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뭐지? 기억나는 건 딱히 없는데, 설마 웃는 걸로도 샤를리즈가 괴롭힌 적이 있나?
“……고, 공녀님은, 적어도 오늘은 나쁜 사람이라는 생각이 아, 안 들어요.”
“솔직한 감상이네요.”
오늘을 제외하고 나쁜 사람이라니. 아주 옳은 말이다.
오늘을 제외하면 그전엔 다 진짜 샤를리즈였으니까.
“화, 화나셨어요?”
“아니요? 화낼 일이 뭐가 있나요? 사실 화를 내는 것도 에너지 소모인데 뭐 하러요. 그보다 이제 대화가 가능하다면 어쩌다 나를 찾아온 건지 궁금한데, 물어도 돼요?”
아리아의 안색이 그다지 좋아지지 않는 것이, 내가 직접 나가서 레무트 가문 기사를 부르든, 아니면 기다리던 마법사들이 빨리 오든 해야 할 것 같은데.
“……시, 실은, 고, 공녀님이… 여기 계시는 게 제 탓인 것 같아서요.”
“아. 며칠 전에 나를 보고 기절한 걸 말하는 거죠?”
나는 팔을 살살 문지르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생각할 필요 없어요. 그게 아니었더라도 레무트 공작은 뭐가 됐든 화를 냈을 것 같아서 말이죠. 나 싫어하잖아요. 그 사람.”
그러자 아리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입을 달싹였다.
본인도 그건 무어라 변명할 수 없는 진실이라고 토로하는 셈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저 때문에 오빠가 더 화가 난 것 가, 같아서요. 사실 이번만은 공녀님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셨잖아요.”
“괜찮아요. 이해해요. 이번에 하지 않았다고 해서 지난번에 한 일이 모두 잊혀지는 건 아니니까.”
그래서 참 억울하단 말이지.
이 샤를리즈가 저지른 업보를 대체 어떻게 청산하나 하고.
뭐, 돈 많은 백수가 되는 길은 험하겠거니 하고는 있지만.
“…….”
아리아는 좀 전과 같은 오묘한 표정으로 나를 응시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표정이었지만, 주황색 담요를 머리까지 덮고 끙끙대는 모습이 어쩐지 당근에 둘러싸인 하얀 토끼 같아 웃음을 슬쩍 참았다.
남매가 아주 쌍으로 미남 미녀네.
“……제, 제대로 된 대화는 처음 나눠 보지만, 공녀님은 그렇게, 마음속까지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아요.”
뭘 그렇게 열심히 생각하나 싶었더니. 나는 조금 놀란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뭐지, 이 백지에 가까운 순수함은?’
저기요, 고작 담요 덮어 주고 말 좀 높여 주고 몇 번 좋게 말해 줬다고 금세 경계를 풀면 어떡해? 내가 한 짓을 생각해야지!
나는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입은 얌전히 꾹 다물었다.
그래, 사실 나는 다른 사람이니까. 이 예쁜 미인이 나를 좋게 봐주면 아주 좋은 거지.
하지만 나도 양심이 있는지라 한마디를 남길 수밖에 없었다.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내가 전에 했던 짓들을 생각해요.”
아니다, 이 사람은 약혼자님이 어디 가서 얻어맞지 않게 지켜 주겠지.
설마 이래서 여동생 쪽은 아주 순수하고 순박하게 자라게 된 건가? 온실 속 화초처럼?
‘끙, 화초처럼 고이 모시고 싶은 엄청난 미모이긴 한데…….’
“그렇게 쉽게 마음 풀었다가 어디서 호되게 얻어맞아요.”
“그, 그렇게 말씀하시면 더욱 나쁘게는 안 보이는 걸요. 물론 잊은 건 아니지만…….”
다행히 바람은 그칠 기미가 보였지만 비가 더욱 세차게 내렸다.
정 안 되겠다 싶으면 내가 직접 나가서 기사를 부르려 했더니, 이래서야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성싶었다.
감기 걸려도 상관없다고는 말했지만 굳이 자처해서 몸살을 앓고 싶진 않다.
“……밤에 마법등 하나 안 켜 놓네.”
“아, 그건 서, 성에 돈이 없어서…….”
아리아가 그렇게 말하고는 얼굴이 잔뜩 빨개졌다. 곧 울상을 짓는 것이, 그래도 아예 물정을 모르는 아가씨는 아닌 모양이었다.
“나 때문이에요, 나한테 돈이 너무 많이 들어가서…….”
어차피 비가 약간이라도 그치기 전에는 나가기는 글렀고, 이대로 비가 조금 잦기를 기다렸다 나가거나 마법사들이 오기를 얌전히 기다리는 수밖에 없으니.
나는 머리를 쓸어 올렸다.
“글쎄요, 당신 오빠는 당신이 그렇게 생각하길 바라지 않을 것 같은데.”
책 속에서 레무트 공작은 샤를리즈의 악행을 모두 견뎠다.
그러나 그가 결국 폭발해 여주와 손을 잡고 약혼녀를 직접 죽이게 된 계기는 다름 아닌 여동생 때문이었다.
애지중지 소중히 여기던 유일한 가족이 결국 약혼녀 때문에 죽고 말았으니까.
“유일한 가족 아니에요? 레무트 공작이 당신에겐 부모나 다름없는 것 같던데.”
“…….”
“뭐, 이렇게 말하는 나도 부모님이 안 계셔서 어떤 기분인지 알 것 같긴 하지만요.”
나도 샤를리즈도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셨다.
샤를리즈는 자신을 구박하는 건지 모를 오빠라도 있긴 하지만 내 오빠인 윤지훈은 부모님과 함께 죽었다. 이것이 다르면 다르겠다.
“오빠만 있는 거랑 부모님이 한 분이라도 살아 계시는 건 분명 다르긴 하겠죠.”
윤지훈이 살아 있었다면 어땠을까. 그 웬수 같은 오빠도 아마 레무트 공작처럼 나 하나는 건사해 주려고 노력했을까. 그랬을 것 같긴 하다. 그래도…….
“아무래도 오빠가 모든 역할을 할 순 없을 테니까.”
아리아가 머뭇거리다가 살짝 끄덕였다.
“……맞아요, 아! 오빠가 나쁘다는 게 아니라.”
“알아요.”
“오빠가, 제게도 의지해 주면 좋겠어요…….”
의지라. 뜻은 알겠지만 아무래도 의지하기엔 당신 어깨는 너무 가냘프지 않을까요?
내 약혼자님은 당신이 그저 숨 쉬는 것에 감사할 것 같은데. 나는 목뒤를 머쓱하게 문지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오빠가 걱정이면 단 하루라도 더 살려고 노력해요.”
아리아 옆에 털썩 앉았다.
“그리고 미안한데 너무 추워서 안 되겠어요. 담요 뺏지는 않을 테니까. 옆에 조금만 붙을게요. 수잔, 너도 이리로 올래? 온도가 더 내려가네.”
“네, 넷 공녀님!”
졸지에 옹기종기 붙어 앉았다.
순간 이게 뭔가 싶어 난 슬쩍 웃음이 흘러나왔다.
눈을 휘는데,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돌리면 아리아가 나를 빤히 보고 있었다.
“왜요?”
“아, 저! 고, 공녀님의 머리카락이 너, 너무 예뻐서요…….”
아. 이거? 나는 살짝 젖은 머리카락을 들어 올렸다.
생머리는 눅눅한 공기에 추욱 처져 있긴 했지만 평소 관리 덕분인지 이런 공기 속에서도 윤기를 잃지 않고 있었다.
“당신 색도 예뻐요. 은색도 귀한 색 아닌가?”
“저, 저는 머리가 너무 잘 엉켜요…….”
“그럼 머리 스타일을 바꿔 보면 어때요? 조금 잘라 본다거나.”
그래도 살을 담요에 맞대니까 살 만하네.
나는 수잔에게 고개를 돌렸다. 곧 그녀에게서 빗을 가져오게 했다.
“괜찮으면 빗질하는 방법 알려 줘요? 빗질만 잘하면 머리에 윤기가 돌걸요.”
“아…… 구, 구, 궁금해요. 괜찮으시다면…….”
내가 아니고 샤를리즈의 기억에 있던 일이다.
이 악녀는 타고난 미모에 더해 관리도 나름 했던 것 같다. 악독한데 프라이드도 높은 인간이었다.
나는 아리아의 허락하에 그녀의 머리를 잡고 빗질을 시작했는데, 이게 웬걸.
‘많이 엉켰네.’
멀리서 보았을 때 그저 예쁜 색 같던 머리카락은 가까이서 보니 그간 너무 아파서인지 윤기도 하나도 없었고 힘이 없으며 잘 엉켜 들었다.
게다가 눅눅한 공기의 영향을 받은 건지, 머리를 빗을수록 산발이 되어 갔다.
“……저, 공녀님……. 제, 제가 할까요?”
“음…….”
전문가를 옆에 두고 내가 너무 자신만만했나.
나는 머쓱한 표정으로 끄덕이며 수잔에게 빗을 건네고, 아리아에게 사정을 설명했다. 다행히 아리아는 괜찮다며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착하고 순한 아가씨네. 좀 더 친해지긴 어렵나? 친해지고 싶다.
그렇게 나름 화기애애하고 도란도란한 대화 속에 자리를 바꾸는 순간이었다.
벌컥.
불시에 문이 거칠게 열렸다.
“아리아!”
솨아아아. 거대한 빗소리 속에서도 귀청이 터질 것 같이 거칠고 커다란 목소리였다.
나는 숨을 몰아쉬는 커다란 어깨를 가만히 보았다.
아스킨이었다.
그는 빠른 시선으로 아리아를 한 번, 나를 한 번. 우리를 번갈아 본다.
이내 내가 보았던 중에서 가장 큰 분노가 저 아름다운 얼굴에 어렸다.
잠깐, 저 사람 뭔가 오해한 것…….
“지금 내 여동생의 머리채를 잡은 건가?!”
아니야!
나는 억울함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온도가 내려간 곳에서 너무 떨었던 탓일까, 내 몸은 그대로 비틀거렸다.
“아가씨!”
“고, 공녀님!”
다행히 수잔이 내 몸을 잡고 받아 주었다.
그사이 아리아는 자신의 오빠에게 휙 들려 마차에서 내린 뒤였다.
“당장 내려.”
“오빠, 오빠, 잠깐만! 오빠!”
“넌 가만히 있어.”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아니, 상황이 왜 이렇게 된 건지.
일단 해명이 먼저일 것 같아 마차에서 얌전히 내려왔다.
오해할 만한 정황이라고 생각했고, 충분히 이해해서 말을 하려 했다.
그저 설명하기 위해 손을 뻗었을 뿐인데. 그냥 이 남자의 옷자락 한번 잡고 설명 좀 들어 보라고 말이다.
“당장 내 성에서 나가!”
그러나 내 손이 거칠게 밀려나며 나는 곧 엉덩이에 아픔을 맞이했다.
뭐야, 뭐냐고.
‘억울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