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화 (17/194)

16화

“헉, 눈 마주쳤어. 마주쳤어!”

“진짜 예쁘다!”

“야, 그런 말 막 하면 안 돼!”

“왜? 진짜진짜진짜 이쁜데?!”

아무래도 물난리가 난 곳이다 보니 아이들도 멀쩡한 모습이 아니었다.

다쳐서 붕대를 감은 아이도 있었고, 씻지 못한 건지 몰골이 엉망인 아이도 있었다.

“이봐.”

나는 근처에 기사를 불렀다.

부르고 보니 아까 나를 제일 처음 번쩍 들어 올렸던 기사였다.

올리브색 머리카락을 보다가 이대로는 애매하겠다 싶어 하려던 말보다 다른 말을 먼저 꺼냈다.

“이름이 뭐야?”

그러자 기사는 잠시 멈칫하더니, 묘한 표정을 지었다.

“제트입니다.”

알츠베이트 공작은 샤를리즈에게 엄선한 실력자들로 구성된 호위 기사단을 붙여 주었다.

그런데 이 샤를리즈는 자신을 호위하는 기사들의 이름조차 알지 못했다.

“그래, 제트. 지금 영지 전체가 저 꼴인가?”

“……그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모르면 다른 기사에게 물어보려 했는데, 여기 상황을 아는 모양이었다.

“그럼 돌아가는 것도 소용없겠고…….”

나는 시선을 돌렸다.

조금 전엔 잔해에만 집중했더니 보지 못했던 것들이 보였다.

엉망이 된 건 도시 정경뿐만이 아니었다.

곳곳에 신음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환자도 있었고, 절망에 어린 듯 무너진 집 앞에서 하염없이 앉아 있는 사람도 있었고.

아스킨 레무트는 자기 사람들을 외면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러니 지금 저 풍경은 그가 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섰기에 일어난 풍경일 것이다.

“거슬리네.”

“……네?”

나는 돌아섰다.

나를 계속 훔쳐보던 이 영지 아이들을 보았다.

여전히 쳐다보고 있던 아이들은 흠칫했다가도 내가 무어라 하지 않자 열심히 쳐다봤지만.

“야, 맞잖아. 우리 동네에서 제일 예쁜 누나보다 이뻐!”

“근데 우리 이러고 있으면 혼나는 거 아니야? 옆에 무서운 기사님 있는데!”

나는 아이들을 보다 피식 웃었다.

“으악 무섭게 웃었어!”

“우리 벌주는 거 아니야?”

뭐야, 나름 예쁘게 웃어 준 거거든. 이 꼬맹이들아?

나는 시선을 돌렸다.

“하인들의 관리자를 불러와.”

“무슨 일로 부르십니까?”

“저기 있는 수재민들에게 음식이랑 물을 가져다 뿌려.”

“……예?”

제트는 알아듣지 못했다는 듯 멈칫했다.

내가 인상을 찡그리자 얼른 죄송하다는 사과가 돌아왔다.

곧 내 앞으로 하인들의 대장과 호위 기사단의 대장이 함께 도착했다.

“수재민들에게 음식과 물을 주라고.”

“……외람되지만 공녀님 어찌하여.”

“저거 안 보여?”

나는 손가락으로 쓰러지거나 멍하니 앉아 있는 사람들, 그리고 잔해를 치우느라 흙으로 엉망이 된 사람들을 차례로 가리켰다.

“저렇게 더럽게 있다가 전염병이 돌아서 내가 걸리면 어떡할 거야?”

“아…….”

“나는 여기에 계속 와야 한다고. 알아 들어?”

약혼자님에게 틈이 생길 때까지 여기를 얼마나 드나들어야 할지 모른다.

그렇다고 대뜸 저 사람들이 안쓰러워 물과 음식을 챙겨 줬다간 더 경계를 살지도 모른다.

그리고 알츠베이트 사람들에게도 괜한 의심을 안겨 줄지도 모르고.

“이, 이해했습니다!”

이 정도면 적당한 핑계가 되겠지.

“하지만…….”

“지금 내가 전염병에 걸려도 좋겠단 말을 하려고?”

“아닙니다! 다, 당장 물과 음식을 구해서 나눠 주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인들은 음식과 물을 공수하러 다시 수도로 돌아갔다.

오래 기다리지 않아 이번엔 상단의 도움을 받은 건지 음식과 물을 잔뜩 실은 수레가 이곳으로 향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일꾼들은 잔해 치우기가 끝나면 저 집들이나 고치라 그래. 꼴도 보기 싫으니까.”

“……예, 공녀님.”

그 소식을 듣고 나는 한창 잔해를 치우고 공사 중인 광경을 향해 명령을 내려 두고는 그대로 돌아섰다.

아무래도 시간이 꽤 걸릴 것 같으니, 오늘은 공쳤고 내일 일찍 다시 오든 해야겠다 싶었다.

* * *

집에 도착했을 때, 나는 얼른 더러운 옷을 갈아입자는 하녀들의 성화에 힘입어 옷을 갈아입고는 안락한 소파에 앉아 차를 홀짝홀짝 마셨다.

몸은 편안했지만 마음은 조금 불편했다.

‘……영지 사정이 그렇게 좋지 않은 건가?’

조금 전에 보았던 레무트 영지의 모습이 머리를 떠나가질 않았다. 한편으로는 의문이 들었다.

‘아스킨은 파혼을 얘기하며 얼마 안 가 내게 돈을 갚을 수 있을 것처럼 말했지.’

지금 영지를 수습하기도 어려워 보이는데, 과연 그 돈은 어디서 오는 걸까?

‘분명 아스킨을 도우는 세력이 있거나 협력하는 세력이 있을 거야.’

나는 책 속의 내용을 차례로 떠올렸다. 돈이 많은 곳, 한 번에 큰돈을 내놓을 수 있는 곳.

그러면서 아스킨과 협력을 들켜 알츠베이트의 미움을 사더라도 버틸 만한 곳……. 알츠베이트의 미움을 받더라도 아스킨의 힘이 필요한 곳.

‘지금 시점에는 없는 것 같은데……?’

한참 고민하고 있는데, 얼마 가지 않아 난 할아버지에게 불려갔다.

집무실의 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할아버지가 심상치 않은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뭔가 화가 난 건가 싶었는데 나를 보더니 웃는 게 아닌가.

활짝까지는 아니지만 만족감이 가득 어린 미소였다.

“오, 샤를. 소식은 들었다!”

내가 자리에 앉자마자 할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심지어 벌떡 일어나 이쪽으로 넘어와서 내 옆에 앉는 게 아닌가.

아니, 할아버지 왜 이러세요?

“레무트 영지로 가서 사고를 쳤다지?”

“네? 사고라니.”

“아주 좋은 의미의 사고 말이다!”

나는 속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뭐 때문에 이렇게 기분이 좋아 보이는 거지?

“역시 내 손녀로구나. 네가 그곳에 일어난 수해를 이렇게 이용할 거란 생각은 못했거늘.”

일단 영문을 알 수 없는 말들이 이어졌지만 잠자코 들어나 보자 싶었다.

“그래, 보고는 전부 받았다. 일꾼을 불러 길을 복구하고, 건물 보수 및 건설을 지시했다지? 그리고 추가로 음식과 물까지 주문했다고.”

“아……. 그건.”

“대신에 이들의 땅문서를 받아 왔겠구나.”

나는 멈칫했다. 네? 뭐요? 지금 뭐라는 거야, 이 할아버지가.

그럼 내가 그 집도 잃고 몸도 다친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터전을 빼앗아 왔을 거라 믿고 있는 거야?

기가 막혔다. 문제는 나도 모르게 표정 관리를 실패하고 당황한 표정을 흘렸다는 거다.

할아버지가 내 얼굴을 보더니 그대로 멈췄다.

“왜 그런 얼굴이더냐? 설마…… 다른 대가를 받은 것이냐? 뭐, 돈으로 받았더라도 괜찮단다.”

“……아니, 할아버지.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는데요.”

할아버지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허, 그럼 지금…… 아무런 대가도 받지 않고 해 주고 왔다는 것이더냐?”

“…….”

“돈을 허공에 헛으로 나눠 줬다고?”

아니, 헛으로 썼다니. 사람을 살렸다는 말은 이 할아버지에게 씨알도 먹히지 않을 것 같았다. 생각지 못한 말들에 내가 대꾸를 못 하자, 할아버지는 더욱 분노한 것 같았다.

“너는 아직 어려 없는 것들이 그냥 도와주면 나중에 조금만 힘들어도 얼마나 달라붙는지 모르는구나! 차라리 사치를 하는 게 낫지 쓸데없는 데 돈을 썼어!”

벌떡 일어나 화를 내는 할아버지의 마음이 아예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었지만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손녀딸의 약혼자 영지를 도와준 것 아닌가.

도덕이나 정이나 이런 걸 모두 떼 놓고 보더라도 할아버지도 그 남자를 필요로 여기는 것 같은데 도움을 주면 장기적으로 이득 아닌가.

“하, 네가 나라 밖으로 여행을 다녀온 뒤로 철이 좀 든 줄 알았더니…… 이 할애비의 크나큰 착각이었구나. 안 되겠어. 분별 없는 손녀를 그놈과 붙여 둘 수 없겠구나.”

내가 말문이 막힌 사이 할아버지는 분노와 잔소리, 1절과 2절을 지나 이제는 파국의 카드까지 꺼내들었다.

“그놈 말대로 파혼하는 게 낫겠구나.”

“할아버지.”

“이대로는 안 되겠어. 넌 좀 더 돈 개념이 제대로 박힌 곳으로 보내야겠다. 마침 혼담을 보내온 이들 중에 차일드 가문이 가장 괜찮은 곳이니 차라리 이곳으로 가거라.”

당혹스러웠다.

아니, 이 할아버지가 손녀딸 목숨을 3초 안에 결정지어 버리시네.

나를 골로 보내 버리는 결정에 당황할 때는 아니었다. 이대로 두면 확정이 된다.

나는 냉정하게 정신을 차렸다. 안 돼, 돈 많은 백수의 꿈이……! 꿈도 사라지고 죽을 수는 없다!

“할아버지, 진정하시고 이제 제 얘기 좀 들어주시면 안 돼요?”

“허어? 더 들을 게 무어 있다고?”

“일단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고 한 건 고작해야 돈을 받는 게 전부라고 생각하신 건가 싶어서 한 얘기였어요.”

머리가 빠르게 굴러갔다. 이 할아버지는 돈이라면 눈이 돌아갈 만큼 좋아하는 인물이다.

“공짜라뇨? 무슨 황당한 소릴 하세요. 당연히 땅을 가져와 봤자 거긴 척박한 곳인데 무슨 소용이겠어요? 땅 대신에 사람들에게 앞으로 이자까지 쳐서 그들에게 빌려주고 오는 길인데요. 건물 보수 비용과 건설 비용, 그리고 물과 식량 값까지요.”

“순순히 이자까지 치르려 들더냐?”

“그들이 지금 이자가 무섭겠어요? 당장 죽을지도 모르는데요?”

할아버지의 날카로운 시선이 나를 향했다. 약혼자님이 분노했을 때의 시선보다는 무섭지 않았고, 폭군 오빠가 나를 노려볼 때보다도 무섭지 않았다.

“……정말이더냐?”

“거짓말을 해서 뭐 해요? 거짓말은 부족한 게 있는 자들이나 하는 거라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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