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9/194)

8화

나름 준수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지만 내 약혼자님은 아니었다.

그 사람은 은발이니까.

‘아, 저 사람 약혼자님의 부관인가.’

이름은 벤이었던가. 신기하게도 약혼자님의 얼굴은 애매하게 떠오르는데 저 남자는 보는 순간 바로 팍 떠올랐다.

폭군 오빠도 그렇고 얼굴을 봐야 확실히 기억이 떠오르는 건가?

“……고귀한 공녀님을 뵙습니다.”

그는 주저앉은 나와 본드를 한번 보더니, 반쯤 사정을 눈치챈 듯한 표정이었다.

이어서 본드를 통해 설명을 모두 들은 부관 벤이 무뚝뚝한 얼굴을 슬쩍 찌푸렸다.

“죄송하지만 공작님께서는 현재 출타하셔서 자리에 계시지 않습니다.”

“곤란하네.”

나는 앉은 그대로 고개를 갸웃했다.

이내 싱긋 눈을 휘며 웃었다.

“나는 오늘 꼭 공작님을 봐야 해.”

“……네?”

순간이지만 벤이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미미하게 열이 오른 눈가를 보고 속으로 휘파람을 불 뻔했다.

아무리 봐도 내가 싫다는 기색을 팍팍 풍기는 인간인데, 샤를리즈는 그런 인간마저 순간 홀릴 정도의 외모를 가지고 있었으니까.

“여기서 기다릴게.”

“……대체 이번엔 무슨 꿍, 아니, 무슨 일을 하시려 그러십니까.”

“아무런 일도 안 할 건데…….”

“공작님이 계시지 않는 공작저에 손님을 모실 수는 없습니다. 정말 죄송하지만 다음에 와 주십시오. 오늘 방문은 반드시 공작님께 전달하겠습니다.”

벤이 표정을 굳힌 채로 말했다.

마치 자신이 당황했다는 사실에 화가 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나를 내려다보더니 한마디를 덧붙였다.

“제가 목숨을 걸고 감히 한마디 올리겠습니다. 이 이상 계시면 공작님께서는 공녀님을 더욱 증오하실 겁니다.”

난 움찔했다. 사실 벤은 샤를리즈에게 몇 번이고 비슷한 말을 했고, 샤를리즈는 그때마다 재밌어하며 넘겨 버렸지만 나는 달랐다.

‘……여기서 더 미워하면 안 되지. 음. 안 돼.’

만나기도 전에 호감도를 더 깎을 수는 없지.

나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그래, 알았네. 공작님이 계시지 않을 때 안에서는 기다릴 수 없다는 거지?”

“그렇습니다.”

“좋아. 그럼 바깥에서 기다리지.”

“네, 알겠습…… 예?”

벤이 입을 살짝 벌렸다. 나름 준수하게 생긴 남자라 그런지 얼빠진 얼굴도 나쁘지 않았다.

“설마 바깥에서 기다리면 안 된다는 명도 있었어?”

“아뇨, 그렇진 않습니다만…….”

벤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마치 ‘네가 진짜 바깥에서 기다리겠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맞아, 진짜 샤를리즈라면 하지 않겠지만 나는 조금 급하거든.

파혼을 막아야 한다고.

“그럼 공작이 오면 밖에서 기다린다고 전해 줘?”

나는 미련 없이 툭툭 드레스를 털었다.

털털하게 드레스를 털어 대는 내 행동에 이제는 엎드렸다 일어난 시종인마저 얼빠진 얼굴로 쳐다보고 있었다.

“설명 고마워. 그리고 깽판 쳐서 미안하게 됐어. 끝으로…… 목숨 같은 거 함부로 거는 거 아니야. 진짜 날아가면 후회해도 늦으니까.”

나는 얼빠진 사람들 사이를 걸었다.

사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지만.

‘아, 숙취…….’

약으로 완전히 해소되지 않은 숙취 때문에 머리가 살짝 지끈거렸다.

아니, 주폭 망나니가 알코올 쓰레기가 되다니! 나도 주량 줘, 달라고!

* * *

“……그 여자가 내 저택에 왔다고?”

레무트 공작, 아스킨은 오늘 아침부터 매우 바빴다.

외부로 나가 검토하고 처리할 일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아침보다는 새벽에 가까운 시간에 나갔다가 돌아왔을 때, 아스킨은 달갑지 않은 소식을 접했다.

“크흠, 예……. 지금도 저택 내에 있습니다만.”

“허? 어디에?”

보고를 올리던 벤이 뺨을 긁적였다.

좀처럼 동요하지 않던 무뚝뚝한 부관의 극적인 표정 변화에 차갑던 아스킨도 의문을 느꼈다.

“……정원에, 계십니다. 그, 바깥에서 기다리신다고 하셨습니다.”

“……그 여자가 날 밖에서 기다리겠다고 했다고?”

오늘 외부로 나간 일은 비공식적인 일정이라, 은밀히 밖으로 나왔던 참이었다.

그렇기에 아스킨이 돌아온 통로 또한 후문이었고 정원에서 대기하던 샤를리즈는 돌아오는 아스킨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물론 아스킨 또한 저택 앞쪽 정원에 있는 샤를리즈를 보지 못했다.

“대체 그건 또 무슨 패악을 부리려는 거지?”

“글쎄,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공작님…….”

아스킨은 아름다운 낯에 미간을 살풋 찡그렸다.

샤를리즈 그 여자가 자신을 밖에서 기다린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됐어. 어차피 무슨 꿍꿍이가 있어 변덕이라도 부리는 거겠지.”

그 여자는 피부가 타는 것이 싫다며 세 보 이상 걷기조차 아니하고, 바깥에는 항상 양산을 드는 시종과 자신을 안을 기사를 동행했다.

심지어 볕이 드는 것이 싫다며 제 응접실에 검은 커튼을 두른 것은 유명한 일이었다.

제 발로 잘 걷는 것조차 않는 여자가 이런 날씨에 바깥에서 자신을 기다린다?

“분명 자길 대신할 불쌍한 하녀를 하나 데려다 두고 자기가 기다린 거나 다름없다며 우길 작정이겠지.”

“저, 그것이……. 공작님.”

“왜?”

벤이 난감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직, 정원에 본인이 앉아 있습니다…….”

“뭐?”

벤이 창문에서 볼 수 있을 거라며 창문을 가리켰다.

아스킨의 집무실이 있는 층은 3층이었다. 아스킨이 성큼 걸어 창문 앞에 도달했다.

허? 정말이었다.

창문 아래로 시원하게 펼쳐진 정원의 풍경 아래, 아스킨은 어렵지 않게 샤를리즈를 발견했다.

그도 그럴게 녹빛의 풍경 속에서 홀로 분홍색을 품고 있으니 찾기 어렵지도 않았다.

화려한 드레스는 마치 수풀 사이에 핀 꽃 같았다.

분명 본인이었다.

이 나라에서 신성하게 여겨지는 저 머리색은 아무도 흉내조차 내지 못할 테니까 말이다.

“……대체 무슨 꿍꿍이지?”

아스킨은 증오하는 자신의 약혼녀를 바라보다 곧 결론을 내렸다.

‘정원을 모두 망쳐 버릴 심산이군.’

지금까지의 샤를리즈의 만행으로 미루어 보아, 그녀가 손을 댄 것들은 모두 망가진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아스킨 자신이 지나치게 튼튼했을 뿐…….

“아리아는?”

“방 안에 계십니다.”

“그럼 됐어.”

아스킨이 차갑게 돌아섰다.

“무슨 짓을 하든 그냥 내버려 두도록.”

사실 저택의 정원은 그의 하나뿐인 여동생이 아끼는 공간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저 악녀의 손이 닿는 순간 분명 어떤 방법으로든 망가질 테니까.

아쉽지만 망가지는 것이…… 자신의 소중한 여동생이 아닌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 판국이었다.

한 가지 걱정인 것은 아리아가 거주하는 건물이 정원과 가깝다는 점이지만, 샤를리즈가 그 성격에 허름한 건물에 들어갈 리가 없었다.

초라한 것을 보면 제 눈도 초라해진다 믿는 여자였다.

아스킨은 남몰래 이를 꾹 깨물었다. 어차피 이것도 조금만 참으면 끝이었다.

끝이 머지않았으니까.

“저, 공작님…….”

“뭐지?”

“그, 저 여자가 말입니다. 그, 오늘은 조금 이상했습니다만…….”

“그게 어땠다는 거지? 언제는 이상하지 않았던 적이 있나?”

“…….”

벤이 조금 난감한 표정을 보였다. 주군의 말은 옳지만 오늘 유달리 이상했던, 아니 평소와는 달랐던 모습을 떠올리면 벤은 기분이 아주 살짝 미묘해졌다.

“중요한 일인가?”

“……아닙니다.”

하지만 제 주군의 말처럼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공작님……. 공녀가 현재 3시간째 바깥에서 공작님을 기다렸습니다.”

그 말에 아스킨이 처음으로 멈칫했다. 이도 잠시 서늘한 표정으로 돌아섰다.

“그리고 음, 벤치에 앉아서 일어나질 않는데. 내버려 두는 게 좋겠지요?”

“…….”

“예, 내버려 두겠습니다.”

아스킨이 창문에서 떨어졌다.

“……개 버릇 남 못 주는 법이지. 여행지에서 새로운 난장판이라도 연구한 모양이겠지.”

그러고는 책상 앞에 앉았다.

같은 시각, 레무트 공작가 사람들이 각기 다른 층에서 저마다의 미묘한 표정으로 흘끔 훔쳐보는 샤를리즈는…….

기다리다 지쳐, 앉은 채로 곤히 잠들어 있었다.

* * *

‘으으, 배 아파……. 머리 아파…….’

나는 고통에 못 이겨 슬쩍 눈을 떴다.

그러다 해가 저물기 시작한 날씨를 보고서 깜짝 놀랐다.

‘세상에,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거야?’

벌떡 일어나려다가 아야야, 소리를 내며 다시 누웠다.

분명 앉아서 졸았던 것 같은데, 어느새 벤치에 편하게 드러누운 자세였다.

이렇게 쓰게 될 줄은 몰랐지만 폭신한 숄이 아주 좋은 이불이 되어 주었다.

그렇다고 편한 건 아닌지라 목이 뻐근하고 허리도 지끈거리고 배가 살살 아파 왔지만.

‘아이고오, 이게 다 무슨 짓이냐…….’

나는 현타가 왔다.

다른 세상에서 눈을 뜨면 보통 좀 다들 등도 따시고 배도 부르고, 어? 즐거운 일만 가득한 거 아니었어? 내가 읽은 책들은 다 그랬는데, 난 왜 이렇냐고.

‘심지어 집안은 좋은데 주어진 목표가 너무 힘든 거 아니냐고.’

내 돈을 다시 되찾는 여정이 참으로 고되기도 하구나. 아니야, 이제 시작일 뿐이잖아?

쉬울 거라 생각하지도 않았고.

돈 많은 백수가 되는 길은 멀고도 험한 거라 생각하자.

“끄응…….”

나는 가까스로 몸을 일으켜 상체를 기대고 앉았다. 가슴을 툭툭 두드렸다.

속이 답답했다. 으으, 망할 숙취……. 토할 것 같아…….

왜 뒤늦게 속이 울렁거리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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