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화 (24/194)

23화

곧 내려선 사람을 똑바로 볼 수 있었다.

회갈색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였다. 어딘가의 학자라 해도 믿을 수 있을 만큼 온화한 인상에 긴 눈매가 인상적인 미남이었다.

아주 연한 에메랄드색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성큼 다가오고서야 알았다. 여우라고 해도 좋을 긴 눈매 아래로 콕 찍힌 눈물점이 인상적이었다.

그래서인지 날 보며 휘어진 눈이 유달리 요사스러워 보였다.

“이야, 제국 제일의 미인을 이곳에서 뵙게 되어 실로 영광입니다. 아니, 오랜만이라고 하면 되겠습니까?”

나른한 듯 다정한 목소리가 귀를 사로잡았다. 나는 반응하지 않고 눈썹만 들어 올렸다.

‘뭐지, 너무 잘생겼는데…….’

내가 이곳에 와서 본 최고의 미남은 단연 약혼자님이었다.

그와 비슷한 정도가 폭군 오빠. 다음으로는 서브 남주인 노아 정도라고 할 수 있을까.

어쨌거나 대단한 수준의 미남은 전부 책 속 인물이거나 샤를리즈와 엮인 인물이었단 소리다.

그런데 샤를리즈를 잘 아는 것처럼 보이는 지나치게 잘생긴 미남이라니? 거기다 저 색 조합, 소설 남주들 중에는 없던 조합인데?

민트색인지 에메랄드색인지 유난히 옅고 투명한 색의 눈동자였다.

“뭐야, 왜 알은척이야?”

“아, 이런. 그렇군요.”

슬쩍 떠보자, 남자가 싱긋 웃었다.

“오늘은 초면입니까?”

기분 나쁜 기색 없이 제 손을 내밀었다. 나는 손을 내주지 않았다.

남자는 이번에도 기분 나쁜 기색 없이 자기 손을 거둬들이고는 그대로 가슴에 붙이고 정중하게 인사했다.

완벽한 예법이었다.

“저는 차일드 가문의 장자, 이안 차일드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알츠베이트 공녀님.”

이안, 이쪽 이름은 처음이지만…… 성은 익숙했다.

‘뭐야, 할아버지가 아스킨이랑 파혼시키고 약혼시키려 했던 가문이잖아?’

이름 똑똑히 기억해 두었다.

그리고 지나치게 잘생긴 이 얼굴도 기억해 뒀다.

분명 샤를리즈 기억엔 없지만 잘생긴 데다 이 태도를 봐서는 분명 샤를리즈가 건드렸다! 뭔가가 있다!

‘그래, 얘도 샤를리즈의 업보구나…….’

나는 속으로 긴장하면서도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으며 도도하게 등을 돌렸다.

여기선 방어 태세를 유지해야지. 본능적으로 경계를 올리고는 그대로 마차에 올라탔다.

오늘은 약혼자님과 대화한 걸로 충분했다.

마차에 올라서야 보았지만, 이안이라는 남자는 내 마차가 멀어질 때까지 정중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아주 오래도록.

* * *

이안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온화하게 웃는 미소가 그의 얼굴에 가면처럼 남아 있었다.

그는 웃는 얼굴 그대로 흰 장갑을 낀 손으로 입술을 문질렀다.

‘흐음, 저 반응은 무엇일까.’

그는 사실 샤를리즈를 가까이서 본 것은 처음이었다.

줄곧 타국을 오가며 업무를 치르느라 바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입이 가볍고 소문을 좋아하는 아우를 둔 탓에 악독한 공녀의 자자한 소문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샤를리즈 알츠베이트의 미모는 실로 놀라웠다.

사람들은 말했다. 처음 본 순간 천년의 사랑을 고하게 만드는 미모다.

그리고 그 사랑을 갈기갈기 찢어 버리는 악독함을 가지고 있노라고.

‘뭘까.’

오히려 샤를리즈는 나무 끝에 매달린 탐스러운 과실 같았다.

아슬아슬하게 매달린 열매일수록 사람을 더욱 유혹하지 않는가.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아름다운 미색에 이끌렸다가 혹은 이용하려 했다가 호된 상처를 입고 돌아갔다고 들었다.

하지만…….

“……독이 든 사과라는 표현이 딱 어울리는군.”

이안이 샤를리즈가 사라진 곳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소백작님.”

“아, 그래.”

이안이 부관의 부름에 고개를 돌렸다.

오늘 이곳에 걸음한 것은 중요한 사유가 있어서가 아니었던가.

“가지.”

그는 얼마가지 않아, 이 허름한 성의 주인 레무트 공작을 만날 수 있었다.

아스킨 레무트.

비록 선조가 쌓은 부와 명예를 잃고 이 허름한 성에서 버티는 자였지만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이안 차일드입니다. 노쇠한 아버지를 대신해서 자리하게 되었습니다.”

“……차일드 백작이 오기로 했을 텐데?”

이안이 빙긋 웃었다.

“아버지가 직접 오셨다면, 분명 계획이 이루어지기도 전에 알츠베이트의 눈에 띌 겁니다. 각하.”

“멍청하지는 않나 보군.”

이로서 이안은 레무트 공작이 차일드 가문과 자신을 잠시 시험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딱히 기분이 상하진 않았다.

“각하, 이제 마음은 굳히셨습니까?”

우리의 손을 잡을 결심이 서셨느냐, 이런 뜻이 담긴 질문에 아스킨은 아무런 표정도 보이지 않았다. 그랬다.

차일드 가문에서는 아스킨 레무트의 빚을 갚을 돈을 빌려주는 대신에 그에게 협력하자 손을 내밀었다.

단, 이 돈은 알츠베이트가 했듯이 억지 약혼을 동반하거나, 평생을 갚아도 갚지 못할 이자가 추가되는 계약은 아니었다.

오직 원금 상환만 하는 조건. 거대한 돈을 빌려주면서 이자조차 받지 않는다.

아스킨에게는 의아할 정도인 파격적으로 좋은 조건이었다.

“한 가지만 묻지. 차일드 가문에서 막대한 손해를 감수하고 손을 내미는 이유가 뭐지?”

이안이 느끼기에 이 자는 흙 속에 묻힌 진주, 아니, 그중에서도 천년에 한 번 발견되는 진주와도 같았다.

비록 지금은 안타깝게도 흙 속에 묻혀 있으나, 세상에 빛을 발할 자였다.

“저와 아버지는 각하의 능력이 아깝다고 감히 생각합니다. 어찌 보면 노블리스 오블리제, 가지고 있는 부를 세상이 더 좋게 돌아가도록 정의를 위해 힘쓰는 것이라 보셔도 무방합니다.”

이안이 손바닥을 내밀었다. 이안이 보기에 아스킨 레무트는 아주 단단한 남자였다.

“각하께서 빌린 돈 이상으로 부당한 대우를 받고 빚에 휘둘리는 처지임을 압니다. 그런 것에 인생을 걸지 마시고 각하의 능력을 더 좋은 곳에 써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의 얼굴로 정중한 미소가 떠올랐다.

무해한 척하는 것은 그의 오랜 주특기였다.

“게다가 저희 차일드 가문은 5대 상단 중 하나를 이룩한 가문, 각하께서 정비해 주신 ‘옐로우 로드’를 이용하는 자로서 각하께는 오랜 빚이 있습니다.”

옐로우 로드.

노란 황무지 위에 만들어진 길이라 이렇게 이름 붙여진 길이다.

본래 제국 서쪽에는 거대한 황무지와 함께 몬스터가 수없이 득실거렸는데, 이런 몬스터들을 토벌하고 상단이 오갈 수 있는 안전한 길을 만든 자가 바로 눈앞의 아스킨 레무트.

심지어 그가 무려 스무 살에 이룩한 일이었다.

아스킨은 이안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안은 의문과 함께 호기심을 느꼈다.

‘아버지의 말로는 분명 거의 넘어왔다고 들었는데, 오늘 보니 그렇지도 않군. 그사이 심정의 변화가 있을 법한 일이 있었나?’

아스킨은 차일드의 제의를 수락하기로 거의 확정한 거나 다름없으며, 오늘 그 답만 들으면 된다고 하였는데. 오늘 보니 그렇지도 않아 보였다.

이안은 고민하는 아스킨에게 말했다.

“도움을 드리고 싶으나 불행히도 저희 가문도 여유롭지만은 않음을 이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언제까지 답을 주면 되지?”

“일주일 안에 최종 답변을 주십시오. 기한이 넘어가면 없던 계약으로 생각하겠습니다.”

이안은 할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득 궁금해졌다.

확고한 의지를 보이던 이 남자가 망설이게 만든 원인은 무엇일까?

개인적이 호기심이었다. 가끔 도지는 호기심은 그의 나쁜 버릇이었다.

어쩐지 이유를 알게 되면, 흥미가 주체할 수 없이 커지지 않을까 하는 예감과 그럼 큰일인데 하는 불안이 함께였다.

“아, 그러고 보니. 오늘 입장하면서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아직은 이 호기심을 멈출 수 있다.

이안은 호기심을 가지지 않으려 다른 화제를 꺼냈다.

“알츠베이트 공녀님께서 최근 이 영지에 있었던 수재로 인한 수재민들을 도와주신 모양이더군요?”

아스킨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이안은 조금 놀랐다.

이런 역린을 건드린 건가.

“그래서 거기에 대한 고마움을 표하기 위해 영지민들이 자발적으로 특산물을 모으고 오늘 공녀를 기다렸다던데, 각하의 영주민들은 은혜를 아는 자들이로군요.”

그렇지 않아도 마차가 들어가는데 한창 짐이 쌓여 있기에 또 호기심이 돌아 마차를 멈추면서까지 물어본 사정이었다.

그 알츠베이트 공녀가 자발적으로 영지민들에게 베푼 것도 신기했건만…….

더 놀라운 것은 이 이야기를 들은 아스킨의 반응이었다.

‘어째서 이리 놀라는 거지?’

흡사 몰랐던 것처럼 구는 아스킨의 모습에 이안이 고개를 갸웃했다.

샤를리즈와 아스킨. 소문으로는 두 남녀는 아스킨이 일방적으로 증오하는 사이라 들었건만.

못된 고양이 같은 호기심이 자꾸만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럼 각하, 부디 긍정적인 답을 기다리겠습니다.”

이안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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