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4/194)

3화

어느새 주변 하인들이고 하녀들이고 모두 나가고 문이 닫힌 지 오래였다.

눈을 잠시 감았던 록시디언이 눈을 슬쩍 뜨더니 그대로 찡그렸다.

내가 흠칫하는데 설핏 짜증 어리고 나른한 표정으로 툭 뱉었다.

“야, 이리 와 봐.”

왜일까. 몸이 절로 주춤 움직였다.

이상한 건 아닌 것 같다. 왜냐면 기억 속 샤를리즈도 짜증을 내면서 움직였던 것 같으니까.

“야, 야야, 윤지후! 윤지후! 큰일 났다! 빨리 와 봐!”

그리고 내가 록시디언 앞으로 다가갔을 때였다.

“커튼 좀 쳐.”

“불 꺼.”

……이 기시감이 뭔가 했더니!

“아, 그리고 다과 좀 내와. 네가 직접.”

“야야, 라면 좀 끓여 봐. 3인분 같은 2인분으로.”

……왜 지금은 죽고 없는 친오빠 윤지훈 그 인간이 떠오르는 거지?

아니, 하는 짓이 싱크로율 100%를 외칠 법했다.

“뭐 해, 커튼 치라니까?”

혹시 세상 모든 오빠들은 여동생에게 하는 행동이 똑같은가?

아니, 그럴 리 없다. 세상에 다정한 오빠, 친절한 오빠가 없을 리 없잖아?

‘내가 책에서 읽었던 록시디언은 적어도 그 다정한 오빠였는데?’

적어도 샤를리즈가 여주인공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힐 뻔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어처구니가 없어 얼굴을 쓸어내리는 동시에 입이 나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네가 쳐.”

아, 나도 모르게 그만.

“네가?”

“그래. 손이 없어?”

“허어? 많이 컸다?”

샤를리즈도 나름 반항을 했던 것 같으니, 이 정도는 상관없지 않을까?

윤지훈이 겹쳐 보이는 바람에 나도 모르게 그만 나와 버렸달지.

그러나 록시디언의 표정이 가소로운 걸 보듯이 보다가 이내 코웃음을 쳤다.

“사춘기 때나 하던 반항을 또 하는 걸 보니, 오랜만에 버릇이나 잡아 줘? 엉?”

이 무슨, 남자 주인공이 삼류 양아치같이 굴고 있어?

나는 내가 좋아했던 소설의 로망이 와장창 깨지는 것을 느끼며 찡그렸다.

그리고 이건 순간이나마 긴장이 풀려 남자 주인공 폭군의 광인력을 물로 보았던 내 실수였다.

정말 단 한 순간이었건만 록시디언의 눈이 낮게 가라앉은 것이다.

“큭, 으윽…… 하필. 지금.”

동시에 붉은 눈으로 기이한 금색이 일렁거렸다.

‘잠깐, 잠깐만…… 저거, 설마?’

책 속에서 폭군 록시디언은 기이한 광증을 앓았다.

가끔씩 주체하지 못하고 날뛰고 다녀서 더욱더 폭군이라 불린 것이기도 했는데.

이걸 잠시나마 잊었던 내 실책이었다.

쉬이잉-. 날카로운 바람이 불었다.

나는 주춤 물러날 타이밍조차도 잊어버렸다.

어느새 완벽하게 무표정을 한 록시디언이 이번엔 검집에서 뽑은 검을 내게 겨누고 있었다.

흡, 숨을 참았다.

으앙, 미친, 내 로망 돌려줘. 잘생기고 다정한 오빠는 어디 갔냐고.

그나마 내가 샤를리즈로 눈을 떠 장점이 있다면 그거라고 생각했는데!

록시디언이 아무렇지 않게 손을 들어 올린 순간 눈을 질끈 감고 외쳤다.

“어, 엄마야! 저, 저리 가!”

콰앙!

거대한 소리에 눈을 뜨자, 이게 웬걸 내 앞에서 훨씬 떨어진 곳에 나동그라진 록시디언의 모습이 보였다.

나름 뛰어난 검사랍시고 곧바로 상체를 일으키며 균형을 잡는 것 같았지만, 나는 이미 그를 보고 있지 않았다.

‘뭐, 뭐야. 내 목걸이 왜 이래?’

놀랍게도 내 목에 걸려 있던 목걸이가 금빛을 내고 있었다.

동시에 머릿속으로 어떤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우리 딸, 아들. 남매끼리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 아니면 엄마가 화낼 거예요.”

“특히! 록시디언! 동생 잘 챙기고!”

바로 샤를리즈의 모친, 선황후의 모습이었다.

외조부와 똑같은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여성이 기억 속에서 활짝 웃으며 말했다.

“오빠가 괴롭히면 언제든 엄마를 부르렴. 아주 혼내서 다정하게 만들어 줄 테니.”

그 순간 먼지바람 사이에서 록시디언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 손에 검을 든 모습에 나도 모르게 숨을 꿀꺽 삼켰다.

지금 내 오빠를 날려 버린 게 내가 그런 거지? 아무래도 그런 것 같지?

대체 무슨 힘인지 모르겠지만 살려 주세요……!

또 다시 검이 날아올까 싶어 오들오들 떠는데, 돌연 록시디언이 놀란 표정으로 검을 바닥에 떨어트렸다.

땡그랑!

그와 동시에 록시디언이 성큼 다가왔다.

“이런, 내가 무슨 짓을……! 괜찮니, 리즈?”

……네?

“미안해. 오빠가 잘못했어. 오빠가 아주 몹쓸 짓을 했구나!”

사실 따지자면 록시디언은 상당히 사납고 야성적으로 생긴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마치 사람이라도 바뀐 것처럼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내 어깨를 붙잡은 채 염려하는 표정을 지었다.

마치 호랑이가 작은 고양이 흉내를 내는 것 같았달까.

거대한 발톱을 숨기고 불쌍하게 쳐다보는 모습.

어쩔 줄 모르는 이 얼굴에 내 턱이 빠질 것 같았다.

“……저, 폐하?”

“폐하라니, 남매끼리 뭘 그리 멀리 불러. 어서 오빠라고 해 봐.”

“…….”

뭐지, 남자 주인공이 이중인격인가.

내가 혼란을 느끼려는 찰나, 록시디언의 표정이 마구 일그러졌다.

그러더니 곧 처음 여기에 들어왔을 때와 비슷한 표정이 되었다.

아니, 곧 엄청나게 사나운 표정을 지었다.

“야, 이런 XX, 동생아 지금 너 뭐 했냐?”

“…….”

“아오 씨, 내 광증.”

나도 영문을 모르겠는데요.

록시디언이 나를 노려보더니 그대로 손을 들었다. 순간 때리려는 줄 알고 나도 모르게 쫄아서 눈을 질끈 감았다.

“으, 아, 엄마야!”

“…….”

동시에 다시 방이 고요해졌다.

눈을 뜨면…….

“헉, 놀랐어? 미안해. 오빠는 그저 얼굴을 문지르려 했던 건데…….”

미친. 어울리지도 않는 정중한 오빠가 또 보였다.

……가만, 이거 설마.

“엄마?”

“…….”

설마 내가 ‘엄마야!’ 하고 외치면 이 오빠가 휙휙 변하는 거야?

왜 이렇게 된 건지, 영문을 전혀 모르겠지만 어째 그런 것 같았다.

“아오 씨, 이게 뭐야. 토 나올 것 같아!”

“엄마야?”

“저런, 미안해. 리즈.”

휙휙 변하는 록시디언의 표정을 보며 나는 그대로 입을 벌렸다.

세상에, 나는 코인만 돌려받으면 되는데 이게 다 무슨 일이야…….

정작 중요한 약혼자를 만나기도 전에 기이한 상황 먼저 마주한 셈이었다.

어째 중요한 일을 앞두고 이상한 덤이랄지, 성가신 짐을 마주한 기분이었다.

* * *

대체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그저 멍하니 입을 벌리며 록시디언의 눈치를 보았다.

왠지 저 인간의 얼굴이 실시간으로 더욱 분노가 더해지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는 착실하게 오빠가 손을 뻗는 족족, ‘엄마야’를 외쳤고, 그는 번번이 변하곤 했다.

“야, 너 작작 못 해?”

“하, 하지만 오빠가 잡으면 때릴 거잖아?”

“뭐? 내가 언제 널 때…….”

“으악 엄…….”

“아 젠장 안 해, 안 한다고!”

결국 록시디언이 나를 붙잡는 걸 포기하고 자신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노아.”

록시디언이 중얼거리는 동시에 그의 뒤로 마치 칼로 쭉 찢듯이 공간이 찢어졌다.

놀랍게도 블랙홀같이 검은 공간에서 누군가 툭 튀어나왔다.

“맙소사.”

이마가 살짝 땀으로 젖은 무척이나 잘생긴 남자였다.

그는 방을 한번 슬쩍 보더니 기다렸다는 듯이 찡그렸다.

“……드디어 광증으로 하나밖에 없는 혈육마저 때려 패신 겁니까? 패륜…….”

“닥쳐.”

잘생기면서도 섬세한 이목구비를 가진 남자였다.

바다를 일부 베어온 것처럼 새파란 머리칼, 우아한 턱선, 느릿하게 뜨이는 회색 눈동자에서 곧바로 알았다.

노아.

서브 남자 주인공이다.

“제가 잠시 늦었다고는 하나 이 무슨 일이란 말입니까?”

록시디언에 비하면 부드러운 느낌이었다.

무표정한 얼굴이 여자인가 싶을 정도로 곱상하고 아름다웠으나 동시에 서늘하고, 냉기가 느껴졌다.

“알아서 잘 하신다더니!”

이내 재처럼 고운 회색 눈동자가 나를 잠시 향했다가 순식간에 록시디언에게로 돌아갔다.

“폐하를 제외하고 제국에 하나밖에 없는 황실의 핏줄을 소중히 여겨 주셔야죠. 지금 상황에서 황실의 핏줄이 하나라도 사라지면 어떻게 될지 잘 아시지 않습니까.”

풀 네임 노아 첸다이스.

서브 남자 주인공이며, 황제의 부관 겸 수호 기사였다.

그리고 그가 맡은 또 다른 역할을 알고 있었다.

책 속 커다란 반전과 함께하는 사람이니만큼 이 사람을 만나게 되는 건 좀 더 시간이 지난 뒤의 일이라 생각했는데…….

“오늘은 오랜만에 돌아오시는 공녀님을 반길 겸 저분의 약혼자 얘기를 하러 가신 게 아니었습니까? 왜 바닥이 부서져 있는 거고 검은 왜 뽑혀 있는 겁니까, 폐하.”

“아, 좀 닥쳐 봐.”

록시디언이 귀를 살짝 막았다 떼면서 머리를 쓸어 넘겼다.

“됐고, 내 광증 진정됐다.”

“네? 지금 그게 중요…… 오, 아주 중요한 얘기군요.”

노아가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응시했다.

“허어, 그렇군요. 열쇠가 공녀님이셨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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