋은 명제인데…….
이 악녀가 좀 있으면 죽을 시한부가 아니면 말이다.
여주인공이 나타나면 이 악녀는 자기가 쌓은 업보 때문에 반드시 죽는다!
쉽게 말해 이미 너무 많은 원한을 샀다는 소리다.
거기다가 내가 눈을 뜬 시점은 여주인공이 나타나기까지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이다.
‘1년이면…… 어째 이 몸이 쌓은 업보를 피하면서도 그 남자와 약혼을 유지하는 것에도 열심히 노력해야 할 판국인데.’
근데 약혼자라는 인간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은 채로 파혼만 요구하고 있는 상황이고.
이 악녀가 쌓은 업보는 언제 내 앞에 나타날지 모를 상황이고.
이것이 대단한 다이아 수저로 눈을 떠 누리는 며칠 동안 썩 즐길 수 없는 이유였다.
다행스럽게도 며칠이 흐르는 동안 샤를리즈의 기억이 이것저것 떠올랐고, 현재에 이르러선 꽤 많이 떠올라 샤를리즈로서 살아가는 데엔 큰 문제가 없었다.
그저 와, 어쩜 이렇게 업보를 쌓으며 살아왔나 싶어서 놀랍긴 하지만.
나는 손에 쥔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우리 딸, 아들. 남매끼리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 아니면 엄마가 화낼 거예요.”
이건 샤를리즈의 모친, 지금은 죽고 없는 선황후가 샤를리즈에게 남겨 준 목걸이였다.
어째서인지 샤를리즈에게 언제 어디서든 하고 있으라고 신신당부했고, 샤를리즈도 이 말만은 꼭 지켜 눈을 뜬 날에도 목에 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나는 고개를 돌렸다.
“…….”
내 시선이 닿기 무섭게 서 있던 하녀가 딸꾹 기침을 했다.
“죄, 죄송합니다, 공녀님!”
하녀 언니가 털썩 무릎을 꿇었다.
내 손에는 하녀가 건넨 봉투와 편지가 들려 있었다.
“사, 살려만 주십시오, 공녀님!”
나는 이 편지를 이리저리 돌려 보았다.
이 편지로 말할 것 같으면, 아직 얼굴 한 번 못 본 내 약혼자.
파혼을 요구하지만, 절대 들어줄 리 없을 약혼자에게 한 번만 만나주십사 보낸 초대장인데.
그대로 돌아왔다.
심지어 뜯지도 않고서 말이다.
‘이야, 산뜻한 거절이네.’
그리고 이 편지를 가져온 하녀 언니는 달달 떨며 무릎을 꿇고 있었다.
이 언니 잘못도 아니고 질책할 생각이 없지만 무표정을 유지했다.
“……다른 대답은 없었니?”
“무, 문 앞에서 쫓겨났습니다…….”
이야. 게다가 문전 박대까지 했어?
생각보다 심각하게 나를 싫어하는 약혼자님의 상황에 나는 침음을 흘렸다.
이 책을 읽은 독자로서 약혼자, 아스킨 레무트가 ‘샤를리즈’를 싫어하는 이유를 아주 잘 이해했다.
샤를리즈는 아름다운 것을 몹시도 사랑했고, 그녀의 눈에는 자신의 친오빠와 더불어 가장 아름다운 미남이 바로 이 아스킨이었다.
그래서 아스킨의 상황을 악용하여 그에게 큰돈이 필요했을 때 제 외할아버지를 졸라 가문의 힘을 이용해 거대한 돈을 빌려주고 약혼을 요구했다.
거기다 알츠베이트 공작은 한술 더 떠서 거대한 이자를 매겨버렸다.
평생 이자를 갚거나 혹은 이자 대신 자신의 무력을 바치게 하는 노예 계약이었다.
아스킨은 약혼을 받아들이며, 동시에 채무 계약서에 사인을 했고,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다음과 같다.
우선 이 남자는 제국에서 제일 강한 검사이지만 자신의 가문은 멸문 직전이라는 것!
그래서 가문의 위기를 수습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알츠베이트의 청을 받아들여야 했다.
열악한 급여 환경에도 떠나지 않고 휘하에 남은 훌륭한 수하들과 제국 최고로 일컬어지는 자신의 능력 모두를 담보로 삼아 큰 빚을 지고 만 것이다.
이처럼 이 남자의 가문이 파산 직전까지 몰리고 큰돈이 필요했던 이유는 하나뿐인 여동생 때문이었다.
‘하나뿐인 여동생이 불치병에 걸렸으니까.’
게다가 딱히 치료 방법이 없는 상태라 생명을 유지하려면 항시 어마어마한 액수의 치료비가 필요했다.
알츠베이트가와의 약혼을 통해 받은 돈 역시 여동생의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어 고비를 넘기기 위한 치료비로 사용되었다.
“직접 찾아가야 하나…….”
“채, 채비를 할까요?”
번쩍 고개를 들어 올리는 하녀 언니가 조금 안쓰러워 보였다.
그래,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일단 얼굴이라도 한번 봐야지.
자리에서 일어나려 할 때였다.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며 다른 하녀 언니가 사색이 된 얼굴로 들어왔다.
“고, 공녀님! 화, 황제 폐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나는 일어나려다 말고 멈칫했다.
으응? 황제? 그럼 폭군?
황제. 이 책의 남자 주인공이자 샤를리즈에게는 오빠였다.
이상하게도 샤를리즈의 기억이 여럿 떠올랐지만 아쉽게도 폭군인 오빠나 약혼자에 대해서는 아직 흐릿하던 참이었다.
‘이거 어떡한다…….’
나는 턱을 짚고 고민하다 고개를 돌렸다.
“지금 안 만난다고 해.”
“……네?”
“할아버지는?”
“고, 공작님께선 오늘 주요한 용건으로 추, 출타 중이십니다.”
이런. 할아버지 핑계는 못 대게 됐잖아?
“그럼 그냥 안 만난다고 해.”
아직 그 폭군 오빠에 대해서는 샤를리즈가 어떻게 대했는지 잘 기억이 안 난단 말이지.
괜히 어색하게 행동했다가 의심받기 싫다.
나는 내 코인을 꼭 돌려받고 싶다고.
“하, 하지만 공녀님, 그것이……!”
“그럴 필요 없다.”
그 순간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놀라 고개를 돌렸다.
“직접 찾아왔으니까.”
문 옆에 삐딱하게 서 있는 사람이 보였다.
새카만 머리칼과 샤를리즈와 똑같은 색의 진한 붉은 눈동자.
황제이자 내 오빠.
그리고 남자 주인공 록시디언이었다.
‘뭐 저리 살벌하게 생겼어?’
샤를리즈가 이토록 미인이고, 남자 주인공이니 당연하게도 엄청난 미남이었지만 어째 사람이라기보다는 한 마리 맹수 같은 느낌이었다.
나를 보더니 이가 드러나도록 씩 웃었다.
“안녕, 동생아?”
저거, 눈은 전혀 안 웃고 있잖아?
그 순간 머리로 기억이 펑 솟았다.
왜 지금까지는 떠오르지 않았는지 이상할 정도로 선명한 샤를리즈의 기억들이었다.
“황녀님?”
“날 그렇게 부르지 마!”
오, 떠올리고 보니 샤를리즈는 아무래도 황녀라 불리는 걸 딱히 좋아하지 않았던 것 같다.
따지고 보면 황녀가 맞았지만, 황실에서 살지 않는 게 마음에 안 들었던 것 같다.
“그렇게 부르지 마.”
내가 이렇게 말하기 무섭게 록시디언이 성큼 들어왔다.
그러더니 씩 웃는 얼굴 그대로 내게 검을 들이밀었다.
……검이요? 이 미친!
“하하, 어디서 이 하늘 같은 오라비에게 반항이야? 오늘도 버릇을 고쳐 주랴?”
그리고 속속들이 떠올랐다.
어째서인지 책에서 읽은 것과 다르게…… 이 남자가 여동생 바보 오빠 같은 면모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왜?
다행히 검집에서 벗기지 않은 그대로 목에 가져다 댔지만 어디 책 속 폭군이 이러는 게 평온하게 느껴지겠나.
‘……와, 책 속에서도 또라이였지만 진짜 미친놈이네.’
책 속에서도 웬만한 악당보다 더 악당 같고 미친 기행을 저질러 왜 하필 저놈이 남자 주인공인가 고찰을 하게 만들었던 인물이었다.
설마하니, 자기 친여동생에게까지 기행을 보일 줄은 몰랐지만.
그리고 막 떠오르는 기억을 보아하니, 샤를리즈의 성격도 여기에 지는 성격은 아니었던 것 같다.
록시디언이 피식 웃더니 검을 뒤로 물렸다.
그러고는 자연스럽게 털썩 소파에 엉덩이를 붙였다.
마치 제집 안방인 것처럼 다리를 쭉 뻗어 탁자에 턱 올려놓기까지 했다.
“아이고, 뻐근하다. 뻐근해.”
나른하게 뻗은 모습을 보자니 저 기럭지나 얼굴에 감탄이 나오는 게 아니라 나도 모르게 기가 찼다.
‘……뭐지? 이 기시감은.’
가슴에서, 아니 머리에서 뭔가 떠오를 듯 말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