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아스킨과 이안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했다.
이안은 등골이 오싹오싹해지는 기세를 꾹 참고 미소를 유지했다.
“그럼 그대들의 제안을 받아들일 테니, 계약서를 작성하도록 하지.”
“예, 다만 우선 저도 제 아버지께 이 사실을 전달하고 계약서를 작성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조건이 변경되었으니까요.”
합당한 말이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이어진 말에 아스킨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아마 저희는 곧 있을 여신의 축제를 기념하는 황실 연회에서 다시 뵐 테니, 연회가 끝나고 바로 계약하시는 것은 어떻습니까?”
“얼마 후에 있을 황실 연회에서 내 외손녀의 약혼자 노릇이나 제대로 하게.”
알츠베이트 공작의 말이 떠오르면서 아스킨은 재차 불쾌해졌다.
“하나만 묻지. 내일 당장은 어려운 건가?”
“큰돈을 호송하기 위해선 경비 인력도 필요하고 여러모로 안전을 기해야 합니다. 이는 각하께서 더 잘 아시겠지만 말입니다. 게다가 제 부친에게 정확한 의사를 다시 한번 여쭤봐야 하니까요.”
이안이 은근하게 어려움을 표하자 아스킨은 합당한 말이라 생각해 기간을 양보하는 쪽을 택했다.
한시라도 알츠베이트의 거미줄에서 벗어나고자 했지만 이들 역시 이미 자신에게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알겠네. 그리고 그대들의 은혜는…… 반드시 보답하겠다.”
이안은 내심 이 남자가 장차 제국에 어떻게든 커다란 영향을 끼칠 거란 걸 짐작했다.
그때 차일드 가문은 이 남자에게 베푼 은혜를 배로 받게 되리라.
“저희는 그저 각하 같이 훌륭하신 분이 제국을 위해 다시 부흥하시는 것이 은혜를 보답해 주시는 길이라 생각합니다.”
“…….”
차일드 가문의 본질은 장사꾼이다.
단지 저울에 올리는 것이 단순한 부와 물건, 재화뿐만이 아닐뿐.
그들은 정치와 권력마저도 올리는 장사꾼이었다.
아스킨이 마차에서 내렸다.
이안은 단단한 뒷모습을 보며 여우 같은 웃음을 작게 흘렸다.
‘흐음……. 추가 조건에 대해서 전혀 묻지 않는다라. 점점 제국에 돌아오길 잘했단 생각이 드는 걸.’
자신의 변덕으로 내건 조건이었지만 앞으로 반드시 지켜질 조건이 되었다.
아무리 그래도…… 약혼자가 있는 이에게 수작을 걸 수는 없으니까 말이야.
아스킨이 영지로 복귀하기 위해 말을 정비하는 동안 차일드가의 마차 역시 출발을 시작했다.
이윽고 말에 올라탄 아스킨이 벤에게 말했다.
“잠깐 어딜 들렀다 가지.”
“네. 공작님!”
* * *
그날 밤.
어둠이 깊어지고 있었다.
시간을 보니 10시였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쇼파에서 일어났다.
그렇지 않아도 복잡하던 머리가 더욱 복잡해졌다.
주섬주섬 털로 된 가운과 숄을 걸치고 문을 열었다. 잠이 안 오고 갑갑하니 산책이라도 할 생각이었다.
“……공녀님, 어딜 가십니까.”
문을 여니 오늘의 당번인지 익숙한 얼굴의 제트가 보였다.
나는 무뚝뚝하지만 준수한 얼굴을 보다 고개를 돌렸다.
“갑갑해서 산책.”
짧게 대꾸해 주고 복도를 걷자 뒤에서 고요히 따라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보통은 2인 1조로 움직이더니 왜 혼자인 건가 싶었지만 그냥그러려니 했다.
‘갑갑하네.’
사실 낮에 보았던 아스킨의 살벌한 시선과 분노라거나 분기로 뚝 떨어지는 눈물이 잊혀지질 않았다.
그 모습이 너무 살벌하고 뇌리에 박혀 파혼당하면 안 된다는 걱정에 휩싸였다.
……어째 단단히 결심을 한 것 같은 낯이었단 말이지.
정원까지 나와서 이리저리 움직이다가 곧 정원 끝에 이르러 하인들이 드나드는 조그만 중문에 이르렀다.
왜인지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확히는 실랑이를 벌이는 음성이었다.
“아, 글쎄. 공녀님이 우리 공작님을 감금한 것이 아닙니까!!”
뭐야. 심란한 차라 그냥 넘어가려 했더니, 내용이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무시할 수가 없었다.
내가 누굴 감금해? 약혼자님을?
‘허, 어이없네. 그 사람이 감금한다고 당하는 사람이냐.’
협박의 귀재인 진짜 샤를리즈는 가능했을지 몰라도 내가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어떡하면 그 남자와 곱게 대화할 수 있을지 매일같이 고민해도 답이 안 나오는데.
뭐 감금? 그렇지 않아도 심란하던 기분에 부아가 확 치밀었다.
‘어디 한번 얼굴이나 보자.’
가까이 갈수록 목소리가 점차 커졌다.
아주 멀리 있는 입구가 아니었다면 건물에까지 들렸을 커다란 목소리였다.
“이곳에 계신 것 알고 있습니다, 저희 공작님을 보게 해 달란 말입니다!”
“아, 글쎄, 없다고 하지 않나. 내 말 안 들려?”
“안 들려, 난 진짜 급하단 말이야! 감금된 공작님을 보게 해 줘!”
아스킨을 찾는 이는 하인 옷을 입은 남자였고 받아치는 상대는 알츠베이트의 문지기였다.
내가 일부러 소리를 죽이지 않고 다가가자 두 남자가 약속이라도 한 듯 이쪽을 보았다.
병사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고, 공녀님!”
문지기가 허둥지둥 무릎을 꿇었다.
나는 문지기에게 시선을 주지 않고 하인 쪽을 보았다. 아무리 봐도 레무트가의 시종 같은데.
이 시간에 왜 우리 집에서 그 남자를 찾고 있는 거지?
시종은 막상 나를 보자,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것도 잊고 얼어붙었다.
그러나 이도 잠시, 덜덜 떨면서 무릎을 꿇고 양손을 싹싹 빌었다.
“고, 고, 공녀님! 공작님을 뵙게 해 주십시오! 제, 제발 부탁입니다!”
욕을 한 건 언제고, 매우 간절한 목소리였다.
나는 더욱 의아해졌다. 아니, 그러니까 어둠이 깊어지는 이 시각에 그 남자는 왜 여기서 찾냐고.
“왜 내 약혼자를 여기서 찾는데?”
“그야, 그분께서 행방이 부, 불명되셨으니까…… 당연히 이곳에…….”
“없는데?”
내 말에 시종의 얼굴로 불신이 차올랐다.
나는 픽 웃었다.
“불쾌해. 내가 시종 따위를 속이기 위해 거짓말을 할까?”
“…….”
그러자 시종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틀린 말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고, 공작님께서는 낮에 부, 분명 알츠베이트 저택으로 향하셨다고 드, 들었습니다.”
“그래, 그리고 돌아갔지.”
저택을 뒤집어 놓고 내 머릿속도 아주 엉망으로 만들어 놓고 말이지.
내 말에 시종의 얼굴로 이제는 절망마저 어렸다.
아무래도 그 남자가 여기로 왔다가 아무런 소식 없이 영지로 복귀하지 않아서 내가 감금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샤를리즈의 행보로 봐서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일이긴 하지만.
진짜 샤를리즈도 그런 짓은 못했을걸. 그랬다간 아스킨과 정말로 끝이 날까 봐 무서워했던 것 같으니.
“돌아갔다고.”
내 선언에 시종의 얼굴로 어리는 절망은 더욱 커졌다.
“뭐 때문에 남의 저택에서 난리야?”
“…….”
허, 이것 보게. 남은 납치범으로 매도하면서 본인이 가져온 내용은 말하지 않고 무례하기까지 하네.
나는 찡그리며 근처에 있던 문지기와 뒤에 있던 제트에게 손짓했다.
“쟤 쫓아내.”
문지기가 움직일 것도 없이 바람처럼 움직인 제트가 시종을 질질 끌고 갔다.
“아, 고, 공녀님…… 감히 청이 있습니다. 호, 혹시나 공작님을 보게 되시면 아리아 님이, 고, 공녀님이 매우 위급하다고 알려 주십시오!”
“……뭐?”
나는 손을 들었다. 그러자, 움직이던 제트가 멈춰 섰다.
“그게 무슨 소리야. 똑바로 설명해.”
“하, 하지만.”
“너도 소문처럼 처리되고 싶니?”
“……힉! 아리아 님이, 공녀님이 많이 아프십니다. 지금 당장 공작님을 봬야 하는데.”
아리아가 아픈데 아스킨이 행방불명이라니.
이건 분명 아스킨이 의도한 상황은 아닐 거다.
그 남자는 세상 무엇보다 제 여동생을 아끼는 남자니까.
그리고 아리아의 상태가 심상치 않은 듯했다.
만약 영지 내 의원으로 해결될 일 같았으면 시종이 알츠베이트 저택까지 달려오지 않았을 테니까.
나는 마지막으로 만났던 아리아의 얼굴을 떠올렸다.
‘……수척했지만 괜찮아 보였는데.’
일단 무슨 일인지 몰라도 아리아는 절대로 지금 죽어선 안 됐다.
우선은 내 목숨 줄이 그 예쁜 아가씨에게 달린 것이기도 했고.
……죽길 바라지도 않지.
“제트, 당장 치료 마법사와 가문 주치의를 불러.”
나는 이렇게 말하고는 팔에서 두르고 있던 팔찌를 3개 빼냈다.
값비싸기 짝이 없는 이것들을 모두 제트에게 내밀었다.
“치료 마법사에게 던져줘.”
“……예.”
제트가 달려가기 직전 나를 한번 보았다.
“……공작님께서 아시면 가만히 계시질 않으실 겁니다.”
“상관없어. 당장 서둘러. 최대한 빠르게.”
내 급한 목소리에 제트가 더는 질문 없이 끄덕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치료 마법사와 가문의 주치의가 레무트 영지에 잘 도착했고, 아리아가 그들에게 치료를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새벽이 깊을 때 전해진 소식이었다.
‘고비는 넘겼고 목숨엔 지장이 전혀 없다.’
그 소식을 듣고서야, 나는 겨우 뜬눈으로 버티던 걸 멈추고 실 끊어진 인형처럼 잠에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