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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18/194)

17화

“허!”

할아버지의 얼굴에서 굳은 표정이 사라졌다. 그 자리를 미소가 메우더니 이내 소리 내어 웃기 시작했다.

“하하하. 과연, 네가 정말 철이 들었구나. 그래, 이 정도의 수완이라면…….”

할아버지가 자신의 수염을 만지작거렸다.

“그놈의 능력과 합치면 알츠베이트의 권세가 영원하겠구나. 역시 피는 속일 수 없나 보구나. 네게도 이 할애비의 피가 흐르고 있어.”

뿌듯해하고 희열에 가득찬 할아버지의 표정을 보며 나는 속으로 잘 넘어갔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얼른 이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다행히 할아버지는 더는 붙잡지 않았고, 나는 그대로 집무실을 나서려 했다.

문제는 나가려 문고리를 잡는 동시에 등 뒤에서 흡족한 목소리가 들려왔단 거였다.

“빌려준 돈이 들어오면 내게 보여 주거라.”

그 말이 선고처럼 느껴졌다.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끼며 문을 열고 다시 닫았다.

* * *

‘미친! 혹 떼려다 혹 붙였다!’

할아버지 집무실을 나서 방에 도착했다. 나는 왜 그러냐는 하녀들의 말에 대답할 새도 없이 소파에 주르륵 앉아 얼굴을 가렸다.

“모두 나가.”

하녀들이 주르륵 나가고 방에 홀로 남았다.

나는 더는 참지 못하고 그대로 누워 버렸다.

‘그럼 내가 어떻게 했어야 해?’

나는 숨을 삼켰다. 레무트 영지의 광경을 재차 떠올렸다.

곳곳에 신음하는 사람들, 자신의 얼굴에 흙먼지를 걷을 힘조차 없는 사람, 올망졸망한 눈으로 나를 보는 아이조차도 붕대를 감고 있던 모습.

……그래도 그 사람들을 안 도와줄 순 없었어.

나는 샤를리즈 몸에 들어오긴 했지만 악독하게 살려고 하는 건 아니란 말이다.

‘문제는 이미 일어나 버렸으니 해결 방법이나 생각하자.’

일단 할아버지는 빌려준 돈이 들어오면 보여 달라고 했지. 그 돈을 어떻게 마련하지?

일단 샤를리즈에게 주어진 사재를 이용하는 순간 당연히 할아버지가 알 수밖에 없다.

게다가 속였다는 사실까지 밝혀지면서 파혼을 시키겠지.

그럼 이어서 사망 엔딩.

혹시 샤를리즈가 남몰래 숨겨 둔 돈은 없나?

……없을 것 같긴 한데.

샤를리즈는 돈을 벌어 올 줄 아는 사람은 아니었다.

있는 재산을 사치스럽게 쓰면 썼지. 덕분에 사교계에서는 심볼이나 셀럽, 워너비적인 위치에 있었지만. 지금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아냐, 분명 무슨 방법이 있을 텐데…….

이렇게 고민에 잠긴 순간이었다.

“……응?”

눈 앞의 공간이 울렁거렸다. 나는 이걸 한번 본 적 있었다.

곧 검게 일렁이는 공간 사이로 누군가 다급하게 뛰어들어 왔다.

“공녀님!”

한 번 본 적 있는 인물이었다.

노아.

책 속 남자 주인공이자 샤를리즈의 친오빠인 폭군의 보좌관. 책의 서브 남주이기도 한 남자였다.

그는 나를 보는 동시에 한쪽 무릎을 꿇고 인사했다.

어째서인지 매우 급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이렇게 찾아뵈어 대단히 죄송합니다. 급한 일이라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뵀습니다.”

“아니, 어떻게 나타난 건지가 더 궁금한데…….”

나도 모르게 놀라 중얼거렸지만 매우 다급해 보이는 표정의 서브 남주님에게는 들리지 않았는지 빠르게 이어 말했다.

“그건 나중에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저와 동행해 주십시오.”

“왜?”

노아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짙은 눈동자로 당황이 일렁거렸다.

책 속에서는 대단히 차분한 사람이었는데, 이런 모습이 신기하기도 했다.

“……폐하께서 또다시 폭주 중이십니다.”

하지만 뒤이어 나온 말은 나를 움직일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 * *

나는 슬쩍 시선을 올려다보았다.

“불편하셔도 조금만 참아 주십시오.”

현재 나는 노아의 품에 안겨 있는 상황이었다. 이 채로 달리는 게 훨씬 빠르다는 말 때문이었다.

나부끼는 푸른 머리카락을 얼마나 보았을까. 나는 곧 황실에 도착했다.

……생각해 보니 그 인간이 폭주했는데 내가 왜 생각해 줘야 하는 거지?

이런 생각은 도착해서야 들었다.

하지만 노아가 이어서 사람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했기 때문에 결국엔 움직였을 것 같다

오빠란 놈을 진정시킬 수 있는 사람이 당장 나 하나밖에 없다는데 어떡해.

‘내 앞가림하기도 바쁜데 말이지…….’

머리 위에서 노아가 말을 걸었다.

“……정말 와 주실 줄은 몰랐지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노아의 말이 귓가로 울려 퍼졌다. 나는 그 말에 신경 쓸 수 없었다.

알현실에 들어오자마자 보이는 광경 때문이었다.

‘헉, 이 무슨 개판이야…….’

회의실 안쪽은 엉망이었다.

아마, 회의를 하기 위해 있던 거대한 탁자는 반으로 쪼개지다 못해 제 역할을 못할 정도로 망가졌고, 꽃병이 깨진 것인지 바닥엔 유리 조각이 가득했다.

무엇보다도 시선을 떼지 못한 건 검을 쥐고 있는 남자 주인공이자 폭군. 내 오빠의 모습 때문이었다.

록시디언이 쥐고 있던 검이 수하로 보이는 사람을 향해 겨눠지고 있었으니까.

‘앗, 아, 안 돼!’

나는 다급히 목에 건 목걸이를 손에 쥐었다.

“……엄마야.”

동시에 목걸이에서 빛이 새어 나왔다.

한번 보았던 금빛이 마치 실처럼 일렁거리더니, 록시디언과 이어진 것이 보였다.

그 순간 오빠와 내 눈이 마주쳤다.

“…….”

짐승 같은 눈에 숨을 삼켰다. 삼키기도 잠시. 땡그랑.

검이 떨어지는 소리가 요란스럽게 들여왔다.

“내 여동생.”

눈을 몇 번 깜빡였을 뿐인데, 어느새 오빠가 눈앞에 있었다.

까만 머리카락에 붉은 눈동자에 깜짝 놀랐다. 엄마야, 언제 여기까지 온 거야?

“리즈, 오빠 보러 왔니?”

“……아, 소름 돋아.”

“소름 돋는다니, 오빠는 그런 말 들으면 조금 슬퍼.”

“…….”

나는 조금 전까지 본인 수하를 족치려는 오빠가 이렇게 나오는 게 더 소름 돋거든?

물론 변하게 만든 건 나였지만 다시 봐도 적응이 되는 변화가 아니었다.

“도와줘서 고마워. 오빠 도와주러 온 거지?”

“……저 사람 죽은 거 아니지?”

“응? 아냐 아냐. 다행히 죽지는 않았어.”

그게 산뜻하게 말할 내용은 아닌 것 같은데.

“오빠는 리즈가 싫어하는 행동은 하지 않아. 아, 아니면 죽여 줄까?”

“아니, 아니!”

나를 향한 이 폭군 오빠의 표정은 부드럽기만 했다. 정말 어느 동화책이나 환상에 나올 법한 사려 깊고 다정한 오빠처럼.

“리즈가 원하면 뭐든 해 줄게.”

물론 애교마저 녹아 있는 이 모습은 사납기 그지없는 외모와 어울리는 태도는 아니었다.

“우리 리즈는 착하기도 하지.”

록시디언이 나를 보며 싱긋 웃었다.

어째 그 시원한 미소가 아주 잠시 죽은 내 친오빠와 비슷하게 보여 멈칫했다.

그 순간 록시디언의 표정이 순식간에 썩어 들어갔다.

“아 미친……. 웩.”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정신이 들었구만.

원래 록시디언의 모습이었다.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온 록시디언은 얼굴을 쓸어내리며 탄식을 뱉었다.

“아, 죽고 싶다. 토할 것 같아…….”

“……내가 하고 싶은 말이거든?”

“든?”

“……요.”

살벌해지는 시선에 슬쩍 말꼬리를 고쳤다.

“이따위 방법밖에 없는 거냐?”

“내가 어떻게 알아.”

나야말로 궁금했다. 어쩌다 나만 저 오빠의 광증을 진정시킬 수 있는 사람이 되어서는 하필 진정시킬 때마다 이런 꼴을 목격해야 하는지.

차라리 다정하려면 다정한 쪽만 하든가, 원래 상태로 돌아오면서 웩 하는 표정을 숨기질 않으니 나도 이입해서 함께 속이 안 좋아지는 기분이었다.

나는 슬쩍 오빠 뒤쪽을 바라봤다.

다행히 이 오빠가 죽이려 했던 사람은 이전에 이미 기절했던 모양이었다.

내 시선이 느껴졌던지 록시디언도 저놈은 기절했어, 하고 알려 주었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너냐? 쟤 여기 데려온 게?”

오빠가 원래대로 돌아오기 무섭게 노아가 성큼 다가왔다.

이 오빠의 살벌하기 짝이 없는 시선에 노아는 어색하게 미소했다.

“하지만……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이 위험한 곳에, 하…… 됐다. 됐어.”

록시디언은 자신의 머리카락을 헝클이며 무어라 무섭게 중얼거렸는데, 욕인 것 같았다.

그사이 노아가 내 쪽을 향해 물었다.

“공녀님, 괜찮으십니까?”

“보다시피?”

내가 위험할 일은 없었다. 나야 목걸이 잡고 엄마야, 한 번 외치면 상황이 모두 끝나 버리는걸.

이제 두 번 보긴 했지만, 이걸 이중인격이라 한다면 인격이 홱 변한 록시디언은 내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

오히려 사려 깊고 다정한 오빠처럼 굴려 하지.

“……그 모습을 좀 더 오래 볼 순 없나.”

“뭐야?”

“헉, 들렸어?”

나는 얼른 눈을 피했다.

그사이, 기절했던 수하가 눈을 떴다.

혹시나 내가 ‘엄마야!’ 하고 외치는 상황과 애교 있게 변한 폭군의 모습을 기억하는 건 아닐까 싶었지만, 수하는 겁에 질려서인지 모든 걸 기억하지 못했다.

“고, 공녀님께서 오신 기억은 납니다……! 저, 저를 살려 주셨군요!”

오히려 내가 온 것만 기억하고 단순히 내가 자신을 살려 줬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이 남자는 오빠의 최측근 기사 중 하나이자 엘리트라는데 감격 어린 표정으로 날 보는 게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그래, 댁은 제 덕분에 산 게 맞으니 나중에 은혜 좀 갚아 주십쇼.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싱긋 웃으며 손을 살랑 흔들었다.

그러자 감격 어린 표정으로 보던 기사의 얼굴이 빨개졌다.

오, 샤를리즈의 미모는 역시 놀랍다니까.

“됐고, 넌 이만 꺼져.”

“예, 예. 폐하!”

꺼지라는 데도 충정 가득한 표정으로 기사가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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