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7/194)

6화

사실 눈앞의 남작 영애는 샤를리즈를 부추기면서도 뒤에서는 샤를리즈의 악행을 부풀리고 비웃기 바빴다.

샤를리즈는 알면서도 그냥 둔 것 같지만.

이 자리 내가 끝내야겠다.

서둘러 일어나 돌아가는 모습을 끝까지 차갑게 보다가 모두가 사라진 뒤에야 으어어어, 소리를 내며 소파에 쓰러졌다.

“아……. 어지러워 죽는 줄 알았네……!”

이 술 대체 도수가 몇이야? 나는 가까스로 정신을 붙잡고 술의 도수를 찾아봤다가 기절하는 줄 알았다. 뭐야, 위스키보다 더 독하잖아? 미쳤군.

내가 사장님 참석한 회식 때도 이렇게 달려 본 적이 없는데.

“으으어, 죽겠다. 이건 말도 안 돼…….”

샤를리즈는 저런 술을 여덟 병은 먹고도 멀쩡했다고…….

근데 왜 나는 두 병도 안 돼서 이러는 게 무슨 일이죠……?

아니, 영혼만 바뀐 건데 주량이 바뀌는 게 어딨냐고요…….

사실 아까 그 남작 영애에게 한마디 한 것도 취기에 한 행동이기도 했다.

물론 파투 내야겠다는 마음은 시작부터 품고 있었지만.

일단, 내 약혼자에 대한 평판은 아주 잘 알겠다.

“……놀랍네.”

나는 천장을 보며 눈을 깜빡였다.

‘내 약혼자님의 그 미모가 알려지지 않았단 말이야?’

레무트 공작. 내가 그 남자에 대한 건 뚜렷하게 기억한다.

조연이지만 내 마음에 쏙 들었던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남주가 내 오빠란 인간이어서 그렇지, 왜 여주가 레무트는 어장에 넣지 않았는지 매우 의아해했을 정도로 내 약혼자님은 잘생긴 미남이었다.

청초하고, 서늘하고, 금욕적이고……. 또 뭐가 있더라?

‘아, 혼전 순결주의자.’

그래서 어장에서 제외된 건가? 이 소설은 19금 피폐 소설이었으니까.

침대에 함께하지 못하는 남자는 어장에 넣어 주지 않는 걸지도 모른다.

댓글 창에서 열심히 넣어 달라고 외쳤었는데 말이지.

어쨌거나 무슨 연유에서인지 그 남자는 공식 석상에 거의 나타나지 않으며, 사람들이 그 얼굴을 거의 모를 정도란 건 잘 알겠다.

“으욱…….”

천장이 마구 울렁거렸다.

오, 이 정도 취기면…… 내일 숙취 장난 아니겠는데.

나는 눈을 살짝 감았다.

* * *

깊은 밤.

레무트 공작의 서재는 공작의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허름했다.

물론 보통 귀족들이 사용하는 것에 비하면 평균 수준이라 할 수 있으나, 레무트 공작이란 위명에 비해 부족한 것이 사실이었다.

“공작님.”

막 문을 열고 들어온 남자는 레무트 공작의 부관이자 기사이기도 한 벤이었다.

그는 공작씩이나 되는 이의 집무실이 어째서 격에 맞지 않게 허름한지 이유를 잘 알고 있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는 나오려는 한숨을 꾹 참으며 걸어갔다.

“무슨 일이지?”

늦은 시간이었지만 레무트 공작은 업무를 보느라 바빴다.

그가 맡은 서류 대부분이 그의 영지에 관련한 서류 혹은 빚에 관한 서류였다.

그랬다. 레무트 공작가는 어마어마한 빚을 가지고 있었다.

“…….”

벤이 쉬이 입을 열지 못하자 레무트 공작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아스킨 레무트.

서쪽의 수호자라는 별칭을 가진 제국 최강의 검.

그는 달이 현신한 듯 몹시도 아름다운 미남자였다.

벤의 최측근이자 공작과도 가까운 유모 마사의 입을 빌리자면 제국 500년 역사를 통틀어도 이만한 미남은 없을 거란 평이 아깝지 않은 미모였다.

서쪽 사람답게 단단한 체구에 비해 얼굴만 보자면 성직자인가 싶을 정도로 경건하고 성스러운 마음마저 느껴지게 하는 미모였다.

마사는 이에 대해 잘생겼다는 말보다 아름답다는 말이 더 잘 어울리는 미모라며 주접을 부리곤 했다.

벤은 사람의 외모에 큰 감상을 갖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자신의 주군만은 누가 보더라도 예외로 둘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그 악독한 여자마저도 탐내는 거지.’

그러나 현실은 거대한 빚으로 인해 자신의 능력을 돈에 팔 수밖에 없던 인물이었다.

“알츠베이트 공녀에게서 편지가 도착…….”

“버려.”

냉정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에 벤이 숨을 참았다.

“알고 계십니까? 벌써 30통째 돌려보내고 계십니다.”

“……난 돌려보내란 소릴 한 적은 없는데.”

“제가 했습니다. 버리는 것보다야 그대로 돌려보는 게 덜 모욕적이고, 괜히 문제가 커지지 않을 테니 말입니다.”

벤이 숨도 쉬지 않고 와다다다 말했다.

그랬다. 벤은 주군의 약혼자이자 그 악독한 공녀의 초대장을 벌써 30통째 돌려보냈다.

이상하게도 최근 초대장이 지나치게 잦았다.

게다가 거절에 수긍하지 않는 점도 이상했다.

“이상합니다. 최근에 이렇게 자주 찾았던 적은 없지 않습니까?”

“여행에서 돌아왔다더니, 다시 악독한 장난기라도 돈 모양이지.”

샤를리즈 알츠베이트가 자신이 친 사고 수습 때문에 여행을 빙자해 잠시 쫓겨났던 일은 수도에 유명했다.

공식 석상에 잘 나가지 않는 아스킨에게 들려올 정도로.

물론 타국에서 귀찮을 정도로 도착하는 편지 덕에 모를 수가 없었지만.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전엔 공작님께서 다섯 번쯤 거절하시면 쉽게 흥미를 잃지 않으셨습니까?”

샤를리즈 알츠베이트는 화려한 외모에 사치를 밝히는 성격.

보화를 좋아하는 성미만큼이나 변덕스러웠다.

그녀는 이따금 날을 잡아 아스킨을 지독하게 괴롭히곤 했지만, 대체로 아스킨이 거부하면 거부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날 거부하는 남자는 언제나 너뿐이라는 둥 재밌어하며 그만두곤 했다.

아스킨은 답하지 않았다.

벤은 주군에게서 ‘알 게 뭐야.’ 하는 차가운 거절을 느꼈다.

“뭐가 어찌 되든 이젠 상관없는 일이다.”

아스킨이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일단 모른 척해.”

다시없을 확고한 의지가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마치 무언가 방법이 있다는 듯이.

벤은 고요하게 고개를 숙였다.

‘진정 그 여자랑 헤어지는 방법은 없는 건가.’

벤은 불안한 마음을 꾹 눌렀다.

* * *

꿈을 꿨다.

“헉, 뭐야. 이 돈은?”

눈앞에 지폐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나는 열심히 세다가 포기했다.

눈대중으로 대략 스윽 보아도…… 이건 내가 받을 돈이었다.

‘코인으로 번 돈이 돌아왔구나!’

나는 돈의 파도에서 열심히 헤엄치다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정신을 차리고 살펴보니, 나는 깔끔한 명품 정장을 입었다.

그리고 눈앞에 산처럼 쌓인 지폐보다 더 많은 금액이 내 핸드폰 모바일 뱅킹 속에서 숫자를 빛내고 있었다.

이건 내가 집을 사고도 남은 돈이었다.

길기도 한 숫자를 흐뭇하게 보다가, 언젠가 잡지를 보며 감탄만 꼴깍 삼켰던 명품 매장에 들어갔다.

나를 정중하게 반기는 점원을 보면서 내 인생에 딱 한 번쯤은 해 보고 싶었던 대사를 멋지게 읊었다.

“VIP 담당 매니저가 누구죠?”

명품 리뷰 너뷰버 동영상이나 드라마 속에서 보았던 대사를 읊으며 신나게 돌아보았다.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다 살게요.”

그렇게 나는 돈을 펑펑 썼다.

줄지 않는 숫자를 보며, 나는 꿈에도 그린 돈 많은 백수가 되었단 걸 알았다.

너무나 행복했다.

‘신이시여, 제 인생 이대로 욜로로만 살게 해 주세요……!’

놀랍게도 이렇게 비는 순간에 눈을 떴다.

꿈에서 깼단 소리다.

“아으, 머리야…….”

눈을 뜬 순간 마치 현실이라는 걸 열심히 알려 주듯 깨질 것 같은 두통이 함께였다.

이건 뭐로 보나…… 숙취였다.

하녀는 마치 언제나 그랬다는 듯이 내가 깨어나자마자 따뜻한 꿀물과 시원한 얼음물을 즉각 대령했다.

‘아무리 주당인 샤를리즈라도 숙취는 있었겠지.’

다시 한번 억울해졌다.

‘왜 주량이 바뀌어서는!’

하지만 이미 일어난 일, 나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자리에서 부스스 일어났다.

손을 내려다본다. 꿈에서 봤던 액수가 생생했다.

……내 코인. 내 돈.

없이 살아온 인생이 길어서일까? 썰물처럼 사라진 내 돈이 아까운 동시에 써 보지도 못하고 죽어 버린 인생 역시 새삼 아까워졌다.

“안 되겠다.”

나는 자리를 박차고 걸었다.

곧 얼마 지나지 않아 내게 불려온 하녀들은 다들 눈치를 보며 나를 치장하기 바빴다.

“……공녀님, 머리가 모두 완성되었습니다. 여기에 장식은…….”

“됐어.”

하녀들은 아침부터 움직이는 나를 의아하게 보는 동시에 내가 머리를 꾹꾹 누르는 모습을 보며 겁먹기 바빴다.

몇몇은 움직이려는 나를 말리고 싶어 하는 눈치기도 했다.

착하신 분들이네……. 샤를리즈를 걱정하는 사람도 있고.

“저, 공녀님, 마부에게는 어디로 향하는 것이라 말해 둘까요?”

“레무트 공작저.”

“……네?”

하녀는 입을 뻐끔거리면서도 서둘러 고개를 숙였다.

잠시지만 하녀들의 눈으로 깊은 의문과 안타까움이 스쳐 지나갔다.

과연 저건 나와 약혼자님 중 누구를 향한 안타까움인지 궁금했지만.

‘머리가 아파서 못 물어보겠다.’

“혹시 숙취에 좋은 약이 있니?”

“네? 네, 얼른 가져오라 하겠습니다!”

하녀 하나가 후다닥 달려간 사이에 치장을 마친 하녀들이 고개를 조아리며 뒤로 물러났다.

거울을 보자니 놀랍게도 숙취로 초췌한 와중에도 예쁜 여인이 나를 보고 있었다.

‘……진짜 미모 하나는 죽이네.’

예쁘긴 정말 예뻤다.

하필 이 미모를 악독한 짓에만 사용해서 그렇지.

나는 작게 한숨을 쉬고는 머리를 꾹 눌렀다.

거울을 통해 보는데, 하녀 하나가 나를 몰래 흘끗 보면서 눈치를 보는 것이 보였다.

“너, 무슨 할 말 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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