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10/194)

9화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누군가 우르르 다가왔다.

어디에 있었던 것인지 모를 기사들이었다.

나는 나를 둘러싼 남자들을 보며 눈을 깜빡였다.

눈이 마주친 이들마다 다른 시종인들이 그랬듯 두려움에 차 있거나 당혹스러운 표정들이었다.

“아, 앉아 주십시오, 공녀님!”

“고, 공작님께서 이 자리를 벗어나지 못하도록 지시하셨습니다.”

나는 난감함을 느꼈다. 음, 약혼자님이 날 다루는 방식을 알 만하구먼.

그 약혼자님이 그렇게 명령했다니 꼭 지키고 싶은데…….

‘으으, 어지러워…….’

문제는 몸이 따라 주질 않았다. 우욱, 곧 치미는 무언가를 느끼고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자 기사들이 다가왔지만 내가 의도치 않게 노려보자, 차마 나를 붙잡지 못하고 주춤 물러났다.

와, 나는 아무것도 안 했는데 물러나네? 신기하긴 했지만 이럴 때가 아니었다.

‘약혼자님의 집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잃을 수 없다!’

토가 치미는 속을 꾹꾹 눌렀다.

한 발짝 떨어져 있는 기사들 뒤로 어떤 건물이 보였고. 그곳의 문이 활짝 열려 있는 것이 보였다.

내가 한 발 내딛자, 기사들이 움찔하며 내 보폭에 맞춰 정확하게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내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비켜.”

“고, 공녀님, 안 됩니다……!”

“한 번만 더 내 앞길을 막으면 못 볼 꼴 보게 될 거야. 난 분명 말했어.”

저 사람들 눈에 난 미치기 3초 전쯤 모습으로 보이지 않을까.

아니나 다를까 기사들은 이미 초점을 잃어 가는 내 눈빛에 희생양이 되기 싫어 서로 눈치만 볼뿐 나를 말리지 않았다.

지금이다! 나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속사정 때문에 기사들을 밀쳐 내고 구원의 문을 통해 복도를 달렸다.

나는 속으로 치미는 자괴감을 느꼈다. 이게 뭐야, 다음엔 절대, 절대 술을 안 마신다! 마시면 내가 개다, 개!

난 다음에 왈왈 짖을 근미래를 미처 알지 못하고, 가까스로 찾아낸 화장실로 들어갈 수 있었다.

물론 안에 있던 하녀를 의도치 않게 쫓아내기도 했다.

‘후…… 살 것 같다…….’

다행스럽게도 신이 내 존엄성을 지켜 주려는지, 토는 나오지 않았고 헛구역질 열 번 정도로 끝났다. 속은 매우 쓰렸지만. 그러고 보니 아직 한 끼도 먹지 못했잖아?

“……그런데 여긴 어디지?”

나는 화장실에서 나와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저 정원에서 제일 가까운 건물로 들어온 건데…….

들어갈 때는 부관을 만났던 본관이라고 생각했지만, 창문 너머를 보니 그건 아닌 것 같았다.

내가 총집사와 부관을 만났던 본관이 창문으로 보였으니까. 그럼 여긴 어디지?

본관도 공작가라기에는 조금 초라한 면모가 있었지만 그래도 평범한 귀족가와 견줄 정도는 되었다면, 여기는 더욱 허름한 느낌의 건물이었다.

그럼에도 살뜰하게 관리가 되고 있다는 느낌이랄까.

그래, 표현하자면…….

‘돈이 없어서 리모델링은 못 해도 정성스럽게 관리한 느낌이네.’

삭막하기 그지없던 본관 복도와 다르게 이곳은 곳곳에 귀여운 팬지 꽃이라거나 아기자기한 패턴이 들어간 꽃병이나 장식물을 드는 둥, 신경 쓴 티가 물씬 풍겼다.

나는 두리번거리며 걸었다.

‘아까 어지러운 상태에서 정신없이 달려온 탓에 어디로 들어왔는지 잊어버렸단 말이지.’

그놈의 술을 먹지 말았어야 했는데, 골고루 하는 기분이었다.

아까 당황한 기사들이 쫓아오는 것도 같았는데, 나를 놓친 건가?

분명 약혼자님이 이 상황을 유쾌하게 여기진 않을 것 같으니 얼른 출구를 찾아야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막 모퉁이를 돈 순간이었다.

툭.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웬 소녀가 보였다.

샤를리즈보다 한참은 어려 보이는 청순한 인상의 소녀였다.

아니, 그냥 청순한 정도가 아니었다.

‘와, 겁나 미인……!’

아직 10대로 보임에도 엄청난 미모를 가진 소녀였다.

거기다 바닥에 떨어트린 건 다름없는 하얀 꽃이었는데, 손에도 들고 있는 저 꽃이 새하얀 은발과 너무나도 잘 어우러졌다.

경악한 얼굴과 눈이 마주친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 은발에 푸른 눈……. 설마 저 사람.’

남주의 여동생인가? 아니, 여동생이구나. 잠깐의 딜레이가 있었지만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아스킨의 여동생 아리아.

아스킨이 커다란 빚을 진 이유이자, 유일무이한 가족이자 보물, 하나뿐인 여동생.

하지만 불치병에 걸려 언제 죽을지 모를 가엾은 소녀.

모든 수식어가 스쳐 지나가는 동시에 유쾌하지 못한 기억도 떠올랐다.

‘저 옷, 기억난다…….’

이전의 샤를리즈는 아리아에게 이렇게 말했다.

“공작은 동생을 별로 사랑하지 않나 봐? 이런 구질구질한 옷을 입도록 허락한 걸 보면.”

나는 떠오르는 기억에 괴로워졌다.

음, 샤를리즈가 아리아를 많이, 끙, 괴롭혔지……?

불안함에 시선을 돌리면, 아리아가 흐끅! 딸국질을 시작했다.

그렇지 않아도 하얗다 못해 창백해진 얼굴로 뚝뚝 떨어지는 식은땀이 보였다.

“아, 고, 아, 으, 공녀님을 뵈, 뵙…….”

“아, 저기!”

그렇게 겁먹지 않아도 된다고, 울지도 말라고 말해 주고 싶었다.

그러나 내가 입을 여는 순간 더욱 사색이 되는 바람에 내 목소리가 그대로 멈췄다.

“으, 이, 인사를, 드려, 드려야…….”

패닉이 온 아리아가 그대로 툭 쓰러졌다.

나는 깜짝 놀라 아리아에게 다가갔다.

“저기, 아무도 없어요? 아무도 없어? 사람이 쓰러졌는데……!”

색색, 거칠게 숨을 내쉬는 모습이 심상치 않았다. 어떡하지? 어떡해……!

이대로 두고 사람을 불러와야 하는 것인지, 혼란이 오는 순간 다행스럽게도 타다닥, 발소리가 들렸다. 기사들이 내 목소리를 듣고 쫓아온 듯했다.

“손대지 마십시오!”

가장 앞에 서 있는 남자는 아스킨의 부관인 벤이었다.

나는 깜짝 놀라 아리아의 뺨에 가져다 대려던 손을 물렸다.

기사들이 하나같이 사나운 얼굴로 나를 에워쌌다.

검을 뽑지만 않았을 뿐 금방이라도 나를 찌르고 싶은 것처럼 살벌한 얼굴이자, 꺼지라는 표정들이었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얌전히 일어나 물러났다.

그리고 그들 중 가장 사나운 분노를 품은 벤이 짓씹으며 말했다.

그 와중에도 애써 정중함을 지키려 드는 목소리였다.

“돌아가십시오, 당장.”

“…….”

“……제발, 돌아가 주십시오. 제발.”

나는 입을 달싹였다.

“아니면, 기어코…… 아가씨까지!”

그 말에 나는 하려던 말을 꾹 참고 뒤로 물러났다.

아리아를 안타깝게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미안해요. 하지만 나는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그러나 사나워진 이들에겐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어쩌다 이 몸에서 눈을 떠 가지고. 나는 속으로 침음을 삼키며 돌아서서 그대로 근처 문으로 나왔다.

걷는 동안에 억울함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아니, 내가 이 몸에서 눈을 뜨고 싶어서 눈을 뜬 것도 아닌데. 대체 이 악녀의 업보는 왜 전부 내 차지란 말이더냐!

업보로 배가 부르다 못해 내 목줄을 잡아 그대로 켁 조여 오는 것만 같다.

터덜터덜. 힘 빠진 걸음으로 내가 본래 있었던 벤치로 돌아왔다.

벤치에 도착했을 때, 나는 낯선 사람을 마주했다.

아니, 커다란 덩치와 얼굴을 마주한 순간 낯설지 않은 사람임을 느꼈다.

내 약혼자, 아스킨 레무트 공작이었다.

“……공녀.”

나도 모르게 입을 살짝 벌렸다.

……어떻게 이 미모가 바로 떠오르지 않을 수가 있었지?

눈과 같이 새하얀 은발이었다. 그 아래로 짙은 눈썹과 움푹 솟은 콧날.

신이 조밀하게 빚어 창조했다고 믿을 만큼 아름다운 낯이었다.

비록 나를 보는 저 눈에는 얼어붙을 것 같은 차가운 냉기와 차갑게 일렁이는 분노가 가득 담겨 있었지만.

나는 본능적인 두려움에 주춤 물러났다가도 저 얼굴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와, 이 사람이 약혼자님이야? 진짜, 진짜 잘생겼다.’

이 소설에는 애석하게도 얼굴은 잘생겼지만 성격은 파탄이 나 버린 남자들.

소위 말하는 ‘예쁜 쓰레기’라 불리는 이들이 산재했다.

대표적인 예가 이미 마주했던 샤를리즈의 오빠이자 남자 주인공인 폭군 록시디언.

하지만 아스킨 레무트는 드물게도 아니, 거의 유일하게도 미모와 함께 인성을 갖춘 인물이었다.

정의를 수호하며 금욕적이고 신실하며 자신의 울타리에 있는 이들은 죽어도 지키는 정의의 사도 같은 자.

그렇기에 이 피폐 소설에는 맞지 않아 남주는 되지 못했지만.

‘……혼전 순결주의자라 그런 게 더 큰 것 같지만.’

독자들이 ‘작가님, 대체 먹여 주지도 않을 거면서 왜 만드셨나요!’ 아우성이 한가득했을 정도의 캐릭터였다.

다만, 이 남자가 단 한 명. 유일하게 이성과 도덕을 무시하고 싫어하고 끔찍하게 증오하는 이가 있다면 바로, 나. 샤를리즈였다.

책 속 설정은 더는 말하지 않아도 아리도록 느껴졌다.

내 얼굴을 찢어 버릴 것 같은 저 남자의 차가운 시선에서 말이다.

“그 가증스러운 얼굴로 드디어 내 여동생을 죽이러 왔나?”

“네? 아니, 뭐?”

“수 쓰지 마라.”

아스킨이 한 걸음 다가왔다. 흔들리는 은발에 나도 모르게 시선을 빼앗겼다.

“이번에야말로 내 여동생을 죽일 셈이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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