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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화 (26/194)

25화

두 아이 중에서 여자아이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애써 풀어줬더니 다시 공포 어린 얼굴이라 고개를 갸웃했다.

“고, 공녀님. 죄, 죄송해요.”

“뭐가?”

“피렌이, 아, 피렌은 제 여동생이에요, 그, 그 애가…….”

여자아이가 그쳤던 눈물을 뚝뚝 흘렸다.

“공녀님이 주신 머리핀을 잃어버렸어요……. 그래서 밤까지 열심히 밖을 돌아다니면서 찾다가 가, 감기에 걸렸어요.”

아마 산딸기를 줄 때 함께 있던 가장 작은 여자아이를 말하는 거구나 싶었다.

그때 분명 내 머리에 있던 핀을 하나 같이 주었지.

사실 아이들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될 만큼, 샤를리즈에게는 장식품이 아주 많았다.

나는 아이의 마음을 가볍게 해 주기로 했다.

“상관없어. 버리려던 거니까.”

“하, 하지만…….”

“또 우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서랍장을 향했다.

그리고 나비가 장식된 핀을 하나 가져와서 아이가 안고 있던 장식품 위에 올려 주었다.

“자, 이거 주고 걔도 그만 아프라고 그래.”

아이가 놀란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더니 울음을 꾹꾹 참으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때였다. 문이 열리더니 하녀 안나가 조심스럽게 들어왔다.

“공녀님, 공작님께서 찾으십니다.”

“그래?”

……그 할아버지가 또 무슨 일로 날 찾는대?

한편으로는 용건이 무엇일지 익히 짐작이 갔다. 나는 아이들을 한번 보았다.

“안나, 얘들 내가 먹는 과자랑 간식 좀 잔뜩 사서 같이 보내 버려. 안고 있는 장식품도 들기 좋게 포장해 주고.”

고민하다가 한마디 더 붙였다.

“나한테는 더는 필요 없는 거니까.”

아이들이 서로를 쳐다보다가 남자아이가 먼저 의젓하게 고개를 깊이 숙였다. ‘고맙습니다, 공녀님!’ 여자아이도 호다닥 남자아이를 따라 인사했다.

나는 끄덕이고는 응접실을 나섰다.

나서면서 남아 있을 안나에게 혹시나 기사들이 괴롭히지 못하도록 내 말을 전하도록 시키고 떠났다.

* * *

피아체는 레무트 영지에 사는 아이였다.

옆에 있는 피나는 피아체의 사촌 여동생이었다.

두 사촌 남매는 용기를 내서 샤를리즈에게 산딸기를 주었던 아이들이기도 했다.

그 산딸기가 화근이 되어서 이 저택에 거의 끌려오다시피 잡혀 왔지만.

아이들은 돌아가는 지금 억지로 끌려온 기억은 모두 잊어먹었다.

공녀님은 예쁘고, 또 엄청 예쁘고 완전 착하셔!

피아체는 품에 안고 있는 상자를 보면서 눈을 깜빡였다.

여동생인 피나도 비슷한 표정이었다.

돌아가서 엄청 자랑해야지.

오빠, 나도 나도!

그리고 이런 아이들을 마차로 안내 중인 하녀는 셋이었다.

안나를 제외하면 아직 샤를리즈가 여행에서 돌아온 뒤로 가까이서 본 적 없는 하녀들이었다.

그렇기에 그녀들에게 샤를리즈는 여전히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들은 손에 디저트며 간식 꾸러미와 장난감을 잔뜩 손에 쥔 채로 쑥덕거리기 바빴다.

“……그거 같지?”

“그래, 그거지. 그거.”

하녀 하나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이 아이들의 입막음을 위해서 준 거겠지.’

샤를리즈가 또 무슨 사고를 친 건지 몰라도, 그녀는 이전부터 항상 돈이나 물건으로 사람들의 입을 막아 왔다.

이 이름 모를 아이들에게 잔뜩 안겨 준 것들도 지금까지와 다를 바 없는 일이라고 하녀는 생각했다.

물론 대상이 예전처럼 귀족이 아닌 건 이상했지만. 그렇다고 아주 이상하지 않았다.

샤를리즈가 돈이나 물건으로 입막음하는 건 1차로 사용하는 방법이었고, 다음엔…… 죽여 입을 막는단 소문이 자자했으니까.

안나를 제외한 하녀들은 아이들을 불쌍하게 보았다.

‘가엾어라, 아직 어린데……. 자칫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니.’

이를 모르는 아이들은 몹시도 밝아 보였다. 하녀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마차로 향했다.

* * *

할아버지가 나를 불렀지만, 나는 곧바로 할아버지의 집무실로 가는 대신 내 방에 잠시 들렀다가 출발했다.

가지고 가야 할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왔느냐.”

집무실에 도착했을 때, 할아버지가 소파에 앉은 채로 읽고 있던 신문을 내려놓았다.

나는 홀로 들어오지 않았다.

함께 들어온 하인들에게 고갯짓하자 그들이 조심스럽게 탁자 위에 물건을 올려 두었다. 상자가 하나도 아니고 여러 개가 잔뜩 쌓였다.

할아버지의 얼굴로 의문이 스쳤다.

“이것이 무엇이냐?”

나는 생긋 웃었다.

“무엇이겠어요, 할아버지. 레무트 공작이 이번 달에 낼 이자죠.”

하인들에게 눈짓해서 상자를 열게 했다. 잔뜩 쌓인 금화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레무트 영지에 간 김에 공작에게 이번 달 이자를 전부 받아 왔어요. 지난달보다 4배 많은 이자 맞죠? 이런 것들은 받을 수 있을 때 받아야 하지 않겠어요.”

그러자, 할아버지의 얼굴로 놀라움과 함께 흡족함이 떠올랐다.

“……네가 철이 없어 항상 걱정했다만 이 할애비의 노파심이었던 모양이구나. 아주 좋아. 역시 내 손녀라면 이래야지.”

약혼자님에게 받아 온 금화와 폭군 오빠에게 빌려온 금화 일부를 포함한 금액이었다.

약혼자님은 이자의 일부만 갚았지만, 솔직히 갑자기 4배나 된 이자를 어떻게 갚냐. 이렇게 처리하기로 마음먹었다.

“너는 알츠베이트다.”

나를 보고 하는 그 말에 문득, 폭군 오빠의 말이 떠올랐다.

“알츠베이트를 버리고 황족이 돼.”

그 모습은 떠올랐던 것보다 빠르게 사라졌다.

흡족한 미소를 띤 할아버지의 모습이 시야 가득 채웠다.

“곧 여신의 축복을 기리는 축제가 열릴 예정이지. 황실에서도 예년처럼 거대한 연회가 열릴게다. 올해는 사고 치지 말고 얌전 떨거라. 경거망동하지 말라는 소리다. 알겠느냐?”

“……네. 제가 언제 또 사고를 쳤다고.”

어깨를 으쓱하자,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어허 하고 엄해졌다.

“가뜩이나 큰 사고를 친 뒤에 여행을 가게 되었단 소문이 자자하지. 이번 여행 뒤로 달라졌다는 것을 보여 주거라.”

나는 할아버지가 당부하는 것을 한 귀로 슬쩍 흘렸다.

미안합니다, 할아버지. 이미 제가 돈을 대가로 더 큰 패악을 부리기로 약속했거든요…….

그래도 흡족한 얼굴을 봐서는 패악 좀 몇 번 떤다고 약혼자를 갈아치우진 않겠지.

할아버지는 샤를리즈를 진심으로 아끼는 것 같으니 말이다.

“노력해 볼게요.”

내 말에 쯧 혀를 찬 할아버지가 시선을 내리더니, 곧 금화를 직접 세어 보기 시작했다.

책 속에서도 돈을 좋아한다는 묘사가 한가득했었는데 이렇게 보니까 정말로 좋아한다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이번 황실 연회에서 너와 레무트 공작의 결혼 날짜를 공표할 예정이니 알아 두거라.”

“……결혼이요?”

생각지 못한 소리에 말문이 턱 막혔다.

어찌 된 게 이 할아버지는 문제 하나를 해결하면 그보다 더 커다란 빅엿을 주는 거지?

나는 신음이 새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아스킨은 허락한 건가요?”

“그놈의 허락을 받을 필요가 있느냐? 그놈이 무슨 수로 거절해.”

와, 이걸 아스킨이 직접 들었다면 빡쳐서 당장 파혼을 외쳤을 발언인데.

‘그럼 나는 다시 한번 사망 위기를 마주하겠지.’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을 거다.”

“……아스킨이 파혼을 말하는데 빚을 갚을 수단이 따로 생긴 걸까요?”

“그런 게 생길 수나 있겠느냐? 그놈은 그 돈을 결코 갚지 못해.”

어째서인지 할아버지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필요도 없는 병약한 그것을 계속 데리고 있는 한은 말이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반발이 치솟았다. 환히 웃는 아리아의 얼굴을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나는 절로 힘이 들어가는 손을 뒤로 숨기며 그저 싱긋 웃었다.

“넌 얌전이나 떨면서 그놈의 마음이나 얻어 두거라. 그 미모로 사로잡기라도 하란 말이다. 쯧, 언제까지 모양 빠지게 쫓아다니기만 할 셈이냐?”

이어지는 할아버지의 지시에도 나는 그저 웃으며 그렇게 하겠노라고 성의 없이 대답할 뿐이었다.

* * *

……그냥 약혼한 상태로 1년만 버티면 되는 마당에 결혼은 무슨 결혼이야?

집무실을 나선 나는 심각해졌다.

할아버지는 끝까지 이젠 수완은 됐으니까 약혼자님의 마음을 좀 얻어 두라고 지시했다.

강조이자 강요에 대충 그러겠노라 했지만 그럴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 남자에겐 서로 얌전히 1년을 보내기만 하면 된단 약조만 받는 걸로 충분하다.

‘게다가 그쪽에서도 결혼을 바라기나 하겠냐고?’

싫은 사람이 치근대는 게 얼마나 스트레스인데.

팔자에도 없는 유혹은 집어치우고 그 남자와 어떻게든 대화로 서로의 자유를 도모하는 쪽이 훨씬 낫지.

‘이렇게 된 이상 최대한 빠르게 약혼자님과 담판을 지어서 1년 계약서에 도장을 찍게 한다!’

당신 인생이야? 내 인생이지! 결혼은 개뿔이. 방에 도착해서 짜증을 베개에 퍽퍽 풀고 있는데, 얼마 안 가 생각지 않은 소식을 들었다.

“공녀님, 황실에서 시종이 도착했습니다.”

황실에서? 방금 막 할아버지에게 기가 탈탈 털린 상황에서 달가운 소식은 아니었다.

그러나 곧 시종이랍시고 들어온 사람이 망토 모자를 벗었을 때는 깜짝 놀랐다.

나는 일단 방 안에 있던 하녀들부터 나가게 했다.

“……노아 경? 언제부터 당신이 황실 시종이었지?”

“고귀하신 공녀님을 뵙습니다.”

원작의 서브 남주이자, 폭군의 부관인 노아였다.

그는 알츠베이트 공작의 눈에 띄지 않게 부러 이렇게 찾아 왔다며 양해를 구했다.

나는 팔짱을 끼고 고개를 기울였다.

“황제 폐하께서 찾으십니다.”

“……오빠가 부르면 꼭 가야 해?”

“공녀님께 해가 될 일로 부르신 것은 아닙니다.”

“그래 놓고서 막상 가면 오빠가 미쳐서 검을 들고 있는 거 아니야?”

나는 그렇지 않아도 심기가 불편했던 상황이라 삐딱하게 받아쳤다.

노아가 난감한 표정을 짓는 걸 보고서야 아차 싶었다. 그래, 이 남자한테 무슨 죄가 있나.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차피 집에 계속 있어 봐야, 베개만 때리고 있을 것 같으니.

“안내해.”

그러자 노아가 성큼 다가와 내게 손을 내밀었다. 지난번처럼 안아서 갈 생각인가?

나는 손을 내밀려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급한 일은 아닌 거지?”

“네? 네. 그렇습니다.”

“그럼 이번엔 네게 안겨 가지 않아도 되겠네.”

“아…….”

노아가 끄덕이며 내 손을 조심스럽게 놓았다.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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