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노기 어린 목소리, 그와 다르게 차분한 샤를리즈의 모습에 아스킨의 푸른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샤를리즈는 이를 똑똑히 보았지만 아스킨이 먼저 재빨리 움직여 말에 올라타 버렸다.
샤를리즈는 순식간에 떠나 버린 뒷모습을 보면서 끙 혀를 찼다.
‘속이 시원하긴 한데…….’
속은 시원하지만 너무 심한 말을 한 건 아니었을까 고민했다.
‘사실 전생의 윤지후에게 이런 패기가 있었다면 박 부장과 김 과장에게 시원하게 욕설을 퍼부었을 텐데.’
애써 다른 생각을 하려 노력했다.
그렇지 않으면 눈물을 뚝 흘리던 저 남자의 얼굴이 계속 떠오르니 말이다.
심지어 아스킨의 시선이 흔들리는 순간 샤를리즈는 자신이 괴롭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으으, 잘생기지나 말든가.”
괜히 신경 쓰이게.
끙, 샤를리즈가 이마를 부여잡고 한숨을 내뱉었다.
한편, 같은 시각.
아스킨은 함께 왔던 부관 벤과 함께 영지로 돌아가는 길과는 다른 방향으로 달렸다.
“차일드 소백작이 이쪽으로 갔다고?”
“네, 확인한 결과 틀림없습니다.”
그가 이곳에 도착했을 때 보았던 이안 차일드. 그 남자를 다시 보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아스킨이 뒤를 쫓고 있을 때, 그가 찾는 이안은 저택으로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자신의 보좌관이자 오랜 친우인 쇼모어와 한창 이야기 중이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오래 하세요, 도련님?”
“도련님은 무슨. 둘만 있는데 말 편히 하시지?”
“예의상 존칭으로 시작은 해야겠지?”
부관 쇼모어가 자세부터 편안하게 고치자, 이안이 피식 웃었다.
“그래서 무슨 생각 중인데.”
“그냥…… 제국에서 가장 아름다우신 미인 생각?”
“……알츠베이트 공녀?”
“정답.”
이안이 턱을 살짝 문질렀다. 쇼모어는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
“사실 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인으로 두 명이 꼽히는 걸 알고 있냐?”
“한 사람은 공녀님일 거고 다른 사람은 누군데?”
“너도 본 사람. 레무트 공작.”
미인이란 말을 듣는 사람이라며 쇼모어가 설명했다.
아스킨 레무트의 외모를 떠올린 이안이 고개를 끄덕이긴 했다.
확실히 남자답게 잘생긴 동시에 미남보다는 미인이란 말에 걸맞은 인물이었다.
“레무트 공작에겐 똑 닮은 여동생이 있다던데, 사실 제국 제일의 미인은 그쪽이 더 맞지 않겠어? 이안, 너는 여동생 쪽은 본 적 없지?”
“없지.”
레무트 공녀는 소문만 무성한 사람이었다.
게다가 이안은 그녀에겐 관심이 없었기에 금방 시들해졌다.
“근데 알츠베이트 공녀는 어떤 사람이야?”
“허? 그거 전에 물어봤지 않냐? 잠깐, 너 그 공녀에게 관심 있어?”
“뭐…… 있다면 있나? 아직은 관심 정도지만.”
이안의 가벼운 대꾸에 쇼모어가 경악했다.
이게 지금 귀한 차일드 자손으로서 대를 말아먹을 호기심을 가졌네! 친구이자 도련님을 아끼는 부관으로서 참을 수 없었다.
“관심 꺼. 눈도 마주치지 말라고! 알았어?!”
“왜 호들갑이야?”
“넌 제국을 오래 비워 잘 몰라! 그 여자는 진짜 악독한 사람이라고.”
쇼모어가 안 되겠다 싶어 샤를리즈 알츠베이트의 악행과 소문을 적나라하게 나열했다.
“그 여자 손에 망한 귀한 집 자손이 한둘인 줄 알아? 남자 서넛쯤 가지고 노는 건 아무것도 아니고, 술만 마시면 직접 폭력을 휘두르는 것으로도 모자라 기사들을 통해서 사주하기까지 했어. 게다가 싸움 붙이는 것도 좋아한다고. 사람은 얼마나 죽었게? 성기사단장을 건드리고 정령사 로펜하임의 제자를 억지로 끌고 와 협박한 일화도 넌 몰라서 그렇지, 정말 유명하다고!”
쇼모어가 침까지 튀기며 샤를리즈의 악행을 언급했다.
“네가 아까 술을 건네줄 때 멀리서 보면서 얼마나 식겁했는지 알아? 아까 그 술병이 네 머리로 날아왔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진짜.”
그러나 이안은 반쯤부터 듣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홀로 고민에 잠겨 있다가 싱긋 웃었다.
“쇼모어, 그러지 말고 공녀님에 대해 더 자세히 알아봐.”
“너 듣긴 했냐!”
얘가 진짜 위험한 여자에게 관심을 갖네! 제 친구이자 도련님은 어릴 때부터 이러했다.
절벽 위의 꽃에 관심을 갖질 않나, 아무도 관심 없는 나무 꼭대기에 올라가 보고 싶어 하질 않나!
자신에게 위험할 호기심도 아무렇지 않게 가지고, 한 번 가진 호기심을 해소하기 위해 무엇이든 실천했다.
‘아까 그 모습은 분명 난감해하면서 잠깐이지만 떨리고 있었어.’
쇼모어의 말에 따르면 미안함조차 느끼지 못하는 뻔뻔한 악녀였다.
그런데 그 표정은 무엇이었을까. 게다가 아스킨 레무트를 본 순간 미묘하게 온도가 변하는 얼굴까지. 왜 그리 절박하게 본 건지.
어쩐지 안쓰러움이 들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궁금해졌어.’
애석하게도 갖지 않으려 했던 호기심이 결국 만개하는 순간이었다.
이안이 그렇게 결심한 순간, 마차가 갑자기 끼익 멈춰 섰다.
검술을 익힌 이안은 재빠르게 넘어지지 않게 버텼지만. 평범한 문관에 불과한 쇼모어는 우당탕탕 굴렀다.
“으윽, 야, 뭐야. 너만 멀쩡하고…….”
“뭐지?”
이안은 문을 열고 나왔다.
그리고 마차 앞을 가로막은 사람을 발견했다.
놀랍게도…… 아스킨 레무트. 조금 전에 헤어진 레무트 공작이었다.
막 알츠베이트 공녀와 더불어 생각하고 있던 사람을 만나자 묘하고 신기한 기분이었다.
“이런, 레무트 공작님 아니십니까. 좀 전에 알츠베이트 성에서 뵀건만, 이곳까지는 어쩐 일이신지요?”
이안은 내심 당황하면서도 태연하게 인사를 올렸다.
한 치의 어긋남 없는 부드러운 예법이었다.
“그대에게 할 말이 있어 달려왔다. 마차를 갑작스레 막은 건 실례했네.”
“아닙니다. 각하. 급한 안건이 있으셨다면 그러실 수 있지요. 이해합니다.”
이안이 문 쪽을 가리켰다.
“들어오시겠습니까?”
마차 안으로 초대하며 방음 마법이 걸려 있다고도 귀띔하자 아스킨이 끄덕이고는 안으로 들어섰다.
덩치가 있는 두 남자가 들어선 탓인지 마차가 조금 전보다 좁게 느껴졌다.
“무슨 일이십니까?”
사정이 급한 것 같으니, 이안은 피차 인사치레 없이 본론을 들어가도 좋겠다 싶었고, 이는 아스킨이 바란 일이기도 했다.
“차일드 가문에 돈을 빌리겠다. 그대들이 제안한 조건을 받아들이겠어.”
“…….”
“조건은 동일하겠지?”
이안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내 그는 평소와 같은 부드러운 얼굴로 돌아와 끄덕였다.
물론이라고 대답하면서도 내심 아스킨이 갑자기 쫓아와 수락한 이유가 궁금했다.
혹시 알츠베이트 공녀와 관련 있는 걸까.
“다만, 기존에 협의하던 내용과 조금 다르게 진행되어도 괜찮은지 묻고 싶네.”
아스킨은 차분하게 금액이 늘었음을 설명했다.
그러면서도 혹시 금액이 늘어 어렵다면 이야기하라며 끝까지 냉정하고 고요한 모습을 보였다.
“음, 일단 금액이 늘어난 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물론 늘어난 금액의 양에 조금 놀라긴 했지만.
다행히 차일드가에서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다.
“대신 금액이 변경되었으니 제 쪽에서 한 가지 조건을 더 제시하겠습니다.”
“뭐지?”
이안이 싱긋 웃었다.
“알츠베이트 공녀님과 반드시 파혼해 주십시오.”
아스킨이 멈칫했다.
어차피 파혼하려 했다. 파혼을 위해 차일드와 손을 잡기로 결심한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추가로 붙은 조건에 아스킨은 불쾌감을 느꼈다. 그건, 불길한 예상을 했기 때문이었다.
잠깐 생각에 잠긴 아스킨이 물었다.
“혹시 차일드 영애를 레무트 공작가에게 보내려 하는 건가? 만약 그런 거라면 차일드도 알츠베이트와 다를 바 없는 곳으로 치부하겠다.”
“……이런, 제가 오해를 불러일으켰군요.”
확실히 이안에겐 여동생이 있긴 했다. 정확히는 그에겐 남녀 쌍둥이 동생이 있었다.
“각하 같은 분이라면 분명 제 여동생도 아주 좋아하겠지만 그런 조건은 전혀 아닙니다. 오히려 제 여동생은 정략혼보다는 자유연애를 꿈꾸는 똑똑한 아이이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은근슬쩍 동생에 대한 애정을 보인 이안이 깔끔하게 말하자 아스킨의 차가운 표정이 살짝 풀어졌다.
미약한 감정이나, 여동생에 대한 자부심을 가진 이안의 모습이 어쩐지 낯설게 느껴지지 않은 탓도 있었다.
“오해가 풀리셨다면 조건을 받아들이신다고 생각해도 되겠습니까?”
아스킨은 그렇다고 하려 했다.
그러나 아주 잠깐 그 여자의 얼굴이 스쳤다.
하필 억지로 기사의 손에 끌려가는 순간을. 그리고…….
“한 가지만 묻자. 그렇게 더러운 돈 왜 빌렸니?”
“…….”
“한창 아쉬울 땐 더럽지 않았어?”
제게 사납게 따지면서도 어째서인지 자신이 더 상처받은 것 같은 표정을 하던 조금 전의 순간까지.
아스킨이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가 떴다. 눈꺼풀은 그 모습을 지우려 했다.
깔끔하게 지워지지는 않았다.
“받아들이지.”
“탁월한 선택이실 겁니다.”
분명 잘한 선택임이 분명한데도 미묘하게 침식되는 찝찝함에 아스킨은 다른 화제를 꺼냈다.
계약은 확실하게. 알츠베이트와의 계약으로 깨달은 교훈이었다.
“……만약 차일드 가문에게 진 빚을 중간에 다 갚게 되면 남은 이자는 한 번에 처리해야 하는 건가?”
아스킨의 떠보는 질문에 이안은 빙긋 미소했다.
“무슨 소리이십니까. 남은 돈을 갚으셨는데 무슨 남은 이자겠습니까. 차일드 가문은 알츠베이트 같은 고리대금업자가 아닙니다. 오히려 저희 가문은 각하의 순수한 추종자에 가깝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