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 * *
다음 날.
공사가 끝났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나는 곧바로 채비해 레무트 영지로 훌쩍 떠났다.
비가 쏟아진 뒤라 그런지 날씨가 무척이나 맑았다.
‘오 꽤나 멀쩡해졌잖아?’
하루 만에 수습된 것치곤 길은 꽤 훌륭했다. 일꾼을 부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게다가 내가 부른 일꾼들은 의뢰했던 대로 길 보수에서 그치지 않고 무너진 집을 짓거나 보수를 돕고 있었다.
마차가 길을 지나 레무트 성내로 들어갔을 때 나는 익숙한 소리를 마주했다.
“공작님께서는 공녀님의 방문을 거절하셨습니다.”
오. 예상했던 거절이라 놀랍지도 않았다.
나는 팔짱을 끼고 기사를 지그시 쳐다봤다.
1초, 2초, 3초……. 기사가 땀을 뻘뻘 흘렸다.
“수잔, 노려보지 말렴.”
“…….”
“안나, 너도 몰래 노려보지 말고. 베스 너는 뒷짐 지고 욕하지 말고.”
그러자 내 뒤에서 기사를 열심히 째려보던 하녀들이 움찔하더니, 마치 버려진 강아지처럼 울먹울먹한 표정으로 날 올려다보았다.
……이렇게까지 날 따르는 사람들이 아니었는데.
비가 몹시도 내리던 날 돌아와서 몸살에 걸린 나를 열심히 간호한 뒤로 좀 더 극성이 됐다.
내가 간호 고맙다며 잔뜩 선물한 한정판 액세서리 때문일지도 모르겠지만.
“얘들아, 그렇게 노려봐 줘도 돈 안 줄 건데.”
“고, 공녀님……! 돈 때문이 아니에요!”
“맞아요! 돈 때문이 아니에요. 공녀님을 빗속에 내버려 둔 곳을 어떻게 미워하지 않을 수가 있나요!”
“맞아요, 공녀님은 심하게 아프셨는데!”
농담처럼 한 말인데 짹짹짹, 새가 우는 것 같은 항의가 우다다 쏟아져서 깜짝 놀랐다.
울상을 짓는 얼굴들이 하나같이 진심이라 기분이 조금 묘했다.
음, 샤를리즈의 악명과 편견을 이겨 낸 첫 번째 사람들이 바로 하녀들이 된 순간인가.
“……다들 알았으니 그만해.”
나는 괜히 그녀들을 돈만 좋아하는 걸로 오해한 것 같아 머쓱하고 낯 뜨거운 기분에 뺨을 붉혔다.
잠시 얼굴을 식히고 고개를 돌렸다.
“안에서 기다리는 게 안 되면, 전처럼 밖에서 기다리면 되겠지?”
어차피 문전 박대야 예상했던 바였다.
나는 본관 정문에서 돌아서서 마차를 세워 둔 정원으로 향했다.
‘이렇게 될 줄 알고 마차도 그 자리에 세워 놨지.’
약혼자님 입장에서 보면 참 진상이겠다 싶겠다. 미안합니다. 저도 억울한 게 많아서요.
그래도 제가 더 절박해진 건 당신네 수재민 돕다가 이렇게 된 것도 있으니 조금 이해해 주면 안 될까요.
“공녀님 카사네 차예요.”
“응.”
나는 언제나처럼 차를 마시며 정원을 지켜보았다.
노숙할 때는 보지 못했던 몇몇 꽃이 눈에 띄었다.
와, 쟤들은 되게 신기하고 예쁘게 생겼네. 색이 마음에 들어.
속으로는 끝이 언제가 될지 모를 줄다리기를 시작했다.
그래요, 약혼자님 당신이 잘생긴 얼굴을 보여 주는 게 먼저일지 내가 포기하는 게 먼저일지 한번 해보자고요.
그렇게 차를 홀짝이고 있는데, 어디선가 시선이 느껴졌다.
여기서 노숙한 뒤로 시중인들이 멀리서 신기한 듯이 보거나 기사들이 경계어린 얼굴로 감시하기도 했기에 혹시나 그들인가 싶었다.
그러나 눈이 마주친 건 의외의 인물이었다.
‘……아리아?’
나무 뒤에서 살포시 고개를 내민 건 약혼자님의 여동생, 아리아였다.
그녀는 눈이 마주치자 어깨를 움찔 떨었지만 눈을 피하지는 않았다.
심지어 머뭇거리며 다가오기까지 했다.
“아, 아,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오, 밝은 곳에서 보니 밤에 보았던 때보다 새하얀 피부가 더욱 눈에 띄었다.
창백하긴 하지만, 건강해지기만 하면 제국 제일가는 미인 소리도 어렵지 않게 들을 것 같은 미인이었다.
하긴 오빠가 그렇게 미인인 데다 오빠랑 비슷하게 생겼으니 당연한가.
“저, 고, 공녀님. 죄송해요…….”
인사를 하고서 바로 이어진 사과에 나는 어리둥절했다.
이 예쁘고 가냘픈 아가씨가 내게 무슨 잘못을 했던가?
기억을 뒤져 봐도 샤를리즈가 꼽 주면 줬지 그런 사실은 전혀 없는데.
“레무트 공녀가 내게 잘못한 게 있나요?”
“아! 그게, 지난번엔 죄송했어요, 저희 오빠가 오, 오해를 해서…….”
아. 나는 그날을 떠올렸다.
“몸은 괜찮으세요? 다친 곳은 없으신가요? 그, 그때 아프게 넘어지셨는데.”
“괜찮아요. 튼튼하거든요.”
나는 입단속을 시킬 겸 근처 하녀들을 한번 쳐다봐 주었다.
서로를 보던 하녀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 이 아가씨랑은 가까워져야 한단 말이야. 그래야 약혼자님이 한번 얼굴이라도 보여 주시지.
용안 보기 참 힘들다 힘들어.
“걱정 말아요. 아프더라도 나을 수 있는 돈이 많거든요.”
이렇게 말하다 아차 싶었다. 아픈 아리아 앞에서 할 말은 아니었다.
혀를 작작 놀려야지. 속으로 내 뺨을 내려치는데, 작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아리아가 숨죽여 웃고 있었다.
……어디에 빵 터진 거지?
“역시, 그동안은 제가, 오해한…… 부분이 있었나 봐요.”
“…….”
“세상에 알려진 공녀님의 이미지 때문에 편, 편견을 가졌던 것 같아서요.”
저기요, 이미지는 둘째치고 샤를리즈가 한 일은 기억하셔야죠.
며칠 전 마차에서도 보았지만 정말이지 순박한 이 아가씨는 몇 번 잘 대해 줬다고 어느새 경계를 풀고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꼬실 생각은 있었지만, 이쪽에서 이렇게 나오자 양심이 콕콕 찔려서 조금 난감해졌다.
“……차 마실래요?”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고작 이 정도였다.
이마저도 아주 좋다는 듯 아리아는 열심히 끄덕였지만.
“오빠는 지금 성을 비웠어요. 오후에는 중요한 손님이 온다고 그전에 잠시 나갔다 온다고 했거든요…….”
아리아가 합류해서 장점이 생겼다.
순진한 이 아가씨가 약혼자님의 거취를 술술 불어 주신 것이다.
‘손님이라.’
나는 아리아가 한 말을 곰곰이 곱씹었다.
고민은 아리아가 말을 걸며 흩어졌다.
“혹시 정원에서, 무얼 하고 계셨어요?”
“아, 이렇게 차나 마시면서 구경했죠. 꽃이 예쁘던데요? 특히나 저 꽃은…”
“꽃! 마, 마음에 드셨어요?”
아, 깜짝이야……. 아리아가 황급히 사과했다. 벌떡 일어나면서 외친 탓에 잔이 엎어졌지만 다행히 식은 차라 다친 사람은 없었다.
그녀가 어쩔 줄 모르며 더욱 사과했고 나는 괜찮다고 진정시켰다.
“저어, 저 꽃은 제가 가꾼 것이라 기뻐서 그만…….”
“직접 가꿨다고요?”
아리아의 취미는 원예로, 그중에서 기존의 종을 교배해 새로운 종자를 만드는 것에 관심이 많단다.
이야기를 듣다 보니 꽤 본격적이라 놀라웠다.
‘책 속에서는 안타깝게도 샤를리즈 때문에 불쌍하게 죽는 인물이었을 뿐이었는데…….’
건강이 좋지 않아 밖에 오래 있을 순 없지만, 나올 수 있을 때 틈틈이 열심히 한다며 활짝 웃는 아리아는 즐거워 보였다.
한창 설명하다가 아리아가 콜록콜록 기침을 시작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할까요?”
“네, 네?”
“들어가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러자 아리아가 눈에 띄게 어쩔 줄 몰라 하며 실망하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아리아의 앞에 손을 살살 흔들고는 생긋 웃었다.
“오늘만 날이 아니잖아요? 또 올 건데 그때도 건강해야죠.”
“……아!”
그제야 아리아가 끄덕이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침이 멈추질 않네.
걱정이 돼서 손수건을 내밀었더니, 하얀 뺨이 발그레해졌다.
“저, 저, 공녀님, 제가 감히 하나만 여쭤도 되나요……?”
“두 개 물어도 돼요.”
아리아가 내가 준 손수건을 품에 꼬옥 안았다.
살짝 콜록대면서도 창백한 얼굴로 방긋 웃었다.
“혹시, 이, 이, 이런 게 치, 친구 맞나요……?”
“…….”
나는 멈칫했다.
‘와, 순간 정화당하는 기분이었어.’
아리아를 통해 약혼자님과 좀 가까워지려 했던 사악한 의도가 정화당하는 기분이었다.
말을 잃었더니, 아리아가 어떻게 받아들인 건지 시무룩해졌다.
“그, 죄, 죄송해요. 감히 공녀님 같은 분과 제, 제가……. 그, 제가 친구가 없었어서 혹시나 이런 게 친구 맞나 해서…… 다른 나쁜 의도는 없었어요.”
어째 머리 위로 축 처진 토끼 귀가 보이는 것만 같았다.
“친구가 그렇게 어렵게 되는 건 아닐걸요?”
술 한 번 같이 먹었다고 백 년을 함께한 친구가 되자던 망나니 모임을 떠올리면서 말했다.
“그리고 내가 아는 대로라면 이미 나랑 당신은 친구고. 친구는 이름을 불러야죠. 아리아라 부르면 될까요, 아리아?”
아리아의 얼굴로 예쁜 미소가 피어났다.
“네, 네!”
다시 한번 이 예쁜 아가씨가 빠르게 죽고 말 인물이란 걸 떠올리면서 안타까워졌다.
책 속에서 이 아가씨의 치료법이 나왔던가?
이 아가씨가 건물까지는 잘 갈까 싶어서 일어나 앞장섰다.
그러자 아리아가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어미 닭 쫓는 병아리처럼 쫑쫑쫑 쫓아왔다.
“공녀님, 공녀님, 어디 가세요?”
“공녀님 아니고 샤를리즈요. 그리고 아리아 데려다주러 가요.”
“아! 샤, 샤를리즈…….”
웃는 이 아가씨를 보면서 어쩐지 약혼자님이 여동생을 그리도 싸고돌았던 이유가 단순히 병 때문만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을 한 번 더 했다. 그때였다.
웅성거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넒은 정원 너머 사람들이 몰려 있는 것이 보였다.
‘무슨 일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