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5/194)

4화

책 속 폭군 록시디언은 태어날 때부터 선천적으로 감정이 결여된 사람이었다.

황가의 선조에 섞인 짐승의 피가 안타깝게도 록시디언에게서 너무나 짙게 나타난 것이다.

그 탓에 록시디언은 인간으로서 당연히 가질 여러 감정에 무뎠다.

머리는 비상했으나 예의와 상식을 익히는 것을 어려워했다.

본능적으로 가진 날 것을 참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이를 불쌍히 여긴 선황 부부는 마법의 힘을 빌려 록시디언에게 억지로 감정을 불어넣었다.

어린 시절에는 그걸로 괜찮았지만…… 그가 나이를 먹어 가면서 마법의 힘은 차차 흐려졌다.

‘흐려질수록 광증이 다시 나타나기 시작했지.’

그가 폭군이라는 이름을 얻은 이유는 이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건 후에 여주인공이 나타나고 광증을 애써 참아 가며 집착하는 등 19금의 맛을 살리는 설정이 되었는데…….

‘왜, 내 앞에서는 아주 병맛 나게 바뀐 거지?’

노아가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공녀님. 그리고 축하드립니다. 폐하의 광증을 잠재우시다니요.”

“…….”

“제국의 숨겨진 우환을 하나 걷어 내신 겁니다.”

……아니, 그 우환 딱히 걷어 내고 싶어서 걷어 낸 게 아닌데.

“축하하긴 일러. 부작용이 있으니까.”

“부작용이라니요?”

“씹……. 내 입으로 말하기 싫다.”

“예?”

“말하기 싫다고, 아오.”

“하지만 폐하, 아시다시피 저는 뭐든 알아야 하는 상황 아니겠습니까. 폐하께서 백치가 되는 부작용이라도 이해할 테니 뭐든 말씀해 주십시오. 각오하겠습니다.”

“죽을래? 하……. 직접 보는 게 빠를걸. 야.”

록시디언이 나를 부르고, 노아가 자연스럽게 나를 보았다. 나는 고개를 까딱했다.

“‘엄마’가 아주 좋은 선물을 남기셨나 봐.”

그와 동시에 록시디언의 표정이 사르르 변하더니, 나를 쳐다보는 시선부터 달라졌다.

부드럽고 다정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러게, 리즈. 어머니께선 내 여동생을 위해 좋은 선물을 주셨나 봐.”

“……폐하?”

“그러고 보니 뭐 갖고 싶은 것은 없니?”

홀로 떠들기 바쁜 폭군을 보던 노아의 입이 조금 전 나처럼 쩍 벌어지는 것이 보였다.

록시디언은 그러거나 말거나 다정한 오빠의 얼굴로 연신 내 옆에 거대한 몸을 쪼그리고 앉은 채 열심히 다정하게 내 안부를 묻기 바빴다.

구겨져 앉은 모습이 영락없이 자신이 고양인 줄 알고 조그만 상자에 몸을 구겨 넣은 호랑이나 다름없었다.

그가 이러는 동안 노아는 웃음을 꾹꾹 참다가, 잠시 뒤 원래대로 돌아온 록시디언의 살벌한 시선 아래서 미친 듯이 웃음을 참아야 했다.

“아, 그, 어, 이게 어떻게 된 건지…… 큽, 아, 알아보겠습니다.”

록시디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후, 오늘 용건은 나중으로 미루도록 하지. 너. 경고하는데, 밖으로 싸돌아다니지 마.”

“…….”

나는 돌아가는 그의 등을 어처구니없이 바라볼 뿐이었다.

한차례 폭풍이 지나간 기분이었다.

* * *

금방이라도 다시 찾아올 것 같았던 록시디언은 이후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어째서인지 그날 외출에서 돌아온 외할아버지, 알츠베이트 공작이 노발대발 화를 냈다.

‘록시디언이랑 알츠베이트 공작이랑 사이가 나쁘구나.’

샤를리즈의 기억이 차차 떠오르면서 알게 된 사실 중 하나였다.

어째서인지 공작과 록시디언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아니, 엄청 좋지 않다고 해야 하나?

외조부와 손자의 관계건만, 정치적으로 숙적이나 다름없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각기 샤를리즈에게는 관대한 사람들이었다.

‘뭐, 아무리 망나니로 살아도 그대로 수습해줄 정도로 애정을 가지긴 했으니까.’

내 눈앞에는 그중 한 사람인 외조부가 보낸 선물이 잔뜩 놓여 있었다.

“공작님께서 근래 밖으로 외출이 전무하신 공녀님을 염려하며 준비하셨습니다.”

“오.”

나는 속으로 휘파람을 불었지만, 한편으로는 고민에 잠겨 있었다.

‘와, 이래도 안 만나 줘?’

바로 내가 반드시 만나야 할 사람, 내 약혼자를 아직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내가 수십 번을 보낸 초대장은 언제나처럼 뜯지도 않고 돌아왔다.

동시에 알츠베이트 공작저로는 약혼자의 파혼 요구 서류가 계속 도착하고 있었다.

나름 예의는 차릴 만큼 차렸다 생각한다. 직접 나설 때였다.

‘알맹이가 바뀐 김에 나름 예의 바른 첫 만남을 만들고 싶었지만…….’

아스킨에 대한 정보는 머릿속에 있었다.

“외출할 거야.”

“네, 공녀님. 얼른 준비하겠습니다.”

이 시간에 그 남자가 있을 만한 장소는…….

하나뿐이지.

잠시 후 나는 외출용 드레스 옷자락을 보면서 작게 감탄했다.

“……최대한 수수한 걸 고른 건데.”

사치를 미덕으로 삼은 샤를리즈의 옷장에는 ‘수수함’이라는 단어가 존재하지 않았다.

‘예쁘긴 진짜 예쁘다…….’

그랬다. 내 얼굴은 봐도 봐도 질리지 않을 만큼 예뻤다.

이대로 연예계에 진출했으면 평생 얼굴로 먹고사는 게 뭐야 내 3대손까지 먹고살 돈을 벌지 않았을까.

좀 표독스러운 느낌이 있긴 하지만.

절대적인 아름다움이 이걸 가려 준다고 할까.

‘샤를리즈는 본인의 외모를 아주 잘 알았음에 틀림없어. 그리고 잘 이용했겠지.’

그녀의 옷장에는 사치스러울 뿐이지 어울리는 옷으로 가득했다.

덕분에 노출이 없는 드레스 찾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던지라 하는 수 없이 웃옷을 걸치고 저택을 나서려 할 때였다.

“저어, 고, 공녀님!”

나는 어리둥절해졌다.

하녀 하나가 내 앞을 가로막고서 고개를 깊이 숙이고는 다시 드는데, 마치 ‘저를 죽이지만 말아 주세요!’ 하는 표정으로 덜덜 떨고 있었으니까.

뭐야, 무슨 문제라도 생겼나?

이곳의 하녀들은 샤를리즈를 모두 무서워한다.

며칠간 내가 잘해 준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공포를 극복하진 못했다.

……대체 얼마나 사람을 잡았으면.

아무튼 간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래서 왜 막아선 거지?

“소, 손님이 도착하셨습니다.”

“손님?”

“예, 공녀님의 친우 분들이…….”

“아.”

친구? 고개를 갸웃하는 동시에 머릿속에 샤를리즈의 기억이 떠올랐다.

아아. 친구. 걔들을 말하는 거구나.

샤를리즈는 악행을 저지를 때 혼자 저지르지 않았다.

자주 함께 사고를 치는 무리들이 있었다.

그녀 자신과 비슷한 성향이거나 샤를리즈가 가진 배경에서 떨어지는 콩고물을 주워 먹는 게 목적인 간사한 인간들의 총집합.

‘이름하야 수도의 개망나니 모임이라고 하지. 줄여서 ‘개망’이라고 부른 기억이 나는데.’

이름처럼 이들은 훗날 인생이 개망하게 되는데……. 다들 자신이 저지른 업보 때문이라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이 무리의 리더나 마찬가지인 샤를리즈는 가장 끔찍한 최후를 맞이했지.

나는 내 목을 문질렀다.

‘와, 새삼스럽게 피폐물에 빙의했다는 기분이 선명하게 느껴지네.’

이야기가 이대로 원작 그대로만 진행된다면 나, 샤를리즈는 그토록 사랑하고 집착했던 대상에게 살해당하고, 믿었던 오빠는 사랑하는 여자에게 푹 빠져 도와주지도 않을 것이다.

한마디로 외롭고 괴롭게 그리고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을 정도로 끔찍하게 죽는단 소리다.

‘사실 오빠란 놈은 이미 만나 봤지만…… 배신이랄 것도 없이, 여주인공이 등장하면 홀랑 걔 편을 들 것 같던데.’

원작에선 사이가 좋은 남매였는데.

아무리 봐도 나를 좋아하기는커녕 지나가는 개만도 못하게 여기다가 호되게 당해 돌아가는 꼴이 나를 향한 분노만 키우지 않았다면 다행인 수준이었다.

다행인 것은 내가 이대로 이곳에서 1년을 잘만 보낸다면…….

‘원작이랑은 전혀 상관없다 이거지.’

원작에서 이어질 샤를리즈의 죽음 전에 돌아갈 수 있다!

그 시간이 간당간당할 뿐이지.

그러니까.

“마차 준비한 거 취소해.”

“……예, 공녀님.”

‘앞으로 1년 동안 안전하게 살려면 질 나쁜 친구들은 미리 끊어야 한다.’

지금 나를 방문했다는 개망나니 친구들은 앞으로 내가 행할 계획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싹은 미리미리 잘라서 나쁠 것 없지.

‘기다려라, 약혼자님. 조만간 내가 얼른 얼굴을 보러 갈 테니.’

한시라도 바삐 협상해야 할 약혼자의 얼굴을 보지 못한 것은 아쉽지만.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라고 생각하면 아깝지 않았다.

“손님을 모셔.”

* * *

화려한 응접실.

샤를리즈의 응접실은 보통 응접실 구조와는 달랐다.

보통 귀족 영애의 응접실이란 차를 마실 수 있게 예쁜 테이블이라거나 커다란 창을 둔 구조를 선호한다.

하지만 이와 반대로 샤를리즈의 응접실은 커다란 창은커녕 있는 창에도 암막 커튼을 단 구조였다.

덕분에 대낮에도 마치 밤과 같은 환경을 만들 수 있었는데, 지금도 딱히 다르지 않았다.

은은한 마법 등이 틀어진 이 광경은 마치 고급스러운 펍을 연상시켰다.

‘드라마를 보면 재벌들이 고급진 술집에서 노는 장면이 나오던데, 어째 여기가 그때 나온 술집이랑 다르게 보이진 않네…….’

그랬다.

샤를리즈의 패악과 공포에 길들여진 이 집안 시종인들이 시키지 않아도 준비를 해 둔 것이었다.

그리고 편안하고 안락한 소파에는 여러 남녀가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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