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변명하자면 샤를리즈는 막 황실에서의 사건으로 잔뜩 예민해진 상황이었다.
자신을 향했던 악의를 접한 상황에서 정체를 알지 못하는 이를 만나 더욱 경계하던 참이기도 했다.
샤를리즈는 자신이 너무 예민하게 반응했음을 깨달았지만 이미 병은 아래로 떨어져 깨진 뒤였다.
‘엄마야, 어떡해!’
깨진 병에서 예쁜 색의 와인이 줄줄 흘러 바닥을 적셨다.
심지어 이안의 바지 자락과 구두를 적신지라 어딜 보나 그녀가 악인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어떡해? 여기서 뻔뻔하게 나가? 아니면 비꼬는 척 사과해?
샤를리즈의 머리가 팽팽 돌아갔다.
이 남자가 이번에야말로 본색을 드러낼까? 화를 낼까?
샤를리즈가 고개를 든 순간이었다.
눈이 마주친 순간 이안의 눈으로 부드러운 미소가 스몄다.
“죄송합니다. 역시 제국 최고의 미인께는 부족한 와인이었던 모양입니다.”
“…….”
샤를리즈는 눈을 깜빡했다. 의도하진 않았다고는 하나 자신이 잘못한 게 확실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남자는 마치 제 잘못인 양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샤를리즈가 무어라 말을 할 새도 없이.
오히려 완벽하고 빈틈없는 예법, 샤를리즈가 곤란해하지 않게 감싸는 말까지.
모르는 이가 보았다면 그쪽에 확실한 잘못이 있다고 느껴질 만한 행동이었다.
“다음에는 제대로 된 와인을 준비하겠습니다.”
그녀는 몰랐지만 예민해진 사이 샤를리즈의 얼굴로 난감과 당황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이안의 가늘어진 눈은 어렵지 않게 이를 포착했다.
‘이런, 호기심을 가지면 안 되는데.’
그는 궁금했다.
수도의 모두가 악독하다고 혀를 차는 이 악녀가 순간 보였던 무구한 표정이.
어디로 보나 소문처럼 악독해 보이지 않는 이 여인이 어떤 사람인지.
누군가 오해했던 것인가?
“……그때 함께 마셔 주시겠습니까?”
샤를리즈가 고운 입매를 꾹 다물었다. 뾰족해진 눈꼬리가 그를 향했지만, 이미 난감해하는 표정을 보았기 때문일까. 그렇게 사납게 보이지 않았다.
샤를리즈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레드 와인은 끊었어.”
“이런, 세상엔 아주 멋진 화이트 와인이 넘쳐나지요.”
“할아버지의 손님이면 볼일이나 보고 가든지.”
“공작님을 뵙는 척 뵙고 싶었던 분은 공녀님이었는데…….”
“…….”
샤를리즈는 속으로 당황했다.
‘얘 뭐지?’
대체 샤를리즈에게 얼마나 큰 원한을 품었길래 어떻게든 날 보고 싶었단 말인가?
역시 경계해야 할 인물임에 틀림없었다.
또 한 번 경계가 불쑥 솟았지만 곧 관심을 끊고 돌아섰다.
그러나 이안이 부드러우면서도 예의 바르게 앞으로 다가와 인사를 올렸다.
허, 마지막까지 예의가 바른 남자였다.
게다가 학자 같다고 생각했던 첫인상과 다르게 휘어지는 눈이 여우처럼 요사스럽게 보였다. 자칫하면 홀리겠단 생각이 들 듯이.
샤를리즈가 속으로 혀를 차면서 그의 옆을 스쳐 지나가던 때였다.
“공녀님!”
그녀의 하녀인 수잔이 보였다. 그런데 이게 웬걸. 수잔은 혼자가 아니었다.
샤를리즈는 수잔의 뒤에 서 있는 사람을 보고서 눈을 크게 떴다.
‘약혼자님?’
놀랍게도 수잔의 뒤로는 커다란 덩치에 훤칠하다 못해 아름다운 남자가 서 있었다. 샤를리즈의 약혼자, 아스킨이었다.
대체 저 남자가 이 알츠베이트 저택엔 무슨 일로 왔단 말인가.
샤를리즈가 깜짝 놀라는 사이에 아스킨은 샤를리즈와 함께 있던 이안 차일드를 발견했다.
‘……저자가 왜 여기 있는 것이지?’
그의 잘생긴 눈썹이 미미하게 꿈틀거렸다.
차일드 가문은 아스킨에게 협력을 제의했다.
그런데 그런 자가 알츠베이트에 있다니? 설마 양쪽에 발을 걸치려 들었나? 아니면, 저 차일드 가문도 결국 알츠베이트처럼 돈으로 자신을 휘두르려는 게 목표였나?
동시에 아스킨은 이안 차일드가 샤를리즈에게 내민 손을 보았다.
왜일까. 그 독하고 도도하기 짝이 없는 저 여자의 얼굴로 미묘하게 난감함이 어려 있는 모습이 어쩐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런 중요한 손님을 맞이하실 예정이셨군요. 레무트 공작님을 뵙습니다. 좋은 오후입니다, 각하.”
이안은 눈치 빠르게 아스킨과 샤를리즈를 한 번씩 보고서 자신이 빠질 때란 걸 알았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좋은 시간 보내시길 바라며, 그럼 부디 다음에 공녀님과 또 뵐 일이 있길 바라겠습니다.”
* * *
싸늘하다. 침묵이 비수처럼 가슴에 꽂힌다.
“…….”
나는 몰래 숨을 꿀꺽 삼켰다. 물론 티가 나지 않게.
그러면서 슬그머니 시선을 올렸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벌써 5분째, 아스킨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나야, 이 조각상같이 잘생긴 남자를 그냥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눈 호강하는 것이지만….
데려온 수잔의 말로는 할아버지를 보러 온 것도 아니고 나를 보러 여기 온 거라는데. 대체 무슨 바람이 불어서 나를 보러 온 거지?
문제는 5분째 눈이 마주치는 족족 인상을 찡그리니, 나도 모르게 입을 꾹 다물게 됐다.
일단 여기 찾아와 준 건 매우 고마운 상황이었기에 아주 신중하게, 이 자리를 망치고 싶지 않았달까.
다만, 이제 용건을 좀 알려 주면 좋겠는데 말이지.
나는 티 나지 않게 긴장을 풀 겸 느긋하게 목을 매만졌다.
“수재 복구로 인해 바쁠 텐데 어쩐 일이야?”
저쪽에서 말을 안 하니 어쩌겠어. 내가 운을 띄워야지.
그래도 어찌 저찌 미움은 받지 않게끔 최대한 무해하고 예쁘게 빙긋 웃었다.
그러자 웬걸 저 남자의 표정이 썩어 들어가는 것 아닌가.
뭔데, 뭐냐고. 사람이 기껏 웃었는데……! 조금 억울해졌다.
“넌 마음껏 내 영지를 드나들면서 나는 미리 연락을 해야만 널 볼 수 있다는 건가?”
……내가 언제 그렇게 말했어?
어째서 시비를 거는 건지 모를 일이지만. 그래 참자, 참아 주자. 쟤 눈에는 내가 원수 같은 샤를리즈일 것 아니야. 대화해 주는 게 어디야. 억울했지만 꾹 참았다.
그래 일단 나를 보러 왔다는 것 자체로 내 사랑스러운 코인! 백 억을 향한 길이 열린 거지.
이렇게 생각하니 기쁘고 행복해졌다. 절로 행복한 미소를 띠었다.
“당신이 이곳에 올 시간이 있던 거라면 수재 복구는 잘 수습된 모양이네. 당신 그런 쪽으론 유능하잖아.”
“…….”
……뭔데. 왜. 뭔데. 왜 또 찡그리고 노려보는 건데.
어쩐지 왜 빡친 건지 모를 커다란 개를 보는 기분이었다. 풀어 주고 싶은데 말이 안 통해요…….
우리 같은 인간인데 왜 통하질 않니?
“널 보니 결심이 드는군.”
“무슨 결심?”
아스킨은 대답하는 대신 다른 말을 꺼냈다.
“넌 내 영지의 어린 아이들까지 이용해서 내 환심을 사고 싶었나?”
이번에 튀어나온 말은 더욱 이해가 힘들었다.
약혼자님이 왜 이런데. 사람의 말을 하는데 왜 이해가 힘든 거지요.
나는 곱씹어 보다가 겨우 이해했다. 아, 설마.
‘오늘 돌려보낸 아이들을 말하는 건가?’
아니, 그럼 혹시 내가 일부러 아이들을 끌고 왔고 잘 대접해서 보냈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의 입장에서 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아니야.”
내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이건 진짜 억울하다. 물론 내 호위 기사들이 잘못했지만.
“이젠 뻔뻔하게 연기력까지 늘어났군.”
“걔들에게 이야기는 듣긴 했어?”
나는 지지 않고 받아쳤다.
“내 호위가 멋대로 움직인 건 맞지만, 잔뜩 안겨서 보냈던 건 까맣게 잊은 건지. 사실 내가 버리려 했던 것들을 안겨 보낸 거니 딱히 고마워할 필요도 없긴 하지만. 당신이 내게 따질 일도 아닐 텐데?”
“…….”
말하고 보니, 순간 내가 악녀 역할을 정말 제대로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동시에 이렇게 가도 되는 건지 의문이 들었다.
이런 식이면 약혼자님이랑은 평행선만 달리는 거 아니야? 그럼 내 돈이고 귀향길이고 다 날아가는 것 같아 복잡한 심경이었다.
어떡해야 하는 건데. 절로 당황스러운 표정이 흘러나왔다.
그런 내 얼굴을 보고 있던 아스킨이 입을 열었다.
“축하해. 이젠 제국 최고의 배우까지도 될 수 있겠군.”
“뭐?”
아스킨이 박수를 치는 시늉을 하며 처음으로 비아냥거렸다.
“이제 나와 파혼만 해 주면 되겠어.”
“…….”
“어차피 다른 놈도 생긴 상황 아닌가?”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다른 놈은 무슨 매일 같이 레무트 영지로 달려가는 와중에 그런 소리가 나오냐.
나는 어처구니없는 소리에 이젠 잠깐 악녀 자존심도 내려놓고 매달리기라도 해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했다.
“아직 잘 모르나 본데, 내가 찍은 건 너야. 시시한 놈들하곤 차원이 다른 너.”
내 입에서 이 말이 흘러나온 순간이었다.
아스킨의 대답을 듣고 싶었지만 그 대답을 들을 수는 없었다.
“허어, 여기 있었군?”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려 보니 다름 아닌 할아버지가 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만면에 흡족한 미소를 지은 채로 나와 약혼자님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이런, 내가 방해한 건가? 보기 좋은 한 쌍이니 자주 왕래하라고. 레무트 공작.”
“아니, 마침 잘 왔군. 알츠베이트 공작, 그대에게도 해야 할 이야기였으니까.”
아스킨이 왜인지 아주 잠깐 나를 응시했다.
내가 착각한 걸까? 처음으로 그의 시선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린 것도 같았다.
그건 찰나의 순간 나타났던 것보다 빠르게 사라졌다.
“아니지. 이 약혼을 주선한 당신을 보고 꼭 해야 할 이야기나 다름없지.”
단호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냉정하고 차가운 음성이었다.
“서신으로는 도저히 응답하지 않으니 정식으로 직접 이야기하지.”
어쩐지 나올 것 같은 말을 알 것 같았다.
심장에서 희미한 고통이 느껴졌다. 잠깐, 잠깐만!
“아스…….”
“알츠베이트 공작가에 정식으로 파혼을 요청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