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기사는 얼른 무릎을 꿇고 앉은 채로 땀을 뻘뻘 흘리며 고했다.
“그, 그건…….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공녀님. 사실 공녀님께서 얼마 전 버리신 것을 제가 아까워…… 감히 주워서 제 연인에게 주었습니다! 제, 제 잘못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나는 그 말을 들으며 머리핀을 매만졌다. 웃겨서 헛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기가 막혔다. 줍긴 뭘 주워?
샤를리즈는 사치하는 만큼 싫증을 잘 내는 성격이었고, 저 기사 말처럼 마음에 들지 않는 건 버리기도 했다.
아마, 진짜 샤를리즈였으면 그러려니 했겠지. 이 안에 든 게 내가 아니었다면 말이다.
새빨간 거짓말에 내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몸 속 어딘가에서 ‘그냥 죽여 버려’, ‘팔다리의 힘줄을 끊어 버릴까?’ 하는 이상한 속삭임이 들리는 것도 같았다.
하지만 화가 난다고 마음대로 움직일 수는 없었다.
이 순간에 달라진 모습을 보이라는 할아버지의 강요에 가까운 지시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연회에서야 어쩔 수 없이 패악을 떨어야 할 텐데 굳이 연회 전에 화를 내야 할까.
꾹 눌러 참으려는 순간, 나는 오빠란 놈과 눈이 마주쳤다.
구경하던 록시디언이 씩 웃으며 손가락으로 돈 모양을 만들었다. 동그라미, 금화.
‘돈값 해.’
놀리듯 이어지는 입 모양까지. 저놈 때문에 가까스로 참으려던 분노가 터져 나오고 말았다.
퍽!
짝도 아니고 퍽 소리였다. 옹골차게 쥔 내 주먹이 기사의 뺨을 후려갈겼으니까.
손목이 나간 것처럼 아팠지만 그건 그거고.
저놈이 내가 아이에게 선물한 머리핀을 훔쳤겠다?
그 때문에 한 아이는 밤새 울며 찾다가 앓아눕기까지 했다.
직장인 윤지후는 화를 제대로 낼 줄 모르던 평범한 사람이었는데, 이상하게도 지금 당장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아주 선명하게 떠올랐다.
“이건 제국에 하나밖에 없는 핀인데, 내가 못 알아볼까.”
“고, 공녀님…….”
“내가 얼마 전 레무트 영지에서 가난한 아이에게 던져 준 걸 기억하는데, 지금 날 멍청이 취급해?”
나는 손목의 고통이야 어쨌든 기사의 뺨을 또 한 번 세차게 날려 버렸다.
샤를리즈, 정말 사람 좀 때려 본 건지. 몸이 기억하는 스윙이 아주 훌륭했다. 기사가 쳐다보기에 한 번 더 때렸다.
그제야 기사가 덜덜 떨면서 무릎을 고쳐 꿇으며 빌었다.
기사의 행동은 내가 준 고통이 무서운 게 아니라 뒤에 있을 처벌이 두려운 게 틀림없었다.
“아, 아, 죄, 죄송합니다. 살려만, 살려만 주십시오, 공녀님! 사실…… 저, 저 여자가 시켜서 뺏어 온 것입니다!”
할아버지는 대체 기사를 어떤 기준으로 뽑은 걸까.
위기에 처하자 기사가 보인 행동은 제 연인을 걸고 넘어 지며 탓하는 것이었다.
“하? 마틴,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시녀가 장소도 잊고 소리를 질렀다.
누가 봐도 사색이 된 채 억울함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나는 두 사람을 보며 눈을 가늘게 찡그렸다.
“어디 얘기해 봐.”
* * *
황성의 시녀 리벨라는 벌써 4년이 넘은 베테랑 시녀였다.
남작가 여식인 그녀는 어렵사리 황실 시녀 시험에 통과했고, 자신의 경력을 인생 최고의 자랑으로 여기는 이였다.
시녀는 혼인을 잘할 수 있는 직업이기도 했기에, 그녀는 혼인 전까지 연애를 마음껏 즐기고 싶었고 그러던 중 만난 것이 바로 마틴이었다.
그는 마찬가지로 남작가 가문의 차남이자, 무려 알츠베이트 소속 기사였다.
앞으로의 미래가 창창하면서도 외모마저 준수한 남자였다.
“진짜 꼴 보기 싫어 죽겠어. 그 여자! 하, 외모만 아니었으면, 알츠베이트 공작님도 분명 버렸을 텐데!”
한 가지 흠이 있다면 자신이 모시는 주인의 욕을 살벌하게 한다는 점이었지만.
그 대상이 악독하기로 유명한 알츠베이트 공녀였으니 충분히 이해가 갔다.
“……예쁘기는 진짜 예쁜데. 머리는 비어서는. 하, 진짜 평범한 귀족가나 평민으로만 태어났으면 내가 진짜.”
가끔은 찝찝한 욕설을 해서 기분이 이상하긴 했지만 그런 것들은 슬쩍 넘겨 버렸다.
어쨌거나 리벨라에게 충실했던 연인은 어느 날 아주 비싸 보이는 머리핀을 그녀에게 선물했다.
정말이지, 놀라울 정도로 예쁘고 값비싸 보이는 물건이었다.
리벨라도 귀족가의 여식으로서 보석을 곧바로 알아보았다. 이런 루비가 박힌 걸 구했다고?
“이거 어디서 났어? 엄청 비싸 보이는데?”
“우리 리벨라 주려고 내가 돈 모아서 샀지. 마음에 들어?”
“마틴, 너 내가 물로 보여? 허튼 소리 말고 솔직히 말해. 너 설마…… 공녀님 방에서 훔친 거야?”
아무리 알츠베이트의 기사라고는 하나 도저히 기사의 월급으로는 살 수 없는 머리핀에 리벨라가 타당한 의심을 했고, 마틴은 펄쩍 뛰었다.
“미쳤어? 내가 도둑이야? 이런 건 다 임자가 있는 법이라 가져온 거야. 그냥 받아!”
그러나 의심을 지우지 못한 리벨라가 끝까지 추궁했고, 결국 마틴은 투덜거리면서도 진실을 고백했다.
“웬일로 그 여자가 가난뱅이 애들한테 이런 걸 나눠 주길래, 어차피 걔들한텐 필요도 없잖아? 뺏어 왔어. 됐냐?”
“……미쳤어, 그러다 공녀님이 알면 어쩌려고!”
“그 여자 몰라? 이런 물건은 차고 넘쳐서 기억도 못할걸. 사치만 부릴 줄 알고 예쁘기만 하지 머리가 텅텅 비었다고.”
리벨라는 그날의 대화를 똑똑히 기억했다.
결국 탐욕에 못 이겨 사정을 알고도 이 머리핀을 받아들인 자신의 잘못도 분명 있었다.
마틴의 말처럼 공녀가 멍청하다고 생각하기보다는, 그 돈 많은 공녀에겐 이런 것쯤 바다의 모래알만큼 많을 테니까 모르지 않을까.
내가 가져도 되지 않을까 싶은 탐욕스러운 마음에서 모른 척해 버렸다.
그리고 그때 모른 척 받아들였던 대가는 너무나도 컸다.
현재, 리벨라는 덜덜 떨면서도 억울함과 한이 가득 담긴 시선으로 마틴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지, 진짜입니다. 저 여자가, 제발 공녀님 물건을 하나만 훔쳐 달라고 협박해서, 어쩔 수 없이……!”
분명 받아들인 자신의 잘못도 있다.
하지만 모든 죄를 자신에게 뒤집어씌우다니! 참을 수 없었다.
“공녀님, 억울합니다.”
이미 자신의 빛나는 경력은 날아가 버렸다.
그러나 억울하게 모든 잘못을 뒤집어쓸 수는 없었다!
리벨라가 허리를 폈다.
“공녀님!”
위기 앞에서 오랜 기간 동안 시녀 생활을 하며 몸에 뵌 정갈함이 드러났다.
“저는 이 자리에서 그저 연인이랍시고 사랑했던 이에게 배신당한 것뿐입니다. 물론 제가 모든 사정을 알고서도 이 머리핀을 받은 것은 자, 잘못했습니다. 제 잘못입니다……. 감히 변명하자면 공녀님께서 가지신 진귀한 물건이 많기에, 하나쯤은 가지더라도 모르실 거라 생각했습니다.”
마지막에 가서 리벨라는 양손을 싹싹 빌었다. 어쩔 수 없는 본능이었다.
샤를리즈의 잔악함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고, 그녀는 시녀직은 잃더라도 이대로 죽고 싶지 않았다.
“…….”
리벨라는 이 순간 마틴의 말이 모조리 틀렸다는 걸 알았다.
마틴이 입버릇처럼 예쁜 걸 빼면 할 줄 아는 것도 없고 멍청하기 짝이 없다는 말은 모두 개소리였다.
이 순간 저를 내려다보는 이 모습에 위압감이 흘러넘쳤으니까.
정말이지, 남매인 황제 록시디언과 견주었을 때 남매가 분명하단 생각이 들 정도로 오싹했다.
인간의 것 같지 않은 매혹적인 미색과 아무런 표정이 떠오르지 않은 싸늘한 얼굴이 더욱 한몫했다.
“내 아래 쓰레기가 있었다니.”
샤를리즈가 설핏 찡그렸다. 손을 쥐었다 펴는 모습에 마틴과 리벨라가 대번에 숨을 참았다. 저 손에 사라진 목숨이 얼마나 많을까…….
“리벨라라고?”
“네, 네……. 공녀님……!”
“저런 쓰레기를 처리할 기회를 줄게.”
리벨라가 놀라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던 샤를리즈의 표정으로 매혹적인 미소가 깃들었다.
지옥에서 올라온 악마의 것같이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 담긴 미소와 다정한 목소리였다.
“저건 네가 하고 싶은 대로 처리해 보렴.”
“…….”
“근데 그 처리가 내 마음에 들어야 할 거야.”
샤를리즈와 그녀의 손에 들린 머리핀을 번갈아 보던 리벨라가 얼른 몸을 돌렸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손이 먼저 나갔다.
짝!
뺨을 맞은 마틴이 얼떨떨하게 리벨라를 보았다. 마틴이 움직이려 들었지만, 그는 곧 움직일 수 없었다.
‘폐, 폐하?’
지켜만 보고 있던 폭군이 살기를 내뿜었기 때문이었다.
어찌나 섬세한 조절인지, 마틴 외에는 느낄 수 없도록 하지만 마틴에게는 죽는 듯한 공포가 쏟아졌다. 리벨라가 이를 악 물고 분한 만큼 이 순간 망쳐진 제 인생에 대한 분노를 담아 손을 휘둘렀다.
뺨을 때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한참이 지나 리벨라가 헉헉 숨을 몰아쉬고 있자, 위에서 매혹적인 목소리가 들렸다.
“됐으니 둘 모두 꺼지렴.”
샤를리즈가 입을 살짝 가린 채로 돌아섰다. 리벨라는 한때 동료였던 시녀들에게 끌려가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
마틴과 리벨라가 끌려간 뒤 의상실은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남은 디자이너와 조수들, 시녀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고개를 조아렸다.
짝짝짝.
의상실에 박수가 울려 퍼졌다.
지금까지 지켜보기만 하던 록시디언이 낸 소리였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만족스러운 표정을 한 채로 자신의 여동생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사람의 본성은 바뀌지 않는다지? 그렇게, 네 하고 싶은 대로 살아.”
어서 패악을 떨어 알츠베이트에서 쫓겨나렴, 동생아. 내가 얼른 주워 가 줄 테니.
록시디언은 속엣말을 슬쩍 삼키며 그대로 돌아섰다.
샤를리즈는 그저 서 있을 뿐이었다.
‘……또 소문 나겠지. 개망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