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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15/194)

14화

솨아아아. 비가 몹시도 세차게 내렸다.

나는 나를 막아 줄 지붕 하나 없는 곳에서 비를 맞으며 아스킨을 마주 보았다.

새파란 눈동자에는 동정 하나 없이 분노로 가득했다.

“오빠!”

일이 틀어져도 아주 거세게 틀어진 걸 느꼈지만, 아리아를 보고서 아직 기회가 있다 여겼다.

‘역시 이 몸으로 사는 건 요절하기 딱 좋은 코스야.’

이것 봐. 보통 사람이라면 충분히 이유를 들어 볼 수 있는 상황임에도 까딱하면 바로 황천길을 앞두게 되다니.

물론 지금이라도 나는 샤를리즈가 아니고, 너는 엉뚱한 사람한테 화풀이 한 거다 하고 당장이라도 알려 주며 욕을 하고 싶은 마음이 차올랐지만.

진정하자. 지후야. 내 백 억 재산이 ‘주인님’ 하고 나를 기다리고 있다……!

차분히 해명을 하려 입을 열려는 순간이었다.

“이게 다 무슨 상황이지?”

노기 어린 목소리가 비를 뚫고 터져 나왔다.

고개를 돌리면 아주 밝은 빛이 보였다. 눈이 부셔서 그대로 찡그렸다.

귀로 달려오는 발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누군가 정중하게 손을 내밀었다.

일단 그 손을 잡자, 몸이 붕 떠올랐다.

나는 그제야 나를 들어 올린 게 알츠베이트 내 기사복을 입은 기사란 걸 알았다.

빛 속에 서 있는 건 놀랍게도 내 외조부, 알츠베이트 공작이었다.

“지금 내 사랑하는 손녀딸에게 무슨 짓을 한 것이지? 레무트 공작!”

할아버지가 비와 진흙으로 엉망이 된 내 모습을 보더니 어깨를 파르르 떨었다.

어, 어어? 잠시만, 잠시만요, 할아버지? 일단 진정합시다. 일단…….

“네가 무슨 짓을 한 거냐, 당장 대답해!”

감히, 하고 분노로 떠는 할아버지의 모습은 솔직히 남임에도 꽤 감동적이었지만, 내가 이런 감동에 빠질 때가 아니지.

“넌 내 소중한 손녀딸의 약혼자가 아니더냐. 미천한 약혼자로서 내 손녀딸을 위해 최선을 다하지는 못할망정 감히 이따위 흙바닥에 뒹굴게 해?”

“……내가 당신에게 파혼장을 보낸 건 잊었나 보군. 아니면 한 장 더 친히 보내면 되겠나?”

“하, 건방진. 힘들 때 도와줬더니 이제 와서 살 만해졌다 이건가? 파혼이 네 멋대로 될 것 같더냐. 내 손녀딸을 이렇게 취급하면서, 그냥 놔줄 것 같아?!”

오 잠깐, 잠깐. 할아버지. 급발진 그만. 그만!

머릿속으로 위험 신호가 오는 것 같아 서둘러 몸을 일으키려 했다.

왜인지 몸이 오들오들 떨려서 제대로 말을 듣지 않았다.

“파혼이라 했더냐? 그럼 어디 해 보거라. 당장 내 돈을 모두 갚고서, 이자와 위약금에 해당하는 돈 100억 골드를 내놓아라. 그리고 이번 일에 책임을 물어 이번 달 몫의 이자는 4배를 더 내도록. 싫으면 계약서 사항대로 처리하겠다!”

“…….”

“이 모든 것이 어려우면 약혼이 아니라 결혼을 해서 레무트 가문이 알츠베이트 가문에 들어오든지.”

쏟아지는 비 아래서 어마어마한 금액을 들은 것 같다.

할아버지의 노기 어린 목소리는 아스킨의 팔을 잡아당기던 아리아마저 조용하게 만들어 버렸다.

나는 끙,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날 당장 내려놔.”

기사에게 날 내리라고 했고, 기사는 망설이다가 내 시선이 차가워지자 얼른 내려 주었다.

“……사람을 돈으로밖에 보지 않는 당신네 집안, 정말 지긋지긋하군.”

“우습구나. 그런 가문에 돈을 빌린 것이 바로 그대지, 레무트 공작. 내 손녀딸을 귀히 여기지 않은 벌일세.”

“할아버지.”

나는 할아버지 앞을 가로막았다. 아직 비가 쏟아지고 있었고, 우산이 없는 나는 그대로 쏟아지는 비를 맞았다. 할아버지가 놀란 얼굴로 내게 우산을 씌워 줬다.

“우선 제 말 좀 들어요.”

“허어. 아가, 샤를, 괜찮으냐? 저 작자가 감히 너를 밀치다니…….”

“아뇨. 밀친 게 아니에요.”

나는 물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에서 물을 쭈욱 짜며 산뜻하게 대답했다.

“혼자 넘어진 건데, 할아버지가 오해를 했네.”

할아버지의 표정으로 찰나 의아함이 스쳤다.

곧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그나저나 이 할아버지 나한테 파혼 소식을 알려 줄 때는 차가워 보이더니, 이렇게 보니까 방법이 좀 못돼먹기는 해도 샤를리즈를 아끼는 것 같다.

“…….”

아스킨은 나를 보며 뜻 모를 표정을 지었다.

저쪽에선 파혼하자고 나서는 마당에 자기를 옹호해 주는 이유가 궁금할지도 모르겠다.

이게 다, 댁의 점수를 따야 해서 그렇거든요.

차라리 다른 남자를 꼬시라는 선택지가 있었다면 좀 나았을까.

나한테는 댁과 잘 지내는 선택지밖에 없거든요.

“그리고 난 공작과 파혼할 생각 없어요. 그러니까 할아버지도…… 내 약혼자에게 말 막 하지 말아요.”

“……허.”

할아버지의 수염이 씰룩 움직였다.

그렇게 봐도, 아까 내 손녀딸 몸에 흙 묻었다고 100억 골드 물러 내라는 모습 아주 잘 봤다고요.

“철없는 것 같으니.”

할아버지가 쯧 혀를 차며 돌아섰다. 나는 이게 일종의 상황 종료임을 알았다.

나는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아리아가 나와 눈이 마주친 동시에 무어라 말을 하려 뻐끔거렸다.

“공녀님!”

수잔이 내게 다가와 우산을 씌워 주었고, 나는 그걸 수잔 혼자 쓰게 넘겨준 뒤에 기사가 씌워 주는 우산을 쓰고 할아버지의 뒤를 따랐다.

‘거기 예쁜 아가씨. 제발 오빠한테 내 얘기 좀 잘해 줘라…….’

그래도 아리아랑 느낌이 나쁘지 않았으니까 좋은 소식을 기대해 봐도 되지 않을까?

파혼 안 하겠다까지는 바라지 않더라도 좀 달리 봐주면 좋겠는데.

‘대화라도 할 수 있게 말이지.’

몸이 살짝 떨렸다.

뒤로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았지만 돌아보지 않고 쭉 걸었다.

* * *

“엣취-!”

예상하라면 충분히 예상했던 일이 일어났다. 돌아온 직후 감기에 걸린 것이다.

그냥 감기도 아니고, 아주 혹독한 몸살 감기였다.

그러나 돈이 좋다는 게 뭔지.

외조부의 지시로 치료 마법사가 왔고, 신관도 찾아와서 회복력을 높여 주니 감기 몸살은 무슨, 그저 살살 재채기만 나오는 코가 간지러운 감기만 남았다.

‘돈이 진짜 좋구나…….’

심지어 이번에 내게 치료 마법을 걸어 준 마법사는 수도에서 둘째라면 서러워할 유능한 사람으로 날아간 팔다리도 고친다던데.

그런 이를 고작 감기 몸살로 불렀다는 점도 대단했다.

“흐음? 어쩐 일로 공녀님이 대상이군요. 공녀님께서 저지른 일의 수습이 아니라?”

사실 치료 마법사가 고개를 갸웃하며 덧붙인 말에서 느낀 감상이란.

그랬다. 이 마법사는 샤를리즈가 저지른 사고 수습으로도 많이 불려 왔었던 모양이었다.

그날 비가 몹시도 많이 와서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건 아닌가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듣기로는 레무트 영지 전체에 비가 엄청나게 많이 왔다.

내가 돌아간 뒤로 비는 계속 쏟아져 홍수와 함께 영지 전체에 심각한 물난리까지 났다고 했다.

‘……아리아는 괜찮은 거겠지?’

마차에서 잠시 보았던 것 때문인지 영 마음이 쓰였다.

그날 오후, 몸이 좀 개운해졌다.

그리고 몸이 낫는 동시에 나는 그 즉시 외조부에게 불려 갔다.

‘내가 낫는 즉시 바로 알아차린 것처럼 부른다라. 이는 필시 내 옆에서 일거수일투족 보고하는 사람이 있으렷다?’

이런 생각이 들었지만 꼭꼭 숨긴 채로 외조부를 마주했다.

“왔느냐.”

외조부는 레무트 영지에서 내 편을 들었던 게 언제냐는 듯 완고한 표정이었다.

흐응, 이미 애정이 가득한 모습을 목격했는데 말이지.

나는 싱글 웃었다. 그러자 외조부의 수염이 꿈틀 흔들렸다.

싱글싱글, 더욱 환하게 웃자 외조부의 표정이 끄응 하고 흐트러졌다.

“할아버지.”

“혼나기 싫으니 제대로 수를 쓰는구나.”

“고마워요.”

“…….”

“덕분에 감기 거의 다 나았어요.”

“……내 외손녀가 몸살 따윌 앓게 둘 순 없지.”

외조부가 잠시 위엄을 꺼트리고는 크흠흠, 헛기침을 했다.

그러더니 이미 소용없는 근엄한 표정을 지었다.

“그날 이야기를 좀 하자꾸나.”

“그날 이야기라뇨?”

시치미를 뚝 뗐지만 소용은 없었다.

“대체 레무트 공작의 여동생 머리를 왜 쥐어뜯어 놓은 게냐?”

“……네?”

헉, 시치미 떼도 소용없단 건 알았지만, 이 얘기가 나올 줄은 생각도 못 했는데?

얼굴에 힘이 풀렸다.

‘아니, 그보다 내가 아리아의 머리에 손을 댄 건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저 감시하신 거예요?”

“감시? 허, 그 영애의 몰골이 누가 봐도 쥐어뜯은 몰골이 아니더냐.”

“…….”

갑자기 아리아한테 많이 미안해지네. 그날 이후로 머리는 잘 정돈했을까?

……다음에 좋은 빗이라도 선물해 주든가 해야지.

“그 자리에서 머리를 쥐어뜯어 놓을 사람이 너 말고 또 누가 있겠느냐. 넌 그 영애를 매번 성가셔 했었지.”

감시가 붙은 건 아니라니 다행이었다. 괜히 수잔을 의심할 뻔했잖아?

대신 단단히 오해를 산 것 같지만.

“흐음, 맞아요. 생각해 보면 관심이 많았던 것 같아요. 전 여자 형제가 없잖아요.”

나는 아무렇지 않게 생긋 웃었다.

“그래서 관심이 좀 못되게 표현됐다고 해야 하나…….”

외조부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표정을 살짝 찡그렸다.

“장난감을 갖고 싶은 게냐? 하지만 그건 언제 죽을지 모르는 것 아니더냐. 예쁘장한 게 필요하다면 구해 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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