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화 (13/194)

12화

* * *

다음 날.

어째 하늘이 심상치가 않았다.

“비가 올 것 같아요, 공녀님.”

“흐음, 그러네. 아니다, 그냥 먹구름이 낀 것 같지 않아?”

하녀들이 서로를 쳐다보더니 조심스럽게 의견을 말했다.

저도 그런 것 같아요, 그래도 비가 오지 않을까요?

그녀들은 놀랍게도 내가 처음 이 세계에서 눈을 떴을 때보다 훨씬 말이 많아졌다.

언제부터였나 생각해 보면, 아마 하녀들이 내가 노숙한다는 말에 놀라 이동식 마차를 끌고 왔을 때부터였다.

‘사실 이렇게 가지고 와 줄 줄은 몰랐는데.’

그때를 생각하면 놀랍긴 했다.

나는 몰랐는데, 하녀들 사이에서 내 평판이라고 할지.

아무튼 평가가 달라진 건 그 망나니들 모임을 파투 내고 난 다음 날부터였던 것 같다.

그날 내가 숙취 해소 약을 준 하녀에게 탓하기는커녕 선물을 내민 게 인상 깊었던 모양이다.

‘내 말에 끼어들었는데도 관대하게 넘어간 것이 인상 깊은 건지, 아니면 선물 쪽에 관심을 둔 건지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홀로 고군분투하는 곳에서 나를 도우러 와 주다니 기쁘지 않겠어.

게다가 하녀들은 밤이 되어도 자기들끼리 주번제로 돌아가면서 내 시중을 들었다.

몇 번이고 돌아가라고 명했지만 이건 본인들 역할이라고 고집을 부려서 그냥 두기로 했다.

처음엔 내가 아무 말 안 하고 쳐다만 봐도 뱀 앞의 토끼처럼 벌벌 떨더니.

이제는 눈치를 보긴 해도 재잘재잘 떠드는 수준에 이르렀다.

덕분에 나도 마차를 끌고 온 하녀들의 이름을 외웠다.

“음, 저희 할머니께서 이런 날에 오히려 비가 오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어요. 걱정 마셔요, 공녀님!”

이렇게 말한 하녀의 이름은 수잔. 내게 숙취 해소제를 준 하녀이기도 하다.

아무래도 간단한 약 제조를 할 줄 아는 것 같아서 눈여겨보고 있는 사람이기도 하고.

그리고 참으로 애석하게도…… 수잔의 할머니께는 미안하지만 그녀의 말은 정확하게 틀리고 말았다.

쏴아아아아!

휘이이잉-.

창밖에 미친 듯이 비가 쏟아진다.

하지만 창에만 시선을 오래 둘 순 없었다. 천장이 흔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 마차가 무너지진 않겠지?’

오늘도 하녀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차를 마시는 것까진 좋았다.

의외로 내 하녀들도 패션에 관심이 많은지라 현 수도 유행에 대한 여러 이야기들이 참 재밌었고, 시간이 되자 정해진 주번 외엔 다들 돌아갔다.

오늘도 레무트 가문의 기사들이며 시종들이며 나를 무슨 미친X 보듯이 보는 것이 느껴졌지만,

‘미안합니다. 저도 억울한 처지라서요. 이 이상 폐는 안 끼칠게요.’

하는 마음으로 뻔뻔하게 쳐다봐 주었다.

신기한 건 며칠 정도가 흐르자, 100퍼센트 독기와 적의로 가득했던 레무트가 시종들과 기사들 눈에 다른 것이 어리기 시작했다는 거다.

해석하자면, 대체 저 미친 여자가 뭘 원해서 저러는 걸까? 하는 호기심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간에 오늘도 그들의 적의 어린 눈을 뒤로하고 밤이 와, 잠자리에 들었는데…….

커다란 소리에 놀라 눈을 뜨니 지금이었다.

“고, 공녀님, 어떡하죠?”

창밖엔 심각한 비바람이 심하게 치고 있었다.

그냥 비나 아니면 바람이거나. 둘 중 하나라면 차라리 괜찮았을 텐데.

나는 고민에 잠겼다.

‘이건 내 실수네.’

날이 흐린 걸 봤을 때, 혹시 몰라 대비를 했어야 했는데.

너무 안일하게 굴었다.

“공녀님……! 이건 안 될 것 같아요. 지금 저택에 있는 루미와 캐럴에게 연락했어요. 걔들이 지금 마법사들을 부르러 갔으니까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죄송해요…….”

나보다 더 안절부절못하는 하녀의 모습. 오늘의 당번은 다름 아닌 수잔이었다.

그녀는 제 탓이라며 거의 울먹이는 표정으로 고개를 조아리며 애원하고 있었다.

음, 괜찮은데. 그리고 따지고 보면 최종 판단은 내가 하는 거니 내 탓이기도 한 거고.

“수잔, 들려? 난 괜찮아.”

“고, 공녀님, 죄송합니다, 벌을 받아도…….”

“그리고 네가 책임지지 않아도 될 일엔 사과하지 마. 그런 버릇은 좋지 않아.”

수잔이 애원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회사에서 눈물 짓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 나는 내 잘못도 아닌 상사의 잘못을 뒤집어쓰고 모든 잘못을 떠안았다.

모든 판단은 상사가 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세상엔 나쁜 놈이 많지. 너처럼 착한 애가 나쁜 놈 눈에 띄면 네 잘못이 아닌 것도 덤터기 쓰게 되니까, 일단 고개 빳빳이 들어.”

수잔이 울먹이다 말고 나를 멍하니 보았다. 나는 싱긋 웃어 주었다.

“나 같은 나쁜 놈들을 만날 때를 대비해서 틈틈이 연습해 두란 소리지.”

사과가 몸에 배면 좋지 않다.

사실 이렇게 말해도 수잔이 사과가 몸에 배어 버린 건 샤를리즈 탓이니 뭐.

“공녀님…….”

놀라서 나를 보던 수잔의 얼굴이 순식간에 다시 흐려졌다.

“공녀님, 떨고 계세요.”

“아.”

춥긴 춥다.

왜인지 몰라도 밤에도 따뜻했던 곳이었는데, 수잔 말로는 온도 조절 장치가 고장 난 것 같단다.

애석하게도 샤를리즈의 옷은 대체로 얇았고, 평소에는 온도가 따뜻하기만 했기에 담요나 이불도 얇은 실정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천장에서 물도 살짝 새기 시작했다.

‘오, 여기 와서 제일 궁상맞은 느낌인데.’

나는 오들오들 떨면서도 괜찮다는 듯 웃어 주었다.

뭐, 이런 경험이 인생에서 처음도 아니고, 여기 와서도 한 번쯤 경험해서 나쁠 거 없지.

제발 담요를 더 덮어 달라는 수잔의 애원을 슬쩍 무시하고는 너나 덮으라고 던져 줬다.

쯧, 본인도 슬슬 떨고 있으면서 말이야. 사람은 자기 자신부터 챙겨야지.

‘이러다 약혼자님이 나 좀 발견해서 불쌍하게 여겨 주진 않으려나.’

그때였다.

똑똑똑.

이 시간에 들릴 리 없는 노크 소리가 들렸다.

나는 수잔과 한번 서로를 쳐다보았고, 얼른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수잔이 문을 열었다.

어쩌면 레무트가 기사가 아닐까? 기왕이면 약혼자님의 명을 받고 온 기사면 좋겠는데…….

아쉽지만 알츠베이트에서 날 데리러 온 마법사여도 상관없고.

“아…….”

문밖에 있던 이와 눈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어라? 내 눈이 절로 커졌다.

그도 그럴 것이…….

“괘, 괜, 괜찮으세요?”

눈앞에 있는 사람은 아리아. 약혼자님의 여동생이었다.

그녀는 한눈에 봐도 가냘픈 손에 우산을 들고 서 있었다.

이 빗속에? 여길 대체 왜 온 거야?

나를 보는 동시에 파들파들 떨고 있는 모습을 보자니 염려되었다.

이러다 또 쓰러지는 거 아니야? 빗속에 쓰러지면 더 큰 일이지.

게다가 이번엔 약혼자님이 정말로 나를 죽이려 들지도…….

“일단 들어와요.”

“네, 네?!”

“비 오잖아요.”

대체 왜 여길 온 건지 모르겠지만. 저 약한 앨 빗속에 내버려 두는 것도 못 할 짓이지.

나는 약혼자에게 살해당하기 싫다.

단호한 내 목소리에 아리아는 눈치를 보는가 싶더니 눈을 질끈 감고는 마차 안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마차 안은 온도 조절이 전혀 되지 않는 상황.

자리는 넓어서 아리아까지 앉고도 충분했지만, 역시나 예상했던 것처럼 가냘픈 어깨가 파들파들 떨기 시작했다.

여기서 아리아가 쓰러지면 더 곤란해진다!

나는 서둘러 수잔이 덮으라고 주던 담요를 가져와 아리아에게 덮어 주었다.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보았다. 청초하니 새하얀 색 때문인가. 꼭 하얀 눈 토끼 같았다.

귀엽긴 했지만, 님의 건강에 저의 목숨이 걸려 있답니다.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는 아리아의 손을 모른 척하며 담요를 꽁꽁 둘러 주기까지 했다.

“여기까지 어인 일로 찾아왔어요?”

“마, 말, 말…….”

“그냥 들어요. 쓰러지게 한 미안함이라 생각해도 좋고.”

왜 제게 존댓말을 쓰냐고 묻고 싶은 것 같은데, 슬슬 추워지니 일일이 대꾸하기가 귀찮아졌다.

“말만 걸어도 경기하는 것 같은데, 어려우면 대답하지 않아도 상관없어요.”

나는 추위를 조금 줄여 보고자 다리를 꼬고 팔짱도 꼈다.

이 와중에 수잔이 자기 담요를 자꾸 내밀어서 그 담요를 확 뺏어다 수잔에게도 둘둘 감아 주고는 벗으면 확 보직 이동시켜 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놨다.

“주기만 해.”

“공녀니임……!”

“난 이미 감기 확정인 것 같으니, 돈 많은 난 감기 걸려도 돼. 네 걱정부터 해.”

“그, 그래도…….”

“어허, 나보다 돈 많으면 그 담요 나 줘도 되고.”

이 말투는 의도치 않게 샤를리즈식 말투에 적응해 버린 결과였는데, 좀 다정하게 말하려 하면 하녀들이 더욱 겁을 먹더라고.

그래서 며칠 사이 이렇게 굳어져 버렸다.

그게 아니더라도 샤를리즈의 기억이 내게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녀의 말투가 나가곤 했다.

비유하자면 몸이라는 침대 하나에 샤를리즈의 기억이랑 내가 함께 누워 있는 느낌이랄까.

“푸흡…….”

한창 수잔과 실랑이를 벌이는데, 작은 웃음소리가 우리 사이로 끼어들었다.

고개를 돌리니 아리아가 남몰래 손을 모으고 숨죽여 웃고 있었다.

그러다 눈이 마주치고는 화들짝 놀라 파르르 떨었다.

……아니 쟨 저렇게 무서워할 거면서 여긴 대체 왜 온 거야? 놀랄 거면서 웃긴 왜 웃은 거고?

“죄, 죄, 죄송해요. 사이가 좋아 보여서.”

“웃는 걸로 뭐라고 해요? 그게 죄송할 일인가.”

“네?”

아리아가 나를 빤히 보았다. 어쩐지 그녀는 조금 미묘한 표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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