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부친인 선대 황제와 모친인 알츠베이트의 후계자였던 공녀 사이에 맺은 약속. 첫째는 황실의 후계로, 둘째는 알츠베이트의 후계로.
알츠베이트와 황실 간에 맺은 약속이었다.
그렇기에 알츠베이트의 후계가 된 샤를리즈는 황족이 될 수 없다.
본인이 직접 알츠베이트를 버리지 않는다면 말이다.
‘하지만 지금 내가 진짜 샤를리즈도 아니고.’
알츠베이트에게 지켜야 할 의리 같은 건 없다.
그럼에도 이 조건은 받아들이기엔 웃긴 상황이었다.
웃기네, 진짜. 약혼자님이랑 파혼을 안 하려고 돈을 빌리는 건데, 호적을 옮겨 버리면 약혼 관계는 어떻게 되냐고.
“하나만 물어보자. 만약 내가 황족이 되면 뭘 시키려고?”
“그건 생각 안 해 봤는데.”
록시디언이 고민하다가 단호하게 말했다.
“아, 일단 그 마음에 안 드는 놈이랑 파혼해. 새로운 남편감은 내가 더 대단한 놈으로-.”
“거절할게.”
내 확실한 거절에 록시디언이 인상을 확 찡그렸다.
“넌 그 쭉정이 같은 놈 뭐가 좋다고 아직도 쫓아다니는 거냐?”
“미안하지만 내가 쭉정이를 쫓든 눈사람을 쫓든 오빠가 도와준 건 하나도 없잖아?”
“내가 왜 도와줘? 그놈은 마음에 안 들어.”
책 속에서 폭군이 아스킨을 싫어했었나?
올곧은 남자라 미움 사기 쉬운 타입이긴 했다.
책 속에서는 두 사람이 부딪치는 사람이 샤를리즈가 죽고 난 후에나 있어서 잘 모르겠다. 폭군 심기를 거스른 적도 있나 보군.
아무래도 이 오빠에게 돈 빌리기는 텄다 생각해서 깔끔하게 포기하려는 순간이었다.
“뭐. 좋아. 그 조건이 싫다면 이건 어때. 단, 이게 마지막이야.”
눈앞으로 동아줄이 툭 떨어졌다.
“……뭔데?”
나는 이 줄을 붙잡는 대신 의구심 가득한 눈으로 쳐다봤다.
“네가 여행에서 돌아왔다는 소식이 수도 곳곳에 퍼졌다. 곧 이런저런 자리에서 널 부르겠지. 아, 이미 불렀나?”
“그래서?”
나는 망나니들의 모임을 떠올리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내 눈에 경계심이 깃들었다. 이번엔 또 무슨 황당한 조건을 내걸려고?
“앞으로 나가는 모든 자리에서 네가 늘 했던 것보다 더 크게 깽판을 쳐. 패악을 부리란 소리야.”
첫 번째 조건도 당황스러웠지만 새로 제시한 것만큼 당황스럽진 않았다.
이건 또 무슨 꿍꿍이로 내건 조건이야?
“물론 너는 돌아온 이상 네 멋대로 지금까지 하듯이 할 생각이었겠지만. 그 규모를 더 크게 키우라는 소리지.”
냉정하게 생각하면 이건 그리 어렵지 않은 조건이었다.
어차피 샤를리즈가 하던 일에 내가 조금만 더 크게 연기하면 되는 거 아닌가?
이대로 파혼하고 당장 죽든가 아니면 1년을 버티느냐 하는 기로에서 이 정도 연기야 어려운 일도 아니다.
하지만 대체 왜?
“무슨 꿍꿍이인데?”
“그런 거 없는데?”
“……정말로?”
나는 목걸이를 꾹 쥐었다.
이 행동이 어떻게 비쳤는지 록시디언의 표정으로 찰나지만 당황이 스쳤다.
음? 이걸 쓸 생각은 없었는데, 협박으로 비쳤나?
폭군이 조금 느슨해진 표정으로 해명했다.
“네가 더 악명을 얻을 필요가 있어. 그래야 내가 미친 짓 한 게 묻힐 거라고.”
“허?”
“오늘 일만 해도, 아무리 사람들의 입을 쉬쉬 막아도…… 새어 나가기 마련이지.”
록시디언이 이 공간을 고갯짓했다.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언제까지고 숨길 수만은 없을 테니까. 그럼에도 내게 제시한 내용은 황당했지만.
어차피 나도 내가 샤를리즈가 아니란 걸 들키면 안 되는 상황이긴 했다.
‘……티 나지 않게 샤를리즈의 평판을 끌어올릴 생각이었는데.’
이대로 업보 때문에 요절하겠다 싶어서 수습을 해 볼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되면 평판은 포기해야 하는 걸까. 머릿속으로 치열하게 계산기를 두드렸다.
승리한 건 저 오빠의 조건을 받아들이는 쪽이었다.
일단 돈이 필요하다. 그래야 거짓말도 들키지 않고 당장 파혼도 막고 죽지도 않을 테니.
“좋아, 수락할게.”
그러자 폭군이 짓궂은 미소를 떠올렸다.
“좋아.”
어째 그 미소가 알 수 없는 꿍꿍이속 같아 호랑이 굴에 제 발로 들어가는 기분이라 찝찝했지만.
* * *
샤를리즈가 돌아갔다.
그녀는 여기 나타났던 것과 마찬가지로 노아가 직접 알츠베이트 저택의 방으로 이동시켜 주었다.
“출발할 때 무례를 범해 정말 죄송했습니다.”
노아는 돌아가면서 얌전히 자신의 무례를 사죄했다.
한편으로는 샤를리즈 성격에 뺨이라도 올려붙이지 않을까 싶으면서, 그러더라도 기꺼이 감수하겠다 생각했다.
그러나 샤를리즈는 감흥 없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됐어.”
노아는 놀라 도리어 샤를리즈를 보았다.
“오빠를 생각해서 데려온 거잖아. 오빠는 좋겠네. 경 같은 충신이 있어서.”
잠시 눈이 마주쳤다.
신이 내려 준 선물이라는 찬사가 부족하지 않을 만큼 아름다운 미모를 가진 샤를리즈였다. 다만, 악독함에 가려지고 말았지만.
“……그래도 무례는 사과드리겠습니다.”
“됐다니까.”
샤를리즈가 돌연 작게 미소했다.
“정 미안하면 다음에 날 한번 도와줘.”
샤를리즈의 긴 눈꼬리가 접히는 모습을 보면서 노아는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아주 잠시였지만 자신의 품에 안긴 이 공녀가 자신의 심장을 움켜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섬뜩했다.
저도 모르게 뭐든 도와드리겠다 약조할 뻔했을 만큼.
노아는 샤를리즈가 평범한 미소를 짓는 걸 처음 보았다.
공기처럼 두르고 있던 악독함을 걷어낸 미소는 그를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샤를리즈를 돌려보낸 뒤, 노아는 자신의 주군인 록시디언 옆으로 복귀했다.
록시디언은 깔끔하게 정돈된 집무실 의자에 나른하게 앉아 생각에 잠겨 있었다.
어째서인지, 사납게 잘생긴 얼굴 위로 사냥을 성공한 맹수처럼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폐하.”
“왔냐?”
록시디언이 보지도 않고 대꾸했다.
이미 노아의 도착을 알고 있었음에도 평온한 목소리였다.
“공녀님께 왜 그런 제안을 하신 겁니까?”
노아는 회의실에 있을 때부터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물론 망설임은 있었지만, 호기심과 의문이 망설임을 이겼다.
“허, 뭐야. 웬일이지, 네가 남의 일을 다 묻고?”
“……폐하의 가족 아니십니까.”
노아는 이렇게 말하면서도 딱히 알맞은 대답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왜냐면 그는 딱 2주 전까지만 해도 샤를리즈가 이 수도에 없어서 속이 다 후련하다고 생각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내 부관이 대답을 하랬더니, 웬 헛소리를 하네.”
“…….”
“그럼 걔가 내 가족이지. 누가 내 가족이냐?”
“…….”
“왜, 탐나냐?”
록시디언의 말투는 한 나라의 황제가 하기엔 경박하고 저급하기까지 했지만 그 목소리와 얼굴엔 결코 무시 못 할 위엄과 압력이 느껴졌다.
노아는 천천히 시선을 들어 올렸다.
록시디언은 노아의 얼굴을 샅샅이 훑더니 이내 평소처럼 씩 짓궂게 미소했다.
“걔가 예쁘긴 예쁘지.”
“…….”
“암, 내 여동생인데.”
가벼운 목소리 속에 애정이 묻어 나왔다.
곧 싱글 웃는 록시디언의 눈이 맹수처럼 날카롭게 변했다.
“더러운 알츠베이트 손에 계속 둘 순 없지.”
툭, 록시디언이 팔걸이를 두드렸다.
비록 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 광증으로 인해 폭군이란 명칭을 가진 록시디언이지만, 사실 그는 머리만은 매우 현명하고 똑똑한 황제였다.
“이미 지난번에 나라에서 잠시 걔를 내쫓게 만든 사건, 기억하겠지.”
“네.”
“그 사건으로 알츠베이트에서는 걜 한 번 버리려 했어.”
사랑스럽고 멍청한 제 여동생은 외조부가 그를 아껴 마다하지 않는다 느끼는 모양이지만.
록시디언은 제 외조부가 얼마나 탐욕스럽고 비인간적인 인간인지 잘 알았다.
“지켜보고 있을 거다. 여기서 더 큰 악녀 짓이나 패악을 부린다면 공작은 결국 걜 포기 할 거다. 버리겠지. 쓸 만한 곳에다.”
록시디언은 크게 오해했다. 샤를리즈가 돈을 빌리러 온 상황에서 알츠베이트 공작의 인내심이 바닥을 보인다고 말이다.
정작 샤를리즈가 어디에 돈을 쓴 줄 알았다면 상황은 달라졌을지도 모르나, 그는 몰랐다.
“걘 더 큰 패악을 부리다 수습 못 할 사고를 칠 거야.”
“그럼, 공녀님께서 사고를 치신 그 순간엔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주워 와야지. 동생이잖아?”
록시디언이 제 얼굴을 손에 기대며 짓궂고도 나른하게 미소했다.
“모쪼록 못난 동생이 황실의 이름을 되찾는 날을 기대해야지.”
록시디언이 웃다 말고 설핏 찡그렸다.
“그 쭉정이 같은 레무트 놈도 좀 떼어 내고 말이지.”
지켜보던 노아가 작게 한숨 쉬었다.
“레무트 공작은 잘못이 없습니다. 폐하께서는 그저 공작이 공녀님을 받아 주지 않아서 짜증 나신 거지 않습니까.”
“아닌데?! 그냥 걔가 마음에 안 들어. 멍청한 내 동생이랑 안 어울린다고.”
“예. 예.”
록시디언의 찡그림이 깊어졌다.
“그 쭉정이 같은 레무트 새끼는 그만 좀 쫓아다닐 순 없나? 그놈은 뭐가 잘났다고 맨날 걜 거절해? 짜증 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