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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23/194)

22화

그는 말없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저 남자의 어깨로 가려진 창문의 면적을 보며 새삼 이 남자의 덩치가 정말 크구나 느꼈다.

“벤.”

곧 그는 문을 열고 들어온 부관 벤과 대화를 몇 마디 나눴다. 조금 있자 벤이 옆방에서 꽤 부피가 큰 상자를 가져왔다.

아스킨은 탁자 위에 상자를 쾅 내려놓고 뚜껑을 열었다.

놀랍게도 금화가 가득 들어 있었다. 아스킨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추가로 주머니를 내던졌다.

짤랑, 묵직한 소리를 보아 금화가 잔뜩 든 주머니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주머니 사이로 금빛이 언뜻 보였다.

“지금은 보다시피 이 정도 양밖에 없다. 부족분은 정해진 날짜에 반드시 보내도록 하겠다.”

“…….”

어째, 반드시라는 말에서 이를 악문 기색이 느껴졌다.

찬찬히 이 남자를 올려다보며 책 속에 나온 이 남자의 모든 것을 떠올렸다.

비록 지금은 영지에 악재가 겹치고 여동생의 병환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빚을 지고 허덕이고 있지만. 이 남자는 부러질지언정 휘어지지 않는 대쪽 같은 성격의 소유자였다.

거기다 고결한 품성에 이런 치욕을 견디는 게 쉽지 않았을 거였다.

“그냥 파혼 안 하겠다고 하면 이렇게 돈 안 갚아도 되는데. 왜 자꾸 파혼하자고 하는 거야?”

“그걸 몰라서 묻나?”

“당신 입으로 직접 들은 적은 없는 것 같아서.”

“…….”

아스킨이 미간을 좁혔다.

“네가 싫다. 증오해. 사람을 멋대로 도구로 보고 나와 아니, 내게 하는 건 좋아.”

아스킨이 옅은 한숨을 쉬었다.

“아리아에게 치욕을 준 네가 세상 그 누구보다 싫다. 세상이 멸망해 너와 나만 남았더라도 내가 너와 여생을 보낼 일은 없을 정도로.”

나는 손을 뻗어 금화를 만지작거리다가 시선을 들어 올렸다.

“근데 전부 내 잘못만은 아니잖아.”

내 말에 아스킨은 역시나 억지를 부리려고 이 모든 짓을 했던 거구나, 하는 표정이 보였다.

나는 속으로 쓴웃음을 짓는 동시에 억지를 한 번 더 부렸다.

아직 빈정이 상한 건 여전했던 것이다.

“내 마음을 알아줬으면 그런 일까진 없었잖아.”

“할 말 다 했으면 이제 꺼져.”

내가 진짜 샤를리즈가 했을 법한 말을 꺼낸 건 그냥 물러나기 위함이 아니었다.

“아니, 당신에게 새로운 제안을 하려고.”

아스킨의 표정 위로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자유로워지고 싶지 않아?”

“네가 할 소리는 아니지.”

“그렇지. 하지만 묶은 자가 풀어 줄 수도 있는 것 아닐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나는 입을 축였다.

“1년. 단 1년만 나와 이 관계를 유지해 줘. 그래도 싫다면 이후로는 자유롭게 풀어 줄게.”

“웃기지도 않는 기만이군. 그 후엔 또 무슨 수작을 할 줄 알고?”

“마법으로 된 맹약을 해도 좋아. 목숨을 걸어 줄게.”

“허?”

아스킨이 찡그렸다. 불신이 더욱 큰 얼굴이었다.

“어폐가 가득하군. 네가 놔준다고 해도 빚은 남을 텐데.”

“그 빚…… 내가 갚아 준다면?”

“네가 새로운 채권자가 되겠군. 아주 지긋지긋해.”

이거야 원, 뚫리지 않는 방패를 보는 것 같았다.

나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샤를리즈야. 넌 대체 어떤 인생을 살았길래, 사람들이 도통 너를 믿지 못하냐…….

신용 사회였으면 너는 신용 불량자야. 알겠냐.

“그냥 여기서 목숨을 걸어 줘? 마법이 걸린 계약서가 있으면 가져와.”

다리를 꼬며, 아스킨을 올려다보았다.

“아니, 다음에 딱 한 번만 만나 줘. 내가 계약서를 챙겨 올 테니까. 한 번이면 돼.”

“내가 왜?”

“속는 셈치고 딱 한 번만 만나면 모든 걱정이 해결되는 셈이잖아? 만약 내가 속인 거라고 해도, 당신은 파혼을 강행할 테고 달라지는 건 없어.”

“…….”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신도 시간이 필요하겠지. 한번 생각해 봐. 당신 말대로 내가 갑자기 더 미친 사람처럼 만나는 데만 집착하는 게 이상하지 않았어? 만나자고만 했지 다른 수작은 벌이지 않은 것도 처음이잖아?”

샤를리즈는 마음에 드는 게 있으면 무엇이든 포장해서 아스킨에게 선물했다.

거기에 아스킨의 의지는 없었고, 다음에 아스킨이 그 물건을 버리기라도 하면 그에게나 그의 주변 인물에게 패악을 부렸다.

어디 그뿐인가. 레무트 가문 기사들에게 패악을 부렸던 건 어떻고.

“……빨리 돈이나 들고 나가.”

어쨌거나 드디어 기회를 마련한 자리는 수확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

저 남자의 얼굴이 처음으로 흔들렸으니까.

그래, 제발 부탁이니 1년 유지한다는 계약만 하자. 거기 도장 찍어 주면 아주 그냥 얼씬도 하지 않을게!

속으로 파이팅을 외치며 금화 상자를 들었다. 아니, 들려고 했다.

‘이거 뭐야, 왜 이래?’

상자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내가 당황한 얼굴로 낑낑대고 있는데,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면 아스킨이 못 볼 꼴을 본 듯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황당함마저 느껴지는 시선이었다.

“……하인을 부르면 될 것이지. 지금 뭐 하는 거지?”

“아.”

그러게. 나는 이게 이렇게 무거울 줄 몰랐지.

“나는 금화의 금액을 무게로 측정해서.”

나는 아스킨의 핀잔에 뻔뻔한 표정으로 그렇다고,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이쪽의 표정이 더욱 이상해졌지만.

“그나저나 당신 날 걱정해 준 거야? 감동이네. 우리 계속 약혼하자.”

“……헛소리하지 말고 돌아가.”

“그렇게 거절하는 모습도 매력적이긴 해.”

난 기분이 좋아져 되도 안 될 수작을 걸었다.

싱긋 웃자, 아스킨의 표정으로 정말 미친 사람 보는 듯한 표정이 스쳤다.

“그래, 알았어. 또 봐. 이쁜아.”

“이쁜…… 뭐?”

“아, 당신이 나보다 더 예쁜 것 같아서.”

때마침 하인이 도착했다. 그럼, 안녕. 하고 나는 산뜻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이동했다.

그러다 아직도 서 있던 벤과 시선이 마주쳤는데, 왜인지 그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뭐지, 웃음을 참는 표정이었던 것 같은데. 뭐. 모르겠다. 알 게 뭐람.

그렇게 금화 상자와 주머니를 든 하인을 대동한 채로 마차 앞에 도달했다.

막 마차를 타려 하는데, 타다닥, 작은 발소리가 들려왔다.

“고, 공녀님!”

“공녀님! 공녀님!”

놀랍게도 아까 사람들 틈에 있던 이 영지의 아이들이었다.

뭐야, 쟤들이 왜 아직 여기에 있어? 게다가 내 마차 주변에?

나는 호위 기사들에게 손짓했다. 그러자 기사들에게 가로막혔던 아이들이 주춤주춤하면서 다가왔다.

나는 주변을 돌아봤다. 꽤 떨어진 곳에 서 있는 영지민들이 보였다.

뭐야, 아직 안 돌아갔어? 혹시나 아리아도 있나 싶어 둘러보았는데 다행히 아리아는 없었다.

“저어, 공녀님…….”

아이들이 더는 다가오지 못하길래 내가 직접 다가갔다.

남자아이와 여자아이 둘. 셋은 서로를 마주 보더니 쭈뼛거리며 손을 내밀었다.

“기, 기다리고 있었어요!”

“마, 맞아요!”

“날 왜?”

아이들의 조그만 손에는 붉고 조그만 열매가 잔뜩 들려 있었다.

“저희가 지, 직접 딴 산딸기예요!”

“맞아요, 공녀님 꼭 드리려구요!”

“엉니랑 가치 따써요!”

아이들은 남자아이가 제일 크고 나이가 많아 보였고 그다음으로는 여자아이 하나.

마지막으로 가장 작은 여자아이는 이제 막 일곱 살쯤 되었을까 싶었다.

이빨이 빠져서인지 발음이 샜다. 게다가 자매인지 여자아이들끼리는 똑같이 생겼다.

나는 산딸기를 빤히 쳐다보다가 하나를 집어 들었다.

오늘 땄다는 말이 사실인지, 산딸기는 아주 신선해 보였고. 색이 아주 고왔다.

나는 망설임 없이 이걸 입에 넣었다.

옆에서 기사들이 놀라는 기색이 느껴졌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피식 미소했다.

“나쁘지 않네.”

오, 달다.

“이런 걸 공짜로 받을 수는 없지.”

나는 돌아가 하인의 손에 있던 주머니에서 금화를 꺼냈다.

그러고는 아이들의 손에 하나씩 쥐어주었다. 아이들이 들고 있던 산딸기는 근처에 있던 호위 기사들 손에 들어갔고 말이다.

“내 인생에 공짜는 없어. 그건 대가란다. 가서 과자나 사 먹으렴.”

“어, 어어.”

“바, 받으려고 한 거 아닌데요!”

아이들이 어리둥절해 하자, 나는 눈을 가늘게 찡그렸다.

“어머나 세상에. 어린 것들이 벌써부터 돈을 밝히네.”

“네, 네?!”

“자, 이게 다야. 더는 안 돼.”

나는 아이들의 조그만 손에 금화를 하나씩 더 얹어 주고는 슬쩍 밀어 주었다.

다만 가장 작은 아이의 손에는 금화 두 개는 너무 컸다.

다 오므리지 못하는 걸 보다가, 헝클어진 머리에 시선이 도달했다.

“머리가 엉망이네.”

“헉, 뛰, 뛰어와서 그러뜹니다!”

가장 작은 아이는 이빨이 빠져서인지 새는 발음으로 허둥거렸다.

나는 머리에서 작은 핀을 빼서는 손위에 올려 주었다.

“핀으로 고정해.”

“헉, 너무 반짝거려요.”

나는 씩 웃으며 작은 아이를 언니로 보이는 아이에게 내밀었다.

빨리 가라고. 떠미는 손에 아이들은 어어, 하면서도 물러났다.

아이들이 돌아가고, 나는 기사 손에 들린 산딸기를 하나 더 입에 넣었다.

와, 이거 새콤한 게 맛있네.

“경도 하나 먹을래?”

“……아, 아닙니다!”

맛있어서 내민 건데. 내가 독을 내밀기라도 한 것처럼 사색이 되길래 관두기로 했다.

그렇게 마차에 막 올라서려 할 때였다.

반대편에서 마차 한 대가 들어오고 있었다. 그 마차는 내 마차 주변에 멈춰 서더니, 곧 문이 열리고 누군가 내려섰다.

‘누구지?’

마차에는 문양이 달려 있었지만, 어딘지 알아볼 수 없었다.

샤를리즈가 기억 못 하는 거거나, 샤를리즈가 관심을 두지 않았던 가문이란 말인데.

어느 쪽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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