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화 (16/194)

15화

“…….”

와, 엄청난 쓰레기 발언…….

나는 입을 슬쩍 가렸다. 아니면 절로 표정에서 드러나거나 나도 모르게 욕이 나올 것 같았으니까.

그렇지, 이 양반도 그리 좋은 사람은 아니었지. 좋은 사람은 사람을 빚으로 얽어매는 짓은 하지 않는다. 그나마 손녀딸을 아끼는 것 같았으니 다행이랄까.

“흐음, 뭐, 그건 그렇고 그 영애의 머리를 뜯어 놓은 건 잘했다.”

쿨럭, 나는 터질 뻔한 기침을 가까스로 멈췄다. 뭐, 뭐야? 이 할아버지가 뭐라고 했지?

분명 머리를 뜯은 게 아니라고 말했건만 1퍼센트도 믿는 얼굴은 아니었다. 이건 이해했지만.

“잠깐…….”

“덕분에 이자를 더 받게 되지 않았느냐.”

“네?”

나는 멈칫했다. 할아버지는 내 반문을 듣지 못한 듯 자신의 턱을 쓰다듬었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이자를 꼬박꼬박 잘 내는 듯하여 영 성에 차지 않던 참이었다. 어떡하면 올릴 수 있을까 고민하던 차였는데……. 네가 묘안을 냈더구나.”

“그게 무슨…….”

“그야, 네가 일부러 그놈의 손에 밀려 넘어진 게 아니더냐?”

나는 입술을 뻐끔거렸다.

이 할아버지가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물론 감히 내 소중한 외손녀를 밀치다니 고얀 놈임은 분명하지만…… 아직 쓸 만한 놈이니 이렇게 꼬박꼬박 이자를 내게 둘 순 없지. 네게도 다 생각이 있었던 거겠지?”

“…….”

“넌 그놈을 소유하고 싶어 하니 말이다.”

나는 얼굴을 부여잡았다. 침착해. 침착해. 대답 잘해.

다행스럽게도 내게는 샤를리즈의 기억이 있었고, 몸에 남은 습관이나 버릇이 남아 있었다.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죠.”

동시에 생각했다. 큰일 났다. 이 집안……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미친 집안이었구나!

악녀 샤를리즈나, 샤를리즈를 아끼지만 사람을 가감 없이 도구로 다루는 저 할아버지나.

숨이 꼴깍 넘어갔다.

분명 파혼을 바라는 상황은 아니지만 저 할아버지와 손을 잡았다간 분명 데드 엔딩을 피하지 못할 거란 감이 왔다.

무엇보다……. 아스킨 레무트란 사람은 억압과 구속으로 소유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분명 그간 속으로 참고 또 참았지만, 그 안에 참아 왔던 분노가 어디 가지 않고 차곡차곡 쌓여 있을 것이다.

이미 레무트 영지에서 보고 온 참인데, 저 할아버지의 방식은 그걸 자극하다 못해 폭발하게 만들 것이다.

결코 긍정적인 방향은 아니었다.

저기요, 저는 목숨이 달려 있거든요?

이를 모르는 할아버지는 기분이 좋은지 내 앞에서 껄껄 소리 내 웃기까지 했다.

대충 비위를 맞춰 주다가 할아버지의 집무실에서 나왔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이 세계에서 가족들은 전부 내 편이 아니라고 생각해야겠어.’

책 속에서 사이가 좋은 줄 알았던 남자 주인공 폭군도, 손녀 바보라 불리던 외할아버지도 시한폭탄 같은 인간들이었다.

한숨을 내쉬고 있는데, 문이 살짝 열렸다.

“샤를.”

“……할아버지?”

열린 문틈 사이에 할아버지가 서 있었다.

나를 보면서 미간을 찌푸렸다.

“……아직 감기가 낫지 않는 것이냐?”

“네?”

“신관을 또 불러 주마.”

“…….”

나는 기분이 오묘해졌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고개를 내저었고.

그렇게 집무실에서 방으로 돌아갔다.

* * *

다음 날, 몸이 완전히 가벼워졌다.

오전에 몸이 가볍다는 것을 느낀 동시에 나갈 채비를 했다.

“레무트 영지로 가자.”

하녀들은 하나같이 걱정스러운 표정이었지만, 뭐라고 반박할 용기는 없는지 내 명령에 충실히 따랐다.

레무트 영지로 가는 길은 그리 멀지 않았지만 문제가 있었다.

“저, 공녀님……. 기사님이 잠깐 뵙고 싶다고 하셔요.”

“무슨 일이야?”

마차가 중간에 멈춰 섰다. 알고 보니, 며칠 전에 내린 많은 비로 인해 길이 막혔고, 사람들이 나와서 길을 복구 중이란다. 그래서 마차를 멈출 수밖에 없었다고.

그 말에 나는 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상황을 확인했다.

‘정말이네.’

아마도 영지민들로 보이는 이들이 직접 나서서 한창 흙을 퍼 나르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양옆으로 보이는 영지민들의 집들은 지붕이나 벽이 무너지는 등 엉망이었다.

홍수에 가까운 물난리였다더니……. 약혼자님에게는 악재였겠다 싶었다.

그렇지 않아도 이래저래 재정으로 걱정이 많을 사람일 텐데.

나는 치마를 붙잡고 마차를 내려왔다.

그러자 하녀들이고 기사들이고 전부 놀라 우르르 나를 쫓아왔다.

“공녀님, 드레스에 흙이!”

“괜찮아.”

“꺄악, 하, 한정판 구두에도 묻었어요, 고, 공녀님!”

“괜찮대도.”

나도 예쁘고 반짝이는 걸 좋아하긴 한데.

샤를리즈 옷장이랑 신발장에 이거랑 비슷하게 비싸고 좋은 게 100개는 족히 넘게 있더라.

“공녀님, 부디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응? 넌 뭐가…….”

내가 무어라 말을 하기도 전에 기사 중 하나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뭔가 생각하기도 전에 본능적으로 그 손을 잡았다. 샤를리즈 몸에 남아 있던 버릇이었다.

‘으아!’

시야가 휙 바뀌며 몸이 두둥실 떠올랐다. 나는 깜짝 놀라 나를 들어 올린 사람을 보았다.

아, 이 사람…….

‘비 오던 레무트 저택에서도 나를 안아 들었던 기사 아닌가?’

맞았다. 분명 레무트 공작저 앞에 외할아버지 등장과 함께 나를 들어 올렸던 사람이었다.

덩치가 장난 아니게 컸는데, 나를 들어 올리는 게 마치 당연한 의무인 양 평온한 표정이었다.

단단한 얼굴은 꽤 준수했다.

미안하지만 약혼자님의 얼굴을 본 뒤로 어떤 미남도 감흥이 들진 않았지만. 그럼에도 눈에 들어올 만큼 잘생겼단 소리다.

“……난 경 보고 들라는 소리 한 적 없는데?”

“……죄송합니다. 이전에 드레스와 구두에 흙 하나 묻히게 하지 말라는 명을 우선시 했습니다. 행동이 늦어 죄송합니다.”

아니, 그걸 죄송해하라는 게 아니라.

나는 이름 모를 호위 기사의 어깨를 툭툭 치며 내리라고 말했다.

그러자 기사는 잠시 당황하더니 생각에 빠진 표정을 지었다.

곧이어…….

“불러왔습니다.”

나는 마차 뒤에 실려 있던 가마에 앉혀졌다. 기사 넷이서 들어 올리는 가마였다.

기분이 오묘해졌다. 이게 뭐야.

“이제 안락하실 겁니다.”

“아니, 아니……. 됐고. 빨리 내려 줘.”

그래, 이 악녀 언니가 3보 이상 택시……가 아니라 기사를 이용했던 건 아주 잘 알겠다.

나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바닥을 다시 디뎠다.

어째 나를 보는 호위 기사들의 표정이 상반됐다.

정확히는 맨 처음에 나를 들어 올린 기사를 제외하면 불안하고 공포를 띤 눈으로 나를 보았고.

맨 처음에 나를 들어 올린 기사는…… 무슨 버려진 강아지처럼 날 보고 있었다.

뭐야, 이 사람. 찬찬히 보았지만 샤를리즈의 기억에서 떠오르는 건 없었다.

그렇다고 원작 인물도 아닌데.

일단 문제는 이게 아니었다.

‘약혼자님을 먼저 보고 오해를 푸는 게 먼저란 말이지.’

이런 건 시간을 더 지체해선 안 된다.

주변에서는 조심스럽게 돌아가는 것이 어떠냐며 제의를 하기도 했지만 나는 생각에 잠겼다.

곧 손을 들어 올려 근처에 있던 기사에게 말했다.

“일꾼을 불러와.”

그러자 기사가 당황했다. 오늘 외출은 지난번과 다르게 딸려온 사람이 많았다.

지난번 일을 겪고 할아버지가 사람을 더 붙인 결과였다. 그래서 기사들 외에 하인들도 함께였다.

“저, 공녀님……. 혹시 일꾼을 불러 저 통나무들과 잔해를 치우려 하시는 거라면, 레무트 영지까지는 사람이 오려 하지 않을 것이라 비용이 많이 들 겁니다.”

레무트 영지는 부유한 영지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일거리가 풍부한 수도를 두고 일꾼들이 굳이 여기까지 오지 않을 거라며 다음에 오는 게 좋지 않겠냐며 대장 격 기사가 나를 조심스레 설득하려 했다.

내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는 것만으로 입을 꾹 다물었지만.

“다시 말해 봐. 그래서 내가 저길 못 간다고?”

나는 소리를 높이는 대신에 조금 날카롭게 말하며 레무트 성이 있는 곳을 가리켰다.

“지금 내가 가야 할 길이 막혔는데 그깟 돈이 대수야?”

그러자 기사들이 저들끼리 쳐다보더니 고개를 숙였다.

나는 머리를 쓸어 넘겼다. 이외에도 지금, 오늘 당장 저기에 가야 한다고 난리를 쳤다.

“……이, 일꾼을 불러오겠습니다!”

결국 겁 먹은 하인과 기사들이 일꾼을 부르러 갔다.

다행히 일꾼들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르게 도착했다.

“경들은 뭐 해?”

그리고 눈앞의 잔해를 복구하는 데엔 일꾼뿐만 아니라 기사들과 하인들도 동원되었다.

‘허어, 이거……. 아쉽게도 오늘 안에 해결되진 않겠는데?’

대체 뭐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몰라도, 길은 엉망이었고 오늘 아무리 빨리 치우더라도 마차가 통과할 길은 요원해 보였다.

그렇다고 아스킨 그 남자가 내가 부른다고 올 남자도 아니고.

홧김에 걸어갈까 싶었지만 걷기에 좋은 차림은 아니었다.

한참 성 쪽으로 보면서 생각에 잠겨 있는데, 어디선가 시선이 느껴졌다.

시선을 돌리면 아이들이었다.

이곳 영지민들의 아이들인 것 같았다.

내가 서 있는 곳과 꽤 가까이 서 있었는데, 나름 숨으려고 했던 건지 수레에 숨어서 나를 보는 모습들이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움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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