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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화 (31/194)

30화

나는 말을 잇지 못하고 가슴을 꾹 눌러 잡았다. 입술을 꽉 깨물었다.

“잠깐만, 잠깐만. 아스킨.”

“내 뜻이 변하는 일은 없을 거다. 반드시 파혼할 생각이니까.”

“호오라, 내 손녀딸이 전한 뜻과는 다르군?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자를 가져왔던데 말이지.”

할아버지가 수염을 쓰다듬었다.

느긋한 행동과는 다르게 눈빛은 예리한 노기를 띠었다.

“아니, 동상이몽이었던가? 쯧즈, 그러게 그리도 마음을 사로잡으라 하였더니, 못난 것. 결국엔 이 할애비가 겨우 레무트 따위에 이런 소릴 듣게 해. 알츠베이트에 먹칠을 하는구나.”

“할아버지.”

“입 다물 거라.”

할아버지가 노여움 가득한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그 안에 담긴 분노를 어렵지 않게 알아보았다.

“샤를리즈, 넌 나가 있어.”

게다가 나를 정당한 대화 상대로 보지 않는다는 사실 또한.

“나는 몇 번이고 기회를 주었다. 하지만 걷어찬 건 저놈이지. 네 짝이 아니었다 생각해라.”

“잠깐만요, 할아버지. 이건…….”

“뭣 하고 있는가!”

그러나 내가 무어라 말을 하기도 전에 우르르 달려온 기사들에 가로막혀 내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뭐야. 내 호위 기사들이 맞는데…….’

이상하게도 기사들 전부 준비라도 한 듯 다들 가면을 쓰고 있었다.

나는 곧바로 깨달았다.

이건 샤를리즈가 얼굴을 기억해서 보복하지 못하게끔 수를 쓴 방법이란 걸. 누군가 내 몸을 그대로 들어 올렸다.

“놔!”

당황스러운 마음에 마구 버둥거렸지만 나를 들어 올린 팔은 풀리지 않았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기사의 커다란 어깨너머로 할아버지의 차가운 얼굴이 보였다.

“이 할애비가 뭐든 쥐여 줄 테니. 가지고 놀기나 해.”

그 순간 사람을 도구처럼 취급하던 할아버지의 모습이 스쳤다. 동시에 알아차렸다.

입술을 꽉 깨물었다.

잠시지만 아스킨과 눈이 마주친 것 같았다.

그 남자가 놀란 눈을 한 것 같았지만, 바로 기사들에게 가려져 확신할 수는 없었다.

* * *

“이제 내 귀여운 손녀딸도 갔으니, 계속하지.”

“…….”

“네 그 괘씸한 낯짝과 끝을 봐야겠군.”

아스킨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눈앞에서 알츠베이트 공작이 주절주절 떠들고 있었지만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짐짝처럼 들려 끌려가던 그 여자의 얼굴이 오래도록 잔상이 남은 탓이다.

귀하디귀한 공주님처럼 자란 여자가 아니던가.

여기 이 알츠베이츠가 아끼고 아껴 세상 가장 좋은 것만 쥐여 주던 여자가 아니던가.

하지만 끌려가던 그 여자에게 스스로 항의할 힘 같은 건 없어 보였다.

저 공작이 입을 열 기회조차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스킨은 혼란을 느꼈다.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겠네. 정말 알츠베이트, 내 외손녀와 파혼하겠는가?”

그러나 이는 그가 가장 바라 왔던 일이었다.

자유.

아스킨은 마음에 걸림돌이 생겼음을 인정했지만 갑작스럽게 생긴 돌이 그의 몇 년간 바람과 의지를 이길 수는 없었다.

“당연히 파혼을 원한다. 내 뜻은 변함없어.”

“……끝까지 괘씸한 놈이군.”

알츠베이트 공작이 비릿하게 웃었다.

귀족파의 수장, 부와 재화에 있어서는 황실마저 뛰어넘는 이가 바로 알츠베이트 공작이다.

권력자인 그 앞에서 이리도 멋대로 당당하게 구는 놈은 몇 되지 않았고, 그중 하나가 외손자인 황제 록시디언이라면 다른 놈은 바로 이 레무트 공작이었다.

‘가진 거라곤 허름한 영지와 멀대 같은 몸뚱어리에 칼 좀 쓰는 능력뿐인 놈이…….’

그것이 문제였다.

마구 후려치고 있었지만 실상 이 자는 지나치게 강하고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고작 스무 살의 나이로 대토벌을 벌여 ‘옐로우 로드’를 개척한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때 황실에서 2천 년 묵은 약초를 대가로 옐로우 로드의 권리를 나라의 것으로 빼앗지 않았다면 이 자리에서 윗사람처럼 말을 할 일은 없을지도 몰랐다.

“좋아, 그 의지가 확고하다면야. 좋네. 그럼 빌려 갔던 돈을 한 번에 다 내놓도록 해.”

“그렇게 하지. 현금으로 주길 바라나?”

“내 특별히 어느 쪽이든 상관없이 쳐 주지.”

아스킨의 눈썹이 씰룩 움직였다.

알츠베이트 공작은 느긋하게 수염을 쓰다듬으며 입술을 끌어올렸다.

“이럴 줄 알고 준비한 것이 있네만 정말로 쓰게 될 줄은 몰랐지.”

알츠베이트 공작이 손을 내밀자 뒤에 있던 부관이 빠르게 양피지를 내밀었다.

마치 준비가 되어 있었다는 듯 빠른 동작이었다.

“알츠베이트와 레무트 간의 약혼은 돈을 담보로 한 계약이었네. 그대도 알겠지만 그쪽에서 먼저 중간에 파기한 셈이지. 그러니 계약서에 따라 위약금이 발생하네.”

“……알고 있다.”

이쯤이야 생각했던 바였다. 그러나 다음 순간 이어진 말에 아스킨의 표정이 굳었다.

“앞으로 낼 전체 이자 금액에 대한 오십 퍼센트를 추가로 지급하게.”

“말도 안 되는 소리!”

아스킨이 소리를 높이자, 알츠베이트 공작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피식 웃었다.

“이렇게 나와선 안 되지, 공작. 나는 네게 이자를 받을 생각으로 돈을 빌려주었건만 그쪽에서 이제 와 필요 없다며 중간에 갚겠다 들면 당연히 나는 손해지. 원래 다른 곳에 더 좋은 이자로 빌려줄 기회가 있었는데, 네게 빌려주느라 못 빌려주게 됐으니. 오히려 이 내가 더 큰 손해를 입은 셈 아니던가.”

알츠베이트 공작이 강력하게 주장하며 양피지를 가리켰다.

“그 서류에 도장을 찍게.”

아스킨은 불어난 금액에 순간 갈등했다.

알츠베이트 공작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이번엔 새로운 서류를 가져왔다.

“아니면 이쪽은 어떤가? 이건, 예전 네가 찍었던 계약서지. 만약 공작이 관리하는 영지를 모두 양도한다면 모든 빚은 소멸하는 걸로 해 두지. 네 한때 사위가 될 뻔한 자에게 베푸는 마지막 배려일세.”

그 어디에도 배려는 없었다. 이제는 선조가 피땀 흘려 일군 영지마저 노리는 알츠베이트 공작의 모습에 치가 떨렸다.

이 자와 이리 떼 같은 이 가문과 떨어지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던가.

아스킨은 불어난 금액이 적힌 서류와 또 다른 제안 앞에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알츠베이트 공작이 피식 웃더니 먼저 계약서를 가져가며 그대로 물러났다.

“하긴 어느 쪽으로 가든 그대의 여동생을 치료할 길이 요원해지겠군?”

“…….”

거미줄에 걸린 곤충이 된 채로 말할 수 없는 끔찍한 기분.

그가 몇 년간 쭉 느껴 온 익숙한 기분이었다.

“얼마 후에 있을 황실 연회에서 내 외손녀의 약혼자 노릇이나 제대로 하게.”

알츠베이트 공작은 정복감을 느끼며 그대로 돌아섰다.

“아, 그리고 얼마 전에 전해 준 이자는 잘 받았네. 4배나 되는 이자를 모두 갚다니 역시 능력이 대단하군.”

동시에 알츠베이트 공작은 웬만해선 이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놓지 않을 거라고, 다시 한번 결심했다.

파혼? 정말로 할 수 있겠나.

아스킨 레무트는 다시 한번 거미줄에 들어올 것이다. 어떤 방식으로든 말이다.

알츠베이트 후작은 흡족해하며 떠났다.

‘……이자가 아직 남아있을 텐데 전달이 되었다고?’

혼란을 느끼는 아스킨을 그대로 내버려 둔 채로.

곧 아스킨의 얼굴로 혼란이 잦아들더니 그 자리를 차가운 분노가 채웠다.

* * *

아스킨은 곧바로 타고 온 말로 돌아갔다. 그리고 놀랍게도 마구간으로 달려온 샤를리즈와 마주쳤다.

‘끙, 어떡하지? 어떡하냐.’

억지로 끌려나간 샤를리즈는 줄곧 고민에 잠겨 있었다.

샤를리즈는 막 자길 붙잡던 호위 기사들을 원래 샤를리즈처럼 윽박질러 빠져나온 참이었다.

“제가 막고 있겠습니다. 다녀오십시오.”

호위 기사들은 샤를리즈의 보복이 두려워 떨면서도 알츠베이트 공작의 말을 굳건하게 지키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그중 제트만이 내 편이 되어 주어 수월하게 몸을 뺄 수 있었다.

그녀는 풀려난 즉시 창문으로 달려가 아스킨의 위치를 확인하고, 마구간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샤를리즈는 아스킨의 얼굴을 보는 순간 하려던 말조차 꺼내지 못하고 멈칫했다.

아름다운 얼굴 위로 아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깊은 분노가 어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샤를리즈를 바라보는 표정 위로 혼란과 분기가 어지럽게 뒤엉켰다.

“……또 무슨 헛소리를 하러 온 거지? 아니, 협박하러 온 건가.”

샤를리즈는 아니라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분기가 넘쳐 뚝 떨어져 내린 눈물을 본 순간 할 말을 잃어버렸다.

단 한 방울이었지만. 툭 떨어지는 눈물을 닦을 생각조차 않는 남자는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웠다.

‘……엄마야, 너무 잘생긴 남자가 울기까지 하는데요.’

이 순간에 어울리는 말은 아니지만 너무 예뻐서 그녀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아이들까지 이용하는 더러운 방법을 어디서 배웠나 했더니…… 역시 그 조부에 그 손녀인가?”

“아스킨.”

“그 더러운 돈, 곧 갚을 테니 파혼 준비나 해 둬.”

샤를리즈는 심장께로 살짝 아픔을 느꼈다. 이 남자 진심이구나.

할아버지가 무슨 소릴 했는지는 몰라도 분명 기분 좋은 소린 아니었을 것이다. 샤를리즈는 아스킨을 이해했지만 동시에 억울하고 화가 났다.

“한 가지만 묻자. 그렇게 더러운 돈 왜 빌렸니?”

“…….”

“한창 아쉬울 땐 더럽지 않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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