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 * *
“으으으. 으윽.”
“어떡해, 공녀님 괜찮으세요?”
나는 발을 동동 구르는 수잔에게 가까스로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아니, 사실은 안 괜찮아. 죽을 것 같아…….
레무트 영지에서 저택에 돌아온 뒤 1시간도 안 돼서 배탈이 났다.
수잔의 옆에선 안나와 베스가 각기 물수건과 물잔을 들고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지난번엔 몸살로 간병하더니, 이번엔 배탈로 신세 지게 생겼다.
‘으윽, 오늘따라 운이 좋더라니…….’
약혼자님과 대화하는 데 성공한 것에 대한 대가냐. 그런 거냐고.
인생사 새옹지마라지만 이건 너무 심하지 않냐고, 속으로 투덜거렸다.
곧 기다리던 의원이 도착했다.
나이가 지긋한 의원은 아파서 살벌해진 내 시선 속 땀을 뻘뻘 흘리며 진찰을 진행했다.
“저어, 크흠, 고, 공녀님 혹시 오늘 무엇을 드셨습니까?”
“나…… 하루종일, 먹은 거, 산딸기 밖에 없는데…….”
그러자 의원이 주름진 눈을 크게 떴다. 이내 허둥지둥하더니 내게 약을 처방해 주었다.
아마 산딸기가 문제인 거 같다며 모든 처방이 끝난 뒤엔 거의 도망가다시피 방에서 사라졌다.
샤를리즈가 이전에 숙취로 저 사람을 많이 괴롭혔던지라 저런 반응을 이해했다.
‘으윽, 딸기가 문제라니, 그렇게 맛있었는데…….’
아니, 운이 나빠도 이렇게 나쁠 수가 있나.
“아픈 건 싫다고…….”
중얼거리며 살벌하게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데, 문 근처에서 누군가 숨을 삼켰다.
돌아보면 호위 기사 둘이 잔뜩 사색이 된 표정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다가 시선을 돌렸다.
어째 아픈 건 난데 전전긍긍하는 기색이었다.
‘아, 샤를리즈가 아프면 저 사람들한테도 패악을 부렸구나.’
샤를리즈는 숙취든 가벼운 두통이든 아픔을 견디지 못했고, 그때마다 주변 사람들에게 있는 대로 짜증을 냈다.
물론 나는 그럴 생각도 없고 기운도 없어서 그대로 누워 버렸다.
아픈데도 짜증을 낸 샤를리즈의 기력이 참 대단하네. 아, 죽겠다…….
이럴 때 치료 마법사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우리 집에 머물던 그 사람은 멀리 출장을 갔단다. 아쉽기 짝이 없었다.
그사이 호위 기사들은 문을 나서고 없었다. 저 사람들 어디 간 거래?
항상 떨어지라 명령하지 않는 한 조용히 내 뒤를 지키는 사람들이라 문득 궁금함이 치밀었지만 곧 아픔에 잊혀졌다.
“공녀님…… 약이에요. 드시고 한잠 주무시면 좀 나으실 거예요.”
“어…….”
기운이 없어 고맙다는 말도 못 하고 그대로 눈을 감았다.
그렇게 얼마나 잤을까.
눈을 떴다.
‘음, 시간이 얼마나 흘렀지?’
하늘을 보아선 그리 오래 지나간 것 같진 않았다.
부스스 일어나려 하는데, 하녀들의 얼굴이 보였다.
“아, 고, 공녀님. 일어나셨어요?”
“괜찮으세요?”
그런데 왜일까.
‘표정들이 왜 이래?’
나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면서 머리를 쓸어 넘겼다.
확실히 약이 효과가 있었는지 잠들기 전보다 훨씬 나았다. 나는 편안해진 기분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난 괜찮은데.”
뭔가 바뀐 건 없는 것 같은데, 표정들만 이상하네.
나는 고개를 기울였다.
“무슨 일 있어?”
“아, 그게…….”
하녀들이 서로를 쳐다보다가, 수잔이 대표로 나섰다.
“밖에 호위 기사님들이 대기하고 계세요. 공녀님께서 일어나시는 대로 꼭 뵙고 싶다고요.”
“뭐야, 그럼 그냥 들어와서 기다리면 되지.”
내가 깨어날까 봐 밖에서 기다린 건가?
“그게…… 호위 기사님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요.”
“아이들?”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수잔이 기사를 들여도 되겠냐고 해서 얼른 끄덕였다.
곧 문이 열리고 잠들기 전 보았던 호위 기사 두 명이 들어왔다. 그리고 그들의 손에는 잔뜩 얼어붙은 아이 둘이 함께 끌려 들어왔다.
‘쟤들은…… 산딸기를 줬던 애들이잖아?’
익숙한 얼굴들이었다.
그때는 셋이었는데 그나마 가장 작은 아이는 같이 데려오지 않았는지, 둘뿐이었다.
뭐야, 기사들이 쟤들을 왜 데려왔어? 찬찬히 보던 나는 곧바로 깨달았다.
설마, 내가 기사들에게 화풀이할까 봐 꼬마들을 붙잡아 온 거야?
샤를리즈는 아프면 신경질적이 됐고, 그 여파는 주변인들이 받곤 했다.
자연히 호위 기사들 또한 패악질의 큰 피해자 중 하나가 되곤 했다.
‘설마 자기들 화풀이를 피하기 위해서 애들을 방패로 세울 줄이야.’
나는 표정 관리를 하지 못하고 찌푸렸다.
‘……이걸 어디서부터 바로잡아야 하냐.’
저 기사들 중에는 나를 안아 올렸던 제트라는 잘생긴 기사는 없었다.
그냥 익숙한 얼굴들이었다. 자신들이 잘했다는 듯 눈치를 보는 얼굴들을 보고 있으려니 부아가 치밀었다.
“공녀님, 감히 공녀님께 배탈을 야기한 괘씸한 아이들을 붙잡아 왔습니다!”
“벌을 내려 주십시오!”
“…….”
내가 대답이 없자 기사들은 서로를 보며 더욱 진땀을 흘렸다.
내가 단단히 화가 났다고 느낀 것 같았다. 그래, 화가 나긴 했다. 아무 생각도 없었는데 저 애들을 데려왔다는 것에서.
“……내가 언제 저 꼬맹이들을 데려오라고 했지?”
“네, 네? 하, 하지만 공녀님께서는 사, 산딸.”
“너흰 명하지 않아도 움직인다고?”
“…….”
“앞으로도 멋대로 움직이겠다?”
“…….”
우물쭈물하던 기사들이 얼른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그, 그저 공녀님을 감히 아, 아프게 한 자들을…….”
“변명은 필요 없어. 고개 들어.”
내 차가운 목소리에 기사들이 덩치에 맞지 않게 머뭇거리며 머리를 들었다.
내 시선에 잔뜩 움츠러든 모습이었다. 나는 그들 보고 나가라고 했고, 기사들은 기다렸다는 듯 냉큼 도망갔다.
‘……할아버지가 대체 어떤 기준으로 붙여 준 건지 궁금할 지경인데.’
실력은 확실한데 눈치가 모자란 사람들인가.
아니면 지나치게 겁을 먹어서 약아 빠지게 된 건가. 어느 쪽이든 샤를리즈의 업보이리라.
나는 한숨을 푹 쉬고 턱을 괬다.
이제 남은 건 기사들이 남기고 간 아이들이었다.
아이들은 차마 나를 보지도 못하고 바닥을 본 채로 달달달 떨고 있었다.
산딸기를 줄 때만 해도 해맑게 웃는 평범한 아이들이었는데.
“수잔, 난 옷을 좀 갈아입어야겠어.”
자면서 땀을 흘렸더니 찝찝했다.
“저 애들은 응접실로 데려다줘. 그리고 내가 먹는 과자를 준비해 주고.”
샤를리즈는 달콤한 디저트를 좋아했다. 이 저택에는 항시 그녀의 입맛에 맞춰진 디저트가 준비되어 있었으므로 어렵지 않은 주문이었다.
게다가 내 방에도 약을 먹고 입가심을 위해 사탕이 남아 있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아이들의 손에 사탕을 하나씩 쥐여 주었다.
“떨지 말고 이거 먹어.”
아이들의 눈이 잘게 떨렸다.
사탕과 나를 번갈아 보다가 내가 끄덕이자 사탕을 조심스럽게 꾹 쥐었다.
“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흐끅.”
하녀들이 아이들을 잘 달래서 데려가고, 나는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그리고 응접실을 들어갔을 때였다.
아이들은 과자가 잔뜩 차려진 탁자 앞에 앉아 있는데, 어째서 잔뜩 차려진 과자는 조금도 줄지 않은 상태였다.
아이들은 오히려 내가 준 사탕을 손에 쥔 채로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뭐지?’
나는 어깨에 걸친 숄을 고쳐 메며 아이들의 맞은편에 앉았다.
내가 앉기 무섭게 아이들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분명 사탕을 주면서 애들 표정이 풀렸던 것 같은데, 어떻게 된 일이지?
“왜 과자 안 먹었어? 별로야?”
“……그, 그.”
“떨지 마. 너희 잘못한 거 없잖니?”
내 말에 아이들이 서로를 보더니 이내, 커다란 눈에 눈물이 고였다.
여자아이는 참지 못하고 히끅히끅 울었다.
“……왜 과자 안 먹고 기다렸어?”
남자 아이 쪽이 머뭇거리며 말했다.
“기, 기사님들이, 고, 공녀님 앞에선, 아무것도 하지 말고 가, 가만히 서 있으라고 했어요. 그렇지 않으면, 엄마랑 아빠를 모, 못 보게 할 거라고…….”
미쳤군. 나는 속으로 짧게 욕을 했다. 애들에게 무슨 협박을 한 거야.
말을 마치자마자 서러웠던 건지 남자아이마저 울음을 터트렸다.
나는 난감한 얼굴로 아이들을 응시했다.
딴에는 열심히 과자를 더 나눠 주며 달래 보려 했지만 아이들은 여전히 겁에 질려서 눈물을 뚝뚝 떨어트렸다.
‘아이고, 악녀에게 엮여서 니들이 고생이 많구나.’
나는 여전히 난감한 기분으로 응접실을 돌아보다가 한 곳에 시선이 꽂혔다.
시선이 꽂힌 곳은 장식장으로, 나는 벌떡 일어나 그곳에 다가가 장식품을 챙겨 와서 아이들 손에 하나씩 쥐여 주었다.
“자, 이거 봐. 엄청 비싼 거란다.”
내 손에도 똑같은 장식품이 들려 있었다.
이건 마법으로 만든 장식품인데, 내가 바닥에 스위치를 켜자 나비의 환상이 나타나더니 나풀거리며 내 주변을 날아다녔다.
아이들이 울음을 그치고 감탄을 토했다.
‘좋았어, 통했다.’
나는 장식품을 탁자 위에 내려놓고, 아이들이 갖고 있던 것을 가리키며 직접 켤 수 있게 방법을 알려 주었다.
여자아이가 가지고 있던 장식품에서는 새하얀 토끼가 톡 튀어나와서 깡충깡충 뛰어다녔다.
남자아이가 가지고 있던 장식품에서는 커다란 재규어가 나타나서는 느릿하게 하품을 했다.
오, 진짜 같네. 나도 샤를리즈 기억에만 있던 물건이라 신기하게 구경했다.
“더는 울지 않으면 이거 너희 줄게.”
“저, 정말요?”
“응. 나는 애들이 우는 건 좋아하지 않아.”
도도하게 말하자, 아이들이 얼른 눈물을 열심히 닦았다.
그러더니 장식품을 품에 소중히 안은 채로 살며시 내 눈치를 봤다. 나는 웃음을 참으며 끄덕여 주었다. 그래, 너네 거야.
그렇게 애들의 표정이 밝아졌을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