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네? 네에? 아, 저 그게…….”
콕 집어 말했더니, 무슨 말도 하나 안 했는데 덜덜 떨기 시작했다.
말을 걸려는 걸로 보였는데 아니었나?
“다그치려는 거 아니야. 할 말이 있나 싶어서 물어본 거니 신경 쓰지 마.”
“……아. 저, 그게 공녀님.”
내가 평온하게 말하자, 하녀의 얼굴로 커다란 의문이 어리더니 곧 용기를 낸 표정으로 말했다.
“약이 오기 전에…… 이것을 먼저 드시겠어요?”
“뭔데?”
“숙취 약이에요, 그, 수제 약이지만……!”
“수제?”
“네, 네! 제 오라버니가 자주 숙취에 시달려서 만든 것인데, 호, 혹시나 도움이 되실까 싶어서.”
직접 만들었다는 소린가?
나는 하녀가 내민 약을 빤히 보다가 입을 열었다.
“흐음, 만약 이게 독이라 내가 쓰러지기라도 하면 넌 죽을지도 모르는데 괜찮니?”
“네? 죄송합니다, 공녀님! 제가 주제넘었습니다! 도, 독이라니 가당치도 않아요!”
“…….”
“그, 그저 공녀님께서 괴로워하시는 모습이, 제, 제 오빠와 겹쳐 보여서 그만……!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제발 살려 주세요!”
아. 샤를리즈가 워낙에 원한을 많이 산 인물이라 한번 말해 본 건데…….
생각지 못한 과한 반응에 조금 미안해졌다.
물론 떠보면서 이런 반응을 아예 예상 못 한 건 아니지만…… 진짜 독이면 어떡해?
확인은 해 봐야겠다 싶었으니까.
“오빠는 뭐 하는 사람인데?”
“고, 공작가에 주류를 납품하는 상단에서 일하는 관리자입니다……! 직업상 술을 마, 많이 마셔서.”
하녀는 눈치 빠르게 알약 중 하나를 내가 보는 앞에서 자신의 입에 털어 넣었다.
지금 이 순간 진실을 증명하지 못하면 샤를리즈의 한마디에 목이 달아날 수도 있다는 걸 잘 아는 것 같았다.
어떻게든 진실임을 보여야 하는 행동이어서인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샤를리즈의 공포가 이 정도구나.’
나는 남은 약을 가져와 입에 털어 넣었다.
오, 이거 지구에서 먹었던 숙취 해소 약이랑 비슷한 맛이 나네? 신기하다.
사실 독 아니냐 묻긴 했지만 머리가 계속 아파서 어떻게든 해결하고 싶던 상황이었다.
게다가 놀랍게도 먹은 지 1분도 안 돼서 좀 나아지는 기분이라 놀라웠다.
“와, 효과 괜찮네. 고마워.”
“……네?”
“이름이 뭐야?”
마침 방문이 열리며 나갔던 하녀가 돌아와 마차가 준비됐다고 알렸다.
숙취 약을 가지러 간 하녀는 더 걸릴 모양이었다.
나는 약을 준 하녀의 손을 잡고 싱긋 웃었다.
“이름은 갔다 와서 들을게. 일단 이건 선물.”
나는 손에서 팔찌를 빼서 들려 주었다.
팔찌를 받은 하녀는 물론 주변도 함께 경악한 얼굴이었다.
개중에서 탐욕스러운 눈을 한 사람을 알아보았다.
저 사람, 하녀 중에서 가장 직급이 높았던가?
“차고 다녀.”
나는 하녀 언니의 어깨를 톡톡 두드려 주고 걸음을 옮겼다.
“마차는 어느 쪽이야?”
“이쪽입니다, 공녀님.”
자, 약혼자님 얼굴 좀 보러 갈까.
* * *
아스킨 레무트. 내 약혼자님이 현재 거주중인 곳에 도착하기 전에 그의 가문에 대해서 짤막하게 이야기하자면…….
우선 레무트 공작가의 영지는 서쪽 끝에 위치해 있다.
그러나 몇 대 전 황제가 서쪽 몬스터 대토벌을 완수한 공을 치하하며 수도 근처의 도시를 추가 영지로 하사했다.
레무트 공작은 수도에 올라올 때면 수도 내 자신의 저택에 가는 것이 아닌 수도 근처 영지의 성에서 머무르곤 했다.
지금도 아마 그곳에 있을 테니까.
내가 찾아간 곳도 이곳이었다.
위치가 위치인지라 오래 걸리지 않았다. 반나절 정도?
“……아, 아, 안 됩니다!”
호기롭게 레무트 공작가 성에 도착한 것은 좋았는데, 시작부터 난관에 부딪쳤다.
놀랍게도 입구에서부터 출입이 막힌 것이다.
‘와, 놀라워라.’
사실 이런 일을 예상하지 못했던 건 아니었다.
벌써 30통 넘게 초대장을 보냈건만 뜯어보기는커녕 그대로 돌려보내는 것에서부터 이미 짐작은 하고 있었다.
‘나를 반기지 않으리란 걸 말이지.’
게다가 뜯지도 않고 고스란히 돌려주는 행동.
그건 샤를리즈를 아는 사람이라면 그녀 성격에 상당한 모욕을 받으리란 걸 알고 있을 터였다.
자존심 강한 이 언니는 분명 분노했겠지.
‘사실 진짜 샤를리즈였다면 길길이 날뛰면서 병사들이라도 끌고 왔으려나?’
나는 끝까지 예의를 지키려고 했다고……. 약혼자님 당신의 답변만 오매불망 기다렸다고.
물론 답변이 오지 않은 건 이 악녀 언니의 업보이니 할 수 없지만.
그래서 직접 찾아 왔잖아.
“…….”
문제는 문 앞에서부터 가로막혔지만 말이지.
“아, 아, 안 됩니다. 공녀님…….”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문을 가로막은 기사를 빤히 보았다.
‘샤를리즈 정도의 고위 신분, 거기다 주인의 약혼자를 거절하는 기사라니.’
분명 이 사람의 의지가 아니라 윗선에서의 명이 있었을 것이다.
솔직히 무단으로 찾아온 건 나인지라, 할 말이 없어서 빤히 쳐다보기만 했는데…….
왜인지 그냥 쳐다만 봤는데…….
“그, 그, 안에 들어가셔서 부, 부관님께 여쭤보십시오!”
진짜 쳐다만 봤는데, 문이 저절로 열렸다.
나는 당황했지만 표정을 풀지 않았다.
‘좋아, 개이득.’
일단은 이 이득을 누리기로 했다.
사실 마음 같아선 더 예의를 갖추고 싶은데, 이 이상 예의를 갖췄다간 1년이 지나도 이 남자를 만나지 못할 것 같았다.
“네 약혼자, 레무트 공작이 파혼을 요구했다.”
게다가 외할아버지에 말에 따르면, 약혼자님이 파혼을 요구하는 다급한 상황이니.
정문을 열고 들어가자, 레무트 공작저가 그대로 보였다.
‘으음? 건물이…….’
나는 속으로 조금 당황했다.
건물이 웅장할 만큼 크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너무 휑한 느낌이었다.
어쩌면 사치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알츠베이트 공작저를 본 뒤라 그런 걸지도 몰랐다.
그렇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보통 귀족 저택에 비해서도 한참은 검소한 인테리어였다.
‘아니, 빚 때문에 허덕이는 건 알았지만 이건…….’
유독 약혼자님과 관련한 샤를리즈의 기억은 잘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막연히 공작이니 잘 살겠지 했는데, 생각했던 것 이상의 모습에 나는 숨을 삼켰다.
게다가 걸을 때마다 보이는 시중인의 숫자도 알츠베이트 저택에 비해 현저히 적었다.
마주치는 이들마다 화들짝 놀라 허리를 숙이는 것도 아니고 무릎을 꿇고 달달 떨더라.
……샤를리즈가 이 저택에서 얼마나 패악을 부렸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어째, 이 복도에 장식품이 없는 데엔 샤를리즈가 그나마 있던 것도 깨트린 탓도 있지 않을까.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고, 공녀님?”
그리고 누군가 나를 맞이했다.
이 저택에서 하녀장을 맡고 있는 로베나였다. 샤를리즈 기억에도 있는 얼굴이었다.
옆에 있는 중년은 총집사인 본드다.
“……고귀한 공녀님을 뵙습니다.”
“레무트 공작을 뵈러 왔는데.”
내 물음에 로베나와 본드는 순간 당황한 얼굴이었다.
‘당신이 왜 우리 주인님을 정중하게 부르냐.’ 하는 얼굴이었다. ……샤를리즈가 약혼자님을 부르는 애칭은 ‘내 개’인데 그걸 어떻게 말해?
나는 뻔뻔하게 가기로 했다.
“저, 죄송하지만 이런 방문은……!”
“내가 내 약혼자를 보러 왔다는데, 뭐가 죄송한데?”
죄송합니다, 나이 많은 할아버지에게 싹퉁머리 없게 행동하기엔 제 안의 예의 바른 유교 걸이 울고 있지만 저는 꼭 약혼자님을 만나야 합니다.
사실 그리 강하게 말하진 않았다.
고개를 갸웃했을 뿐인데, 나를 보던 로베나와 본드의 눈에 동공 지진이 일었다.
아니, 그냥 고개만 움직였을 뿐인데 왜 이렇게 떠는 거야. ……미안하게.
“공작님께서는 고, 공녀님의 방문을 받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구나. 그럼 지금 한 번 더 물어봐.”
“아, 안 됩니다! 죄송하지만 고, 공작님의 명은 절대적입니다.”
레무트 공작, 아스킨의 수하들이 유달리 충성스러운 건 알고 있었다.
책 속에서도 레무트가 죽으라 하면 그대로 목에 칼을 가져다 댈 인간들만 잔뜩 묘사되어 있었다.
덕분에 샤를리즈에게 검을 들이대는 게 황실이나 알츠베이트를 향해 검을 들이미는 것임에도, 여주인공을 도와 샤를리즈를 처단하기도 했다.
“공작에게 물어만 봐 줘. 그것도 안 돼?”
내가 이렇게 묻자, 서로를 마주 보던 로베나와 본드의 눈에 다시 한번 지진이 일었다.
‘뭐야, 얘 왜 안 하던 짓을 해?’ 하는 표정이랄지.
곧 본드의 얼굴에는 의심과 함께 더욱 단호한 빛이 어렸다.
“……죄, 죄송하지만 안 됩니다. 제, 제 손가락을 자르시더라도 안 됩니다.”
나는 본드의 얼굴을 꿇어져라 쳐다보다가 그대로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럼 이렇게 해. 공작에게 물어보고 올 때까지 안 일어나.”
“……예?”
“안 일어날 테니까.”
나는 앉은 채로 두 사람을 한 번씩 보았다.
미안하지만 오늘만 진상이 될게요. 정말 미안합니다…….
“물어만 봐 줘. 그건 어렵지 않잖아?”
“…….”
본드의 낯으로 오늘 본 것 중 최고의 경악과 놀람이 스쳤다. 이어서 노집사의 얼굴로 처음으로 난감함이 어렸다. 두려움 속에서 얘 정말 왜 이래? 하는 의문이 피어나는 걸 똑똑히 보았다.
샤를리즈가 해 왔던 행동에서 너무 벗어날 순 없지만, 그렇다고 진짜 샤를리즈가 하듯이 손가락을 자를 순 없잖아. 아니, 얘는 대체 뭘 자른 거야? 소름 끼치네!
“정말 죄송한 일이나, 그건 안 될……!”
“무슨 일이지?”
내 생떼 아닌 생떼에 이 복도의 모든 시종인이 황당하고 당황한 표정으로 보던 상황이었다.
낮은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꽤 듣기 좋은 소리. 오, 혹시 약혼자님의 등장인가?
‘아니네.’
나타난 것은 웬 키가 훌쩍 큰 남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