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아리아의 말에 아스킨은 얼굴을 찌푸렸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 여자가 아무런 말도 아무런 짓도 하지 않았다니?
“아리아, 넌 다시는 거짓말하지 않기로 약속했어. 다시 한번 물을게. 정말 그 여자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응…….”
“아무런 말도?”
“응……. 아무것도 하지 않으셨어.”
아리아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자신의 옷자락을 꾸욱 쥐었다.
‘오히려…….’
자신이 덜덜 떨자, 더욱 놀라는 얼굴을 하던 모습.
아리아는 샤를리즈에게서 처음 본 모습에 혼란스러웠다.
“저기, 아무도 없어요? 아무도 없어? 사람이 쓰러졌는데……!”
쓰러진 순간에 바로 기절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다급하게 사람을 찾는 샤를리즈의 목소리를 들었다.
이상했다.
그건 샤를리즈 알츠베이츠가 절대 하지 않을 행동이었다.
“잘 모르겠어. 하지만 오빠, 공녀님은 정말로 아무런 행동도 말도 하지 않으셨어.”
“…….”
잠시 말이 없던 아스킨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하지 않은 거겠지.”
아리아의 옆에는 공작가의 주치의인 게리가 정중하게 서 있다가 아스킨과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아리아는 괜찮다는 소리였다.
“아가씨께서는 괜찮으십니다, 공작님. 그저 놀라서 기절하신 것뿐입니다.”
의사인 게리가 이렇게 말했지만 아스킨은 믿지 못했다.
그러나 이건 아스킨의 고질병인 염려증이었고, 스스로도 잘 아는지라 더는 말하는 대신 아리아의 머리를 쓰다듬을 뿐이었다.
“다치지 않았다면 다행이고. 곧 그 여자와는 파혼할 테니, 조금만 더 기다려 줘.”
“……응.”
아리아는 혼란을 가라앉히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오늘 본 샤를리즈의 모습은 잘못 본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 * *
이튿날.
아스킨은 드물게도 다소 늦은 오전에 눈을 떴다. 전날 저택을 뒤집어 버린 샤를리즈 그 여자의 만행에 분노를 다스리느라 늦게까지 일을 한 탓이었다.
‘얼마 남지 않았어. 빚을 갚을 수단을 마련하는 것.’
어제 그 여자가 뻔뻔하게 돈을 내놓으라고 할 땐 저도 모르게 당황해 버렸지만, 곧 돈으로 휘둘릴 날도 끝인 날이 다가올 것이다.
“제 손을 언제든 잡아 주십시오, 각하.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아스킨은 자신에게 손을 내밀었던 협력자를 떠올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복도로 나갔을 때, 왜인지 복도가 다소 소란스러웠다.
레무트 공작가는 이름만 공작가일 뿐아리아의 치료로 수없이 많은 돈을 쓰는 탓에 시종인의 숫자가 매우 적었다.
그런데 아스킨은 왜인지 지금 이 복도에 그 적은 숫자의 시종인이 전부 복도에 모인 듯한 기분이 들었다.
“무슨 일이지?”
“아, 공작님……!”
화들짝 놀란 사람은 이 저택에서 일하는 고참 시종이었다.
평소 경력직답게 유쾌하면서도 맡은 바 충실한 사람이었건만, 어째서인지 그의 얼굴에는 당혹과 경악, 불유쾌한 흥미가 어려 있었다.
“저, 공작님, 일어나셨습니까.”
당황한 고참 시종을 대신해 대답한 사람은 총 집사 본드였다.
“당혹스러우시겠지만, 공작님께서 아셔야 할 것이 생겼습니다…….”
“뭐지?”
알아야 할 것? 본드가 곤란한 표정으로 말하는 것보다는 직접 보는 것이 나을 거라며 아스킨을 안내했다.
그리고 아스킨은 놀라운 광경을 보았다.
‘저건…….’
저택 앞 정원 옆으로는 드넓은 길이 있었다. 그곳은 마차 두 대가 서 있어도 충분할 만큼 넓었는데, 현재 그곳에는 마차가 하나 서 있었다.
그 앞으로 어디서 가져온 건지, 안락의자에 편안히 앉아 찻잔까지 들고 있는 샤를리즈 알츠베이트의 모습이 보였다.
아스킨은 그 어떤 일에도 평정을 유지해 왔지만, 이 순간만큼은 저도 모르게 살짝 입을 벌렸다.
‘지금 내가 뭘 보고 있는 거지?’
저 번쩍번쩍 윤기 나다 못해 사치스러운 마차는 알츠베이트의 깃발을 달고 있으니, 잘못 본 것은 아니요. 꿈을 꾸는 것도 아니었다.
아스킨은 자신의 얼굴을 쓸어내리며 신음을 흘렸다.
“저건 대체 무슨 미친 짓이란 말인가…….”
“…….”
평소 보통 미친 여자가 아니라고 생각해 왔지만, 생각해 보면 샤를리즈는 ‘악독함’에 있어 혀를 내두를 수준이었지.
술 먹고 패악, 악한 짓을 제외하면 오히려 맨 정신일 땐 자신이 가장 교양 있는 줄로 믿고 있는 오만하고 자존심 강한 여자였다.
상식을 넘나드는 수준의 미친 여자는 아니었다.
‘설마.’
“돈 안 주면 파혼 안 해. 여기서 안 움직일 거야.”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뭐가 됐든, 네 뜻대로는 되지 않을 테니까.”
그 소리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인 결과란 말인가?
아스킨은 이것이 자신이 한 대답에서 일어났다고 믿고 싶지 않았다.
앓는 소리를 내는 것도 아주 찰나였다. 아스킨의 눈으로 분노가 어렸다.
자신과 자신의 가문을 도대체 어디까지 우습게 본 것인지. 우습게 보는 것도 정도가 있다.
“공작님? 공작님?”
아스킨이 그대로 돌아서서 어디론가 향했다. 그가 도착한 곳은 자신의 집무실이었다.
“공작님, 오셨습니…… 어, 공작님?”
“벤. 당장 ‘그 서류’를 가져와!”
아스킨이 자리에 앉았다.
얼마 가지 않아 그의 손에서 유려한 필체로 서신이 하나 완성되었다.
‘빚. 빚을 문제 삼겠다?’
아스킨 레무트가 샤를리즈 알츠베이트와 파혼하기 위해서는 약혼할 때 빌렸던 빚을 갚아야 한다.
하지만 알츠베이트 공작은 이에서 그치지 않고, 파혼할 시 위약금으로 지금까지 받던 이자에서 엄청난 이자를 포함한 금액을 갚아야 한다 으름장을 놓았다.
“저희가 도와드릴 수 있을 듯한데……. 공작님, 저희는 아주 좋은 파트너가 될 것입니다.”
아스킨에게 협력을 제시한 한 가문 덕택에 갚을 길 없던 깜깜한 채무에 빛이 어렸다.
대체 그곳이 무슨 꿍꿍이인지 몰라 손을 잡는 걸 보류해 두고 있었지만, 더는 참아선 안 될 듯했다.
“이 서신을 당장 그곳으로 보내도록. 되도록 빨리.”
“예!”
어제 자신의 여동생을 찾아간 샤를리즈의 행동도 그렇고, 지금 저 모습을 보아하니 이제 상식까지 잃어가는 모습 아닌가!
“그리고 바깥에 진을 친 그 여자는 철두철미하게 감시해. 다신 아리아와 마주치지 못하도록.”
“……네!”
그렇게 샤를리즈 알츠베이트는 레무트 공작저 앞에서 노숙을 시작했다.
* * *
미친 악녀 샤를리즈 알츠베이트가 레무트 공작저 앞에서 노숙한다!
“……라는 소문이 돌고 있다고?”
“네, 네! 공녀님.”
하녀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내 눈치를 슬그머니 보았다.
혹시나 이런 소문을 전해서 내 심기를 거스른 건 아닐까 생각하는 것이 그대로 보였다.
나는 싱긋 웃었다.
“내버려 둬.”
“네?”
“사실이잖아?”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를 훌쩍 마셨다.
‘이야, 경치 좋다.’
이곳 레무트 저택의 풀들은 어쩜 이렇게 예쁘게 푸릇한지.
며칠이 흘렀다.
내가 노숙을 시작한 지 사흘이 흘렀단 소리다.
‘처음엔 문전 박대 당했었지, 아마?’
샤를리즈가 약혼자에게 이틀 동안 문전 박대 당했는데, 독한 년(?)답게 정원에서 노숙한다더라.
‘소문 한번 참 정확하네.’
나는 느긋하게 차를 한 번 더 홀짝 마셨다.
솔직히 노숙은 노숙인데. 정확히는 내가 여기 정원에 머무른다는 소식을 들은 하녀들이 이동식 최고급 마차까지 가져와 줘서 나름 편하게 지내고 있었지 뭔가.
‘마법이란 게 이렇게 좋은 거였다니.’
덕분에 나는 따끈따끈한 차를 마시면서 즐겁게 보내고 있었다.
……노숙은 처음인데 이렇게 즐거워도 되나요?
이렇게 진을 친 지 3일이 넘어간다. 그간 약혼자님을 보지 못했느냐 하면, 보긴 봤다.
내 근처를 지나갈 때 아주 이를 바득바득 가는 얼굴로 지나가더라고.
그 얼굴도 사실 신이 예쁘게 빚은 조각상을 보는 기분이라서 기분 나쁘지 않았다는 게 문제다.
‘……당신도 황당하겠지만 조금만 봐줘. 나도 억울하단 말이야.’
이렇듯 몸은 그럭저럭 편했지만, 마음은 그리 편하지만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파혼을 막아야 하는데……. 딱히 뾰족한 해결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던 것이다.
“파혼해.”
파혼을 외치던 아스킨의 눈빛은 소위 말해 ‘찐’이었다.
순도 100퍼센트의 진심으로 가득했던 얼굴이었지, 아마?
정말로 파혼이 임박했을 땐 아무래도 심장에 고통이 온다는 걸 알았으니.
이러다 정말 파혼하게 되면 꽥 죽는 것이 틀림없고.
‘돈은 어떻게 해결하려고 하는 걸까?’
분명 빚을 해결해야 파혼할 수 있을 텐데.
그 수단이 좀처럼 짐작이 가질 않았다.
알츠베이트 공작가는 비교군이 황실밖에 없을 정도로 대단한 가문이었다.
현금, 황금, 부, 이런 걸로는 둘째라면 서러워할 대단한 가문이자, 뒤에서는 돈 굴리기로 유명한 가문이기도 했다.
‘알츠베이트라서 빌려주는 게 가능했던 돈을 갚기란 여간 쉽지 않은 일일 텐데.’
게다가 내 외조부는 돈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위인이었다.
탐을 내고 있던 아스킨이 자기 손을 떠난다고 느끼면 분명 곱게 빚을 탕감해 주긴커녕 엄청난 이자를 함께 내라고 할 것이다.
어쨌거나 뾰족한 수가 생각나지 않아 이렇게 노숙하는 것 외엔 큰 방법도 수확도 없었다.
‘날이 갈수록 약혼자님의 눈이 더욱 차가워지는 게 느껴진다. 게다가 슬슬 나를 무시하는 것 같은데. 억울하지만…….’
그게 말이죠, 저도 이 몸에서 눈을 뜨고 싶었던 건 아닌데, 제 해피한 귀환을 위해서는 당신이 꼭 필요하단 말이죠…….
‘내게도 이득이면서 그 남자도 이득일 방법은 없을까? 아니, 있긴 있어.’
다만, 그 방법을 쓰려면 저 남자가 조금이라도 나를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원점이었다.
이대로는 저 남자의 화만 돋우는 것 같으니. 정말 결판을 짓긴 해야 했다.
그리고 그날은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