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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11/194)

10화

일그러지는 얼굴마저 잘생겼지만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쉽사리 무시할 게 아니었다.

정말 나를 죽일 것 같은 기세로 다가왔으니까.

잠깐, 잠깐, 이대로 죽는 건 아니지?

“아니, 아니야. 나는 아리아를 죽일 생각은…….”

“거짓말하지 마라. 네 말을 믿으라고?”

“…….”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여기서 나를 믿으라고 하려면 근거가 필요한데.

여기서 질문, 샤를리즈가 근거를 마련할 수 있는 사람인가?

‘아니지.’

나는 말문이 막혔고, 이는 그리 좋은 결과를 낳지 않았다.

“지금까지 나는 무수히 참아 왔다. 그래, 참을 수밖에 없었지. 네가 패악을 부려도, 네가 내 시종인을 괴롭혀도, 내 기사들을 망할 연회에 끌어들여도, 심지어 내 선조를 낮잡아 보고 아리아에게 모욕을 주었을 때도!”

어, 저기요. 약혼자님? 그, 화나신 마음 정말 이해합니다.

이해하는데요…….

“대체 어디까지 참아야 직성이 풀리는 거지? 그 버릇을 개 못 주고 기어이 내 여동생을 죽이려 한 건가!”

저는 그 사람이 아닌데요. 알맹이가 걔가 아닌데요……!

속으로 입을 뻐끔뻐끔 움직였지만 소리를 낼 순 없었다.

‘입이 안 움직여…….’

나도 모르게 난 그 사람이 아니다, 하고 말을 하려 했다.

그런데 왜인지 입이 딱풀로 붙여 놓은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설마, 진실을 말하려고 하면 자동으로 차단되는 거야?

이 무슨……. 이럴수록 나는 그 양피지의 내용이 진실이며 정말 신이 그걸 보냈다는 사실이 뼈저리게 느껴졌다.

1퍼센트의 의심이 남아 있었다면 그마저 사라진 상황이었다.

어쨌거나 이 잘생긴 약혼자님은 껍데기 속에 누가 있는지도 모른 채 화를 내고는 숨을 골랐고, 숨을 고른 모습마저 잘생겼지만…….

절대 들려선 안 될 말을 뱉고 말았다.

“파혼해.”

잠깐, 잠깐만!

게임을 시작했더니, 시작하자마자 ‘게임 오버’란 글씨를 본 기분이었다.

잠깐만요, 잠시만요, 잘생긴 약혼자님? 나 아직 아무것도 안 했는데. 진짜 아무것도 안 했는데!

“잠깐, 잠깐만.”

“잘됐군. 얼굴 보고 할 생각은 없었지만 네 외조부가 도통 받아들이질 않으니.”

“잠깐만!”

다급하게 손을 내밀자, 처음으로 아스킨의 말이 멈췄다.

“미안해. 일단 무단으로 들어와서 정말 미안해요.”

“……뭐?”

내 말에 나를 보는 시선에 약간의 당황이 어렸다.

“그런데, 일단 이것 하나만. 제발 한마디만 들어 주면 안 될까요?”

“…….”

“나, 아리아에게 아무 짓도 안 했어.”

아, 잘못 꺼냈다. 말을 꺼내는 순간에 든 생각이었다.

아리아, 이름이 나온 것만으로 아스킨의 얼굴에 당황은 사라지고 순식간에 차갑게 변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차가운 얼굴에서 얼굴과는 정반대의 말이 흘러나왔다.

화색을 띠며 올려다본 것도 잠시.

“그래, 믿지.”

“……정말?”

“오늘은 아니겠지만, 언젠가는 죽일 생각이었을 테니.”

“…….”

오, 샤를리즈야. 도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저 남자가 저렇게 믿고 있냐. 어떻게 수습하란 말이냐!

“곧 정식으로 파혼장을 넣을 거다. 황실로도 소식이 가겠지.”

“잠시만……. 알았어. 알았으니까…….”

“내가 더 할 말은 없어. 네 저택으로 당장 돌아가.”

나는 울상을 지었다. 이걸 대체 어떻게 풀어서 또 어떻게 꼬시라는 건데.

일단 기다려 보자. 이 남자가 파혼을 이야기한다는 건…….

‘알츠베이트에게 진 빚은 어떻게 하려는 거지?’

일단은 파혼을 하고서, 다시 약혼을 하는 방법도 있지 않을까?

딱 이렇게 생각했을 때였다.

심장이 지끈 아파 왔다.

“욱……!”

심장을 안고 무너지는 동시에 나도 모르게 아스킨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고개를 들면 찡그린 아스킨의 표정이 보였다.

“이건 대체 무슨 수작이지?”

“……수작, 윽, 아니…….”

너무 아파서 발음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뭐야, 뭔데. 왜 아픈 건데!

그 순간 머릿속에 누군가 속삭이는 것만 같았다.

[파혼 시, 당신은 사망!]

[~중요 사항을 깜빡한 신으로부터~]

이대로 파혼하게 되면 죽는다고?

뭐야, 그런 말은 없었잖아.

나는 심장을 꾹 부여잡았다. 그렇다면 이 고통은 파혼이 코앞이라는 소리인가? 이 남자가 정말로 파혼을 생각하고 있다는 거지?

나는 입술을 꾹 참았다.

보이진 않지만 내 얼굴이 고통으로 새하얘졌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정말로, 하아, 해 끼치려고 온 거 아니야. 오늘은.”

“…….”

일단 오해부터 풀고 싶지만 딱딱해진 아스킨의 얼굴은 풀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어쩔 수 없지. 일단 이 남자를 어떻게든 붙잡아야 한다.

“해, 해 줄게. 파혼.”

“……허?”

차가운 얼굴 위로 불신이 떠올랐다.

해 준대도 믿지 못하는 얼굴 좀 보게?

고통이 찾아오는 중에도 어처구니가 없어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이 남자를 붙잡으려면 하나를 공략해야 할 것 같다.

이 수단은 치사해서 안 쓰려고 했는데.

“파혼해 줄 테니까, 지금 당장 돈을 줘. 당신이 나와 약혼하면서 우리 집에서 빌릴 수 있던 그 돈. 모두 지불해 줘. 그럼 바로 파혼도 해 주고 여기서 나갈게.”

그 순간 고통이 일순간에 사라졌다.

고개를 들면, 오……. 나를 아주 혐오하듯 바라보는 잘생긴 얼굴이 있었다.

잘생긴 사람은 뭘 해도 그림이 된다더니, 차갑게 노려보는 얼굴조차 싫지 않았다.

‘파혼이 멀어진 건가?’

심장이 아프지 않은 걸 봐선 그런 게 아닐까 싶었다.

아스킨의 얼굴로 아주 잠시 당황이 스쳤다.

“……조만간 줄 테니, 당장 돌아가.”

서늘한 목소리 속 짐승의 짖음처럼 억눌린 분노가 느껴졌다.

“아니, 돈을 못 받으면 여기서 한 발자국도 못 움직여.”

“뭐?”

“돈 줘. 돈 줘. 당장 줘. 빨리.”

나는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다.

고개를 들면 당황하다 못해 황당한, 당혹마저 느껴지는 얼굴이 보였다.

나는 싱긋 예쁘게 웃었다.

“돈 안 주면 파혼 안 해. 여기서 안 움직일 거야.”

일단 지금은 이것만이 방법이다.

아스킨이 예쁜 눈썹을 꿈틀 움직이더니 무어라 말을 꺼내려는 순간이었다.

“공작님!”

멀리서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시선을 돌리면 그의 부관인 벤이었다.

그가 주저앉아 있는 나를 이상하게 한번 쳐다보더니, 얼른 입을 열었다.

“아리아 아가씨께서 일어나셨습니다!”

“하…….”

“아가씨는 크게 아프신 곳은 없으셨습니다. 일단 의사도 불러 두었고…….”

“가지.”

“네!”

아스킨이 막 다급하게 걸음을 옮기려다 멈칫했다. 나와 시선이 마주쳤다.

“돈 안 주면 여기서 안 움직일 거야.”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뭐가 됐든 네 뜻대로는 되지 않을 테니까.”

“응.”

돌아서서 멀어지는 뒷모습에 대고 말했다.

“나, 당신이랑 잘 지내보고 싶어. 진심이야.”

내가 무어라 씨불이든 갈 길 가겠다는 등이다.

나는 속으로 어색하게 웃었다.

‘샤를리즈를 대신해서 내가 한 일은 모두 미안하다고 사과해야 하나.’

내 탓은 아니지만. 당신들이 얼마나 힘들었는지는 잘 안다.

하지만 역시나 내 입장에선 억울하다. 나는 왜 이 몸에서 눈을 떠서?

‘……사과로 해결되는 일이 아님을 알아.’

내 업보는 아니지만. 앞으로 내가 짊어지게 될 것 같으니까.

껍데기를 뒤집어쓴 자로서 사과해야 하는 걸까.

눈을 지그시 감았다.

* * *

아스킨은 정원을 벗어나고서야 소리 내어 숨을 내쉬었다.

‘대체 무슨 꿍꿍이인 건지.’

조금 전 제 약혼녀, 곧 파혼할 여자가 보인 기행에 머리가 지끈 아팠다.

샤를리즈 알츠베이트는 결코 방심해서는 안 될 여자였다.

왜인지 오늘 평소 같지 않다는 벤의 말을 실감했다. 확실히 평소와는 달랐다.

하나, 지금은 경계심을 늦추도록 연기하고서 어떤 뒤통수를 칠지 모를 일이었다.

걷는 동안 샤를리즈의 얼굴이 지워지려나 싶었더니, 이상하게도 오늘따라 그 짜증 나는 얼굴이 유달리 오래 떠 있었다.

그러나 곧 여동생을 향한 걱정으로 인해 그 여자의 얼굴을 머리 한구석으로 밀어 내는데 성공했다.

“오빠!”

문을 열자, 여동생 아리아가 그를 불렀다.

아스킨은 들어가기 무섭게 얼른 여동생에게 달려갔다.

“아리아.”

그의 여동생 아리아는 본관이 아닌 다른 건물에서 지냈다.

여동생이 정원을 좋아하는 탓에 정원으로 나가기 좋은 건물을 아리아에게 주었으며, 여윳돈이 생기는 족족 이 건물을 보수하거나 안전을 지키는데 사용되었다.

“괜찮아?”

“응, 아하하…….”

아스킨은 어색하게 웃는 여동생의 어깨를 살짝 잡고 이리저리 살펴보기 바빴다.

“아리아, 솔직하게 말해도 좋다. 그 여자가 또 무슨 짓을 했지? 이번에야말로 네 손가락을 날려 버리려고 했나? 아니면 머리카락을 수집하겠답시고, 또 자르려 들었나? 아니면…… 설마 네 옷을 두고 또 모욕을 주기라도…….”

“오빠, 오빠. 진정해.”

아리아가 숨도 쉬지 않고 말하는 아스킨의 옷자락을 살짝 쥐고 흔들었다.

언제나 냉철하고 정의로우며 합리적인 오빠였지만 단 하나, 아리아 자신의 일에만은 이성을 유지하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렇게 자신의 일에만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걸 알았다.

“말하거라. 대체 그 여자가 이번엔 어떤 패악을 떨었지?”

이게 다 샤를리즈 알츠베이트의 업보였다. 그녀가 남매에게 드리운 상흔은 깊었다.

하지만…….

“아냐, 아냐, 오빠.”

아리아가 고개를 저었다.

“복도에서 갑자기 공녀님과 마주쳐서…… 순간 너무 놀라서 쓰러진 거고, 공녀님은 아무런 잘못을 하지 않으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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