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화 (27/194)

26화

* * *

황실에 도착했을 때, 나는 이번엔 커다란 응접실에서 내 오빠인 록시디언을 마주했다.

말이 응접실이지, 어째 옷걸이가 가득한 것이 의상실 같이 보이는 방이었다.

“왔냐.”

록시디언이 나를 보더니 미간을 슬쩍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빨리 오라고 노아를 보냈는데, 왜 이렇게 늦은 거야?”

그야 마차를 타고 왔으니까? 그러나 중요한 말은 아니었는지 그냥 넘어가는 눈치였다.

폭군이 손짓하자, 곧 문을 열고 누군가가 들어와 허리를 깊이 조아렸다.

“고귀하신 공녀님께 인사드립니다. 황실 의상 디자이너인 베베체입니다.”

나는 인사에 답하는 대신 고개를 갸웃했다. 갑자기 디자이너는 왜 나타난 거야?

“나 왜 부른 건데?”

“곧 있을 황실 연회에 참여할 거지?”

아, 할아버지가 결혼 날짜 공표하겠다고 한 그 연회? 잊고 있다가 생각나 버렸다. 나는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기분이 다시끔 불쾌해졌다.

“축제 연회 드레스를 오늘 여기서 제작하라고.”

“무슨 소리야, 오늘 디자인을 하자고?”

샤를리즈 기억에 따르면 이곳에서 고위 귀족들은 연회를 위해 드레스를 주문 제작하곤 했다.

물론 이 세상에도 유행이 있기에 카탈로그에서 하나를 골라서 자신의 취향과 기호에 맞게 수정하기도 했다.

샤를리즈는 이중 무조건 자신에 맞게 제작하는 쪽이었다.

“무슨 소리야. 공작가 전속 디자이너도 많아.”

그리고 사치스러운 악녀답게 샤를리즈는 다른 귀족가에서 하나둘 정도 두는 디자이너도 다섯이 넘었다.

오직 샤를리즈를 위해 만들겠다는 사람도 쌔고 쌨는데 굳이 여기서? 내가 찡그렸지만 록시디언은 꿈쩍도 안 하는 표정이었다.

“그 인간들이 황실 소속과 같냐? 황실은 최고의 인재들만 모인다.”

황실 디자이너가 네 디자이너들과 비교도 안 된다는 말에 나는 욱하고 말았다.

샤를리즈 몸엔 무시에 욱하는 버릇이 남아 있기도 했다.

“빨리 치수나 재.”

“……싫은데? 대체 왜 이런 거까지 오빠가 신경 쓰는데?”

그러자 록시디언이 무슨 소리냐는 듯 뻔뻔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넌 알츠베이트 공녀이기 이전에 황제의 동생이다. 네가 나오는 꼴이 나를 쪽팔리게 만들면 되겠냐? 절대 안 되지.”

……이제 와서 신경쓴다고?

샤를리즈 기억 속에는 댁이 여동생 옷차림에 신경 썼던 기억은 전혀 없는데?

“게다가 지금은 더욱더. 넌 나와 약조한 게 있잖아?”

“……그래서 신경 쓰는 거라고?”

앞뒤가 안 맞는 소리였다.

패악을 떠는 건 떠는 거지, 무슨 옷을 입고 떨든 상관없잖아?

그러나 이 오빠란 놈은 나이를 어디로 먹은 건지 하라면 하라고 고집을 부렸고, 나는 욱해서 목걸이에 손을 올렸는데.

“이미 돈 빌려 갔지 않냐? 꼭 이렇게 불러 주랴, 채무자님?”

치사하게 돈 얘기를 꺼내서 나는 순순히 백기를 들었다.

그래 빌린 내가 죄다.

결국 실랑이 끝에 치수를 재기로 하고 디자이너 조수들의 시중을 얌전히 받았다.

치수를 재는 동안 왜 그러는 건지 몰라도 커튼 너머에서 록시디언이 연신 쫑알쫑알 말을 걸어 왔다.

귀가 따가울 정도였다.

“너는 드레스라고는 매번 푹푹 파인 천 쪼가리를 가져와서는 춥지도 않냐? 이참에 제대로 입으라고. 알겠냐.”

“무슨 상관이야? 내가 뭘 입든.”

“엉뚱한 놈들이 눈깔이 돌아가니까 문제 아니야. 어?”

아, 황실에서 샤를리즈가 친 사고를 여러 번 수습했다고 했지.

사고 좀 그만 치라는 건가?

근데 댁이 이번엔 더욱 악녀 짓 좀 하라며?

앞뒤가 안 맞는 말에 나는 미간을 찡그렸다.

“대체 평소처럼 패악을 부리란 소리야, 말란 소리야?”

“하란 소리지!”

그럼 진작 알아듣게 말하든가. 나는 속으로 툴툴거리며 천을 몸에 대보았다.

“나 하나만 물어보고 싶은데, 혹시 내가 사고 치는 거에 황실 연회에 아예 참석 안 하는 것도 해당돼?”

“그게 패악이겠냐?”

“……쳇.”

“왜?”

“아무것도 아니야.”

결혼 공표는 막고 싶은데. 무슨 방법이 없나.

“야, 참여 안 하려는 게 설마 그 레무트 그놈의 꽁무니를 쫓으려고 그러는 거냐? 언제까지 그 쭉정이 뒤만 졸졸 쫓을 셈이야?”

“남의 일에 신경 끄시죠.”

“니가 남이냐?”

남이지. 하고 대꾸하려다가 멈칫했다. 내가 저 오빠란 사람에게 지나치게 편하게 대하고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대화의 양상이 윤지훈과의 느낌이 비슷했다. 솔직히 말해 편안함을 느끼긴 했다.

혼란을 느끼고 잠깐 침묵했더니, 저쪽에서 이상하게 느꼈는지 또 시비조의 말이 넘어왔다. 나는 기묘한 기분을 금방 잊고 나도 모르게 욱해서 대꾸했다.

작은 웃음소리가 들려와서 고개를 돌리니, 조수 하나가 숨죽여 웃다가 눈이 마주치기 무섭게 사색이 되었다.

“죄, 죄송합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그, 그만 꼭 닮으신 두 분의 사이가 아주 좋다는 생각에…….”

때마침 옷을 다시 입고 커튼이 걷어졌기에, 폭군도 무릎을 꿇은 조수를 목격했다.

무슨 일이냐는 시선이 넘어왔다.

“그럼 남매인데 사이가 좋지, 나쁘겠어. 일어나.”

“……죄, 죄송합니다.”

“됐어.”

나는 그러려니 하고 대충 넘겨 버렸다. 그런데 왜인지 묘한 시선이 내게 꽂혔다.

고개를 돌리면 디자이너나 조수들. 폭군의 옆에 있던 노아는 물론 록시디언마저도 비슷한 표정이었다.

“……저 조수는 나중에 죽이려는 거냐? 아니면 파면?”

“무슨 헛소리야. 내가 왜?”

“아니 뭐. 너 심기에 거슬리면 다 보복하고 보는 거 아니었냐?”

폭군이 의자에 기댄 그대로 턱을 괴었다.

그러고는 히죽 웃었다.

“너 나랑 닮았다는 소리 죽도록 싫어했잖냐.”

아, 그건 싫을 수 있겠다.

모든 현실 남매가 그렇진 않겠지만 내 주변 남매들은 닮았다는 말 참 싫어하던데 샤를리즈도 그랬나? 나도 여자 윤지훈이냐는 말을 참 싫어했다.

“지금도 싫은데.”

“근데 왜 안 끌고 가냐?”

“귀찮아.”

샤를리즈가 할 법한 답변을 주자, 록시디언은 흐응, 하고는 그냥 넘어갔다.

아래 치수를 모두 재고 팔과 어깨 치수를 잴 차례였다.

이쪽은 커튼을 칠 필요가 없어서 그대로 쟀다.

내 치수를 재는 데에는 황실 디자이너의 조수뿐만 아니라 황실 시녀들도 동원되었다.

조수와 시녀는 입은 옷이 완전히 달라 알아보기 어렵지 않았다.

“공녀님 팔을 이쪽으로 들어 주시겠습니까?”

막 팔을 들어 올리고 아래를 내다볼 때였다.

‘음?’

내 팔에 줄자를 대고 있는 시녀에게로 눈이 갔다. 정확히는 시녀의 머리에 꽂혀 있는 머리핀에 시선이 도달했다.

저 머리핀……. 내 거잖아?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샤를리즈에게는 수많은 장신구가 있긴 했지만 눈에 더 차고 마음에 드는 게 있었고, 나는 이것을 직접 선택해서 레무트 영지로 갔으니까.

약혼자님이 조금이라도 좀 예쁘게 봐줬으면 하는 간절한 심정에서 골랐으니 기억 못할 리가 없었다.

게다가 망나니 모임에서 영애들이 연신 예쁘다고 감탄했던 핀이기도 했으니 더욱더 모를 리가 없다.

‘이 핀은 분명…….’

나는 이 핀을 조그만 아이에게 선물했다.

산딸기를 주었던 아이 중에서 제일 작고 조그맣던 아이에게 말이다.

“피렌이, 아, 피렌은 제 여동생이에요, 그, 그 애가……. 공녀님이 주신 머리핀을 잃어버렸어요……. 그래서 밤까지 열심히 밖을 돌아다니면서 찾다가 가, 감기에 걸렸어요.”

그 아이가 잃어버렸다던 머리핀이 황실 시녀의 머리에 있는가. 과연 우연일까?

나는 그대로 손을 내렸다.

내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조수들과 시녀들, 디자이너마저 놀라 나를 응시했다.

“고, 공녀님……? 무슨 일이십니까?”

디자이너가 조심스럽게 물었지만, 나는 핀을 가진 시녀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물었다.

“너, 그 핀 어디서 났니?”

자연스럽게 핀을 가진 시녀에게로 시선이 몰렸다.

시녀는 순식간에 사색이 되어서 진땀을 뻘뻘 흘렸다. 이런 질문을 받을 줄 몰랐다는 듯이.

조금 떨어진 곳에서 폭군이 흥미롭다는 듯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성큼 다가갔다. 시녀가 털썩 주저앉았다.

“왜 대답을 못 해? 내 질문이 안 들려?”

고요해진 방 안에서 다가가는 내 발소리만 들렸다.

시녀는 얼른 자세를 바꿔 무릎을 꿇고는 고개를 깊이 조아렸다.

“죄, 죄송합니다! 공녀님! 무, 무슨 영문인지 모르나, 이, 머리핀은 제 연인이 주었습니다!”

연인? 내 얼굴이 절로 찌푸려졌다.

시녀는 겁에 질린 탓인지 사정을 줄줄이 말했다.

남자친구 이름은 들었지만 누군지는 모르겠고, 어떤 설명이 귀에 탁 꽂혔다.

“……네 연인이 내 호위 기사 중 하나라고?”

다름 아니라 이 시녀의 연인이 내 호위 기사들 중 하나라는 사실 말이다.

나는 당장 그 호위 기사를 불러오게 했다.

록시디언은 이 모든 것을 방관하며 턱을 괸 채 구경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지라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곧 해당 호위 기사가 의상실로 들어왔다.

그는 어리둥절한 얼굴이다가 나와 제 연인, 마지막으로 내 손에 들린 머리핀을 보고서 사색이 되었다.

“네가 이 머리핀을 주었다고 하던데?”

기사의 이름은 마틴.

역시나 샤를리즈의 기억 속에는 없는 이름이었다.

하지만 얼굴은 익숙하게 느껴졌다.

“왜, 내 머리핀을 네가 가지고 있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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