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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19/194)

18화

나는 의아했다.

이따위로 구는데 왜 충성을 다하는 걸까. 저기 있는 노아도 록시디언을 생각해 바로 내게 달려오지 않았던가.

“뭐야, 그 기분 나쁜 시선은?”

“……아니, 인복은 있구나 싶어서?”

그러자, 록시디언이 피식 웃었다.

그건 그가 눈을 감았다가 뜨며 차갑고 조소에 가까운 미소로 변했다.

“그럴지도 모르겠네. 가족 복은 없는 모양이지만.”

……여동생인 나를 앞에 두고 하는 말이면 내 욕을 하는 건가?

난 오묘한 표정으로 그 말을 들었다.

그러고 보니 가족 하니까 자연스럽게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잠깐, 이 사람이랑 나랑 어쨌든 간에 남매잖아? 게다가 폭군이라지만 한 나라의 황제고.

‘……돈이 많겠지?’

나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하나만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뭐야? 뭔데.”

“돈 많아?”

“…….”

내 질문의 뜻을 알 수 없었는지 잘생긴 얼굴이 살짝 구겨졌다.

솔직히 약혼자님의 얼굴을 본 뒤로는 어떤 미남을 봐도 감흥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생각됐지만 이쪽은 예외이긴 했다.

괜히 남자 주인공이 아니라는 듯 잘난 미모를 자랑했으니까.

게다가 마치 신이 빚은 듯 아름다운 약혼자님과는 다른 방향인 날 것에 가깝고 거친 방향으로 미남이었다.

“내가 와서 광증이 멈췄지?”

“그래서?”

“내가 와서 멈춘 거니까 대가를 지불해 줘.”

광증을 멈춰 놓고 보니, 이쪽은 돈을 빌릴 요소로 제격이지 않은가.

‘폭군=돈이 많겠지’ 공식을 세운 나는 싱글 웃었다.

“웃기지도 않은 소리군.”

“뭐?”

“오히려 너 때문에 신하 앞에서 쪽팔린 모습을 잔뜩 보였으니, 내가 청구해야 맞는 거지.”

나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보다 신하라니? 누가 봤는데?

“무슨 소리야? 누가 봤다고?”

“쟤.”

“아.”

록시디언이 노아를 가리켰고, 내 시선도 노아를 향했다.

졸지에 갑자기 우리의 시선을 받은 노아는 잠시 난감한 표정을 떠올렸다.

“지난번에도 봤잖아. 이제 와서 무슨 소리야?”

“쪽팔린다고. 그딴 모습이라니!”

“너무하네! 물에 빠진 사람 구했더니 보따리 내놓으라는 격이네, 이거!”

님 양아치냐? 양아치지? 욱해서 목소리가 커지자, 폭군이 내게 눈을 부라렸다.

나는 조금 쫄아서 눈에 힘을 뺐다.

사실 목걸이란 수단이 주어졌다지만 쟤가 검을 들이댔던 순간이 아직도 선명했다.

“이럴 거면 앞으로 네 도움은 필요 없어.”

폭군이 이렇게 선언해 버리자 할 말이 없어졌다.

하지만 그렇지 않아도 돈을 마련하는 방법이 궁색하던 차에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나는 내가 사람 하나를 살리지 않았냐며, 소중한 부하를 살리는데 쪼잔하게 구는 거냐며 우겼다.

어처구니없게도 이 모든 게 씨알도 안 먹혔다.

‘……폭력이나 광증도 광증이지만 소통이 안 돼서 폭군인 거 아냐?’

오히려 노아가 나를 미안한 표정으로 응시했다.

나는 결국 우기는 것은 포기하고 노선을 바꿨다.

‘보아하니 나를 싫어하는 건 아니야.’

여기서 싫어한다는 것의 기준은 약혼자님이 내게 보이는 태도다.

적어도 그 약혼자님처럼 진정 보기 싫다는 듯이 본다거나 미워하는 건 아닌 것 같으니까.

“알았어. 대가를 받는 건 포기할게. 포기할 테니까 부탁 하나만 해도 돼?”

지금까지 똥고집처럼 완고하게 굴던 록시디언의 얼굴로 처음으로 호기심이 어렸다.

“뭔데?”

“돈 좀 빌려줘.”

그러자 록시디언이 멈칫했다.

나를 보는 얼굴이 살짝 찡그려지는 동시에 오묘함이 스쳤다.

이 오빠가 고개를 갸웃했다.

“돈이라니, 무슨 소릴 하는 거냐? 돈은 돈 많은 네 외조부에게 받든가.”

“……오빠의 외할아버지이기도 하잖아?”

그러자 오빠가 픽 차갑게 웃었다.

“난 외조부 없는데?”

“…….”

“필요하면 손자도 갖다 치워 버릴, 등 뒤에 칼을 꽂을 사람 따윈 필요 없다.”

투정 같은 말이 아니라 아주 단호하고 차가운 목소리였다.

이거, 잘못 건드렸다 싶어 나는 입을 꾹 다물고 눈을 슬쩍 굴렸다.

‘폭군과 알츠베이트 공작의 사이가 나쁜 건 알고 있었지만 상상 그 이상이구나…….’

가족이지만 각각 황제파의 수장과 귀족파의 수장이라는 자리 때문일까?

이 오빠의 태도를 보아하니 가족으로도 여기지 않는 것 같았다.

“왜, 또 사고라도 쳐서 알츠베이트에서 지갑이라도 막았냐?”

날 보던 록시디언의 눈으로 한심함이 스쳤다.

아무래도 내가 사고를 쳐서 돈을 쓰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오해한 것 같았다.

“그리고 돈 줘 봤자, 쓸데없는 짓 할 게 뻔하지.”

“내가 뭘?”

“사치하다 안 갚을 게 뻔해. 난 안 속아.”

“오빠한테 빌린 적도 없는 데 어떻게 알아?”

“네가 지난번에 지갑이 막혔을 때 대신관 하나를 유혹해 돈을 갈취하고는 튀어 버렸지. 그 수습을 황실이 했던 기억은 있냐?”

“…….”

그건 좀 억울하다. 내가 한 거 아닌데…….

하지만 이 몸을 가지고 있는 이상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완고하네.’

어쨌거나 노아가 날 데려온 광증 진정이란 목적은 달성된 상황이었다. 이대로 돌아설까 싶었지만…….

“넌 좀 더 돈 개념이 제대로 박힌 곳으로 보내야겠다. 마침 혼담을 보내 온 이들 중에 차일드가가 가장 괜찮은 곳이니 차라리 이곳으로 가거라.”

‘이대로 할아버지에게 거짓말한 것이 들키면 분명히 돈 잘 버는 새로운 약혼자를 데려오겠다고 하겠지.’

그럼 당연히 사망 엔딩이다. 할아버지가 했던 말이 고스란히 떠올라 발이 떨어지질 않았다.

정말 애석하게도 눈앞의 이 오빠는 내가 쥐고, 쥘 수 있는 동아줄이었다.

“그럼 담보가 있으면 어때?”

나는 목에 걸린 목걸이를 잡았다.

“이 목걸이를 담보로 줄 테니 돈 좀 빌려줘.”

록시디언의 표정이 굳었다.

아니, 조금 전까지도 남아 있던 특유의 짓궂은 장난기 같은 것이 사라진 표정이었다.

이제야 뭔가 이상함을 알아차린 사람처럼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사람이라도 죽였냐?”

“아니?”

“하기야, 네가 몇을 죽인다고 알츠베이트가 덮지 못할 것도 아니고.”

“안 죽였어.”

누가 폭군 아니랄까 봐 예시 한번 살벌하네.

나는 손에 쥔 목걸이를 살짝 흔들었다.

“그래서 빌려줄 거야? 이게 꼭 필요한 거 아니야?”

“…….”

내가 목에서 아예 목걸이를 풀어서 흔들었다.

나를 빤히 보던 록시디언이 고갯짓했다.

“야, 노아. 너 저거 잡아 봐.”

“네? 네. 폐하.”

“그리고 쟤처럼 해 봐.”

노아가 다소 진지한 표정으로 작게 키워드를 중얼거렸지만 록시디언에겐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샤를리즈의 기억을 떠올렸을 때 이건 나만 쓸 수 있는 게 아닐까 예상은 했지만.’

록시디언도 예상했던 일이었던지 실망한 표정은 아니었다.

나는 노아에게 목걸이를 돌려받았다.

“왜 돌려줘? 노아가 아니더라도 오빠가 직접 가지고 있다 외치면 되잖아. 될진 모르겠지만.”

“내가 그 목걸이를 받아 봐야 광증이 도졌을 때 그게 눈에 보이기나 하겠냐?”

그건 그렇지. 광증이란 게 아예 이성이 확 날아가는 거니까.

“그럼 노아에게 맡겨. 오빠 부관이잖아.”

“……이런 걸 남한테 맡기겠냐? 그리고 너만 쓸 수 있는 걸 뻔히 보고도 멍청하게 그런 말이 나온다? 아니 진짜 멍청한가?”

“왜 말투가 그렇게 시비조야?”

“너도 나랏일 해 봐라. 상시 분노가 치미니까.”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록시디언에게 이렇게 상식적인 말이 흘러나올 줄은 몰랐는데.

이 말을 들어서일까. 그의 얼굴이 조금 피로해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그건 그거고, 록시디언은 계속해서 내 제안을 족족 멍청하다고 비웃었고 결국 분노가 확 치밀었다.

연이은 내 요청을 거절한 록시디언이 머리를 쓸어 올렸다.

“넌 가족 관계일수록 돈 거래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 모르냐?”

요청하던 내 입이 잠시 멈췄다.

조금 전까지 알츠베이트 공작은 가족이 아니다 단호히 선을 그은 모습을 보아서일까. 기분이 미묘해졌다.

한편으로 황당하기도 했다.

네가 나를 가족으로 생각하긴 했단 말이야?

“……그래, 오빠가 그렇게까지 이야기하니까.”

나는 자세를 바로 했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끝을 보자는 기분으로다가 고개를 깊이 숙였다.

사위가 고요해졌다.

“부탁이야, 난 지금 돈이 꼭 필요해.”

이대로 약혼 상대가 바뀌는 게 두는 건 자살 행위나 다름없다.

수재민들을 도운 걸 후회하는 건 아니지만. 이대로 죽을 수는 없잖아?

“제발 빌려줘.”

“……어디에 필요한 건데?”

“비밀이야.”

돈이 필요한 이유를 알게 되면 폭군이 뭔가 이상하게 생각할 것 같아 대답했는데,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얼른 덧붙였다.

“빌려주는 데 필요하다면 말하고.”

“아니, 됐어.”

잠시 침묵을 끊고 록시디언이 말했다.

“빌려주지.”

나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단, 조건이 있어.”

“……무슨 조건?”

쿨하지 못하네. 하지만 이게 어딘가 싶어 나는 표정을 정돈했다.

록시디언이 손가락을 펼쳤다.

그와 동시에 거칠게 잘생긴 얼굴로 사나운 미소를 내걸었다.

“알츠베이트를 버리고 황족이 돼.”

“……어?”

나는 눈을 깜빡였다. 전혀 생각지 못한 조건이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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