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3화 (34/194)

33화

* * *

아스킨이 서둘러 영지에 도착했을 때, 모든 상황은 종료된 뒤였다.

“아리아!”

아스킨이 허겁지겁 성안으로 들어왔다. 분주히 움직이던 시종들이 아스킨을 보며 얼른 고개를 조아렸다.

아스킨은 그들이 들고 있는 물수건이며 물이 담긴 대야를 보고는 미간을 좁히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곧 유모 마사가 그에게 달려왔다.

“마사, 아리아는?”

“아, 아가씨께서는…… 흐읍, 편히 잠드셨습니다. 공작님.”

마사는 아스킨과 아리아가 어린 시절부터 함께한 유모였고, 특히 아리아를 오랫동안 돌본 이였다.

때문에 아리아의 상태는 그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었다.

아스킨은 마사의 얼굴만 보아도 아리아의 상태를 알 수 있었다.

그녀의 주름진 얼굴은 창백했다. 그러나 아스킨은 그녀의 표정을 어렵지 않게 읽었다.

아리아는 무사하다.

고비를 넘긴 것이다.

“……어떻게 고비를 넘긴 거지?”

벤과 잠시 다녀올 곳이 있었다.

최근 아스킨이 공을 들이는 지역으로, 그의 생각이 맞아 떨어진다면 앞으로 그에게 재화를 가져다줄지도 모르는 곳이었다.

아스킨에게 제1순위는 언제나 여동생 아리아였지만, 오늘만은 안전하리라 생각하고 잠시 다녀왔던 참이었다.

그러나 안일한 생각의 대가는 컸다.

레무트 영지에도 공작가 주치의라고 할 수 있는 의사가 있었지만, 솔직하게 말해 유능한 의사는 아니었다.

그렇기에 아리아가 몸이 안 좋아질 시기가 되면 아스킨이 직접 수도에서 의사를 데려오곤 했다.

하필 그가 잠시 안심했을 때 아리아의 몸이 급격하게 안 좋아질 줄은 몰랐지만.

다만, 의외였다.

매번 수도에서 데려오는 의사 정도의 능력이 아니면 아리아의 증상과 특이한 발작을 막지 못할 텐데?

“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말해 보도록.”

“…….”

이상했다.

마사를 비롯해 주변의 기사들, 시종들까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우물쭈물했던 것이다.

어떠한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이.

그렇다고 곤히 잠들었다는 아리아를 깨울 수도 없었다.

시시각각 차가워지는 아스킨의 표정을 본 마사가 총대를 멨다.

그녀는 속으로 질끈 눈을 감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공녀님께서 알츠베이트 공작가의 주치의를 보내 주셨습니다…….”

아스킨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가 입을 달싹거렸다.

그러나 아스킨은 말을 꺼내기 직전 마사에게 할 말이 남았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리고? 또 할 말이 있는 눈치인데.”

“…….”

“마사, 당신은 숨기는 게 있을 땐 왼쪽 눈썹이 떨려.”

마사가 난감한 표정을 짓더니, 어색하게 웃었다.

역시 우리 도련님은 못 속여……. 이렇게 생각하며 마사가 다시 한번 조심스레 입술을 떼었다.

“공녀님께서는 치료 마법사도 함께 보내 주셨습니다……. 마법사가 아니었다면, 아가씨는 체력이 떨어져 버티지 못하셨을 거예요.”

“…….”

아스킨은 형언할 수 없는 기분을 느꼈다.

솔직히 듣는 순간 놀랐고 동시에 후회했다.

듣지 말아야 할 진실을 알고 만 기분이었다.

마사가 숨기고 있는 것이 궁금했지만, 이런 진실을 듣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

정말 진실이긴 한가? 아니, 이런 가정은 옳지 않았다.

이 순간에 난감하고 얼떨떨한 얼굴을 한 모든 가신들과 기사들, 시종들이 증인이었으니까.

“……사실인가.”

“네, 그렇습니다.”

치료 마법사.

그들은 치료 마법만 전문적으로 배운 이들로 어딜 가든 백작 작위를 가진 것만큼의 대우를 받았다.

게다가 실력이 좋은 이들의 능력은 부르는 것이 곧 값이었다.

돈이 썩어 넘친다는 알츠베이트에서는 애지중지하는 외손녀의 무릎이 까진 상처에도 부른다는 소문이 있었지만.

레무트 영지의 사정은 달랐다.

“……값은, 공녀님께서 이미 치르셨으니 받지 않겠다고 하시고 돌아갔습니다.”

의사와 치료 마법사는 이미 돌아간 뒤였다.

“그래, 알겠다. 모두 자리로 돌아가도록.”

아스킨이 그렇게 명하는 순간이었다. 하녀 한 사람이 그에게로 달려와 아리아가 눈을 떴음을 알렸다.

아스킨은 한달음에 아리아의 방으로 달려갔다.

“아리아!”

“……오빠!”

막 침대에 힘겹게 기대 있던 아리아가 반갑게 그를 불렀다.

아스킨은 창백해지다 못해 핏기라고는 전혀 없는 여동생의 얼굴을 보고서 멈칫했지만, 곧 아무렇지 않게 침대 앞에 앉았다.

“아리아, 소식은 들었다. 내가 미안…….”

“오빠, 들었어?”

옆에 있어 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사과를 하려는 순간, 아리아의 조그만 목소리가 그의 음성을 가로챘다.

아리아는 뜻밖에 들뜬 표정이었다.

희미하지만 홍조마저 도는 뺨이었다.

“공녀님이 나를 도와주셨대! 혹시…… 우리, 공녀님을 오해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아스킨은 무어라 말하려 입을 달싹이다가 이내 꾹 다물었다.

그러고는 무뚝뚝하게 끄덕였다.

“……아직 안색이 안 좋으니 좀 더 자는 게 어때.”

“오빠, 내 말 진지하게 들어 줘! 어떻게 우릴 위해서 주치의랑 예약해도 받지 못한다는 최고의 치료 마법사를 붙여 주실 생각을 하셨을까?”

아리아가 자신의 뺨을 잡았다.

“사실…… 공녀님이 나랑, 친구 해 주시겠다고도 했어.”

그의 여동생은 발작을 일으키고 나면 심한 우울증에 시달렸다.

여동생은 그의 짐이 되는 것을 끔찍하게 여겼다.

“……나 때문이야.”

그렇기에 그는 여동생 앞에서 돈과 관련한 이야기는 죽어도 할 수 없었다.

길게는 한 달 동안이나 미소를 잃은 채 눈물로 지새우는 시절도 허다했다.

이 모든 시절을 그는 똑똑히 기억했다.

유일한 가족, 눈앞의 여동생이 이토록 기쁘고 희망찬 미소를 짓고 있는데, 여기에 초를 치는 행동은 할 수 없었다.

“……별일이군. 그 여자가 친구라니.”

“그치? 나 같은 애랑 친구라니……. 꿈같아. 아주아주 예쁘고 멋진 분이잖아……!”

차마 그 여자를 인정하는 말은 나오지 않아 나온 것은 그저 무뚝뚝한 대꾸뿐이었지만, 아리아는 이것으로도 기쁜지 작게 박수를 치며 예쁘게 방긋 웃었다.

아스킨은 아리아가 오랜만에 자신의 나이답게 행동하는 것이 신기했다.

하지만 더욱 약해진 체력 탓인지 곧 아리아는 피로해했다.

이를 기민하게 느낀 아스킨은 여동생을 억지로 재웠다.

“……오빠.”

아리아가 가물가물, 잠이 잔뜩 붙어 있는 눈을 억지로 뜨며 그를 향했다.

부러질 듯 가는 손가락이 그의 옷자락을 붙잡은 채였다.

“오빠는, 공녀님이…… 많이, 밉지……?”

아스킨은 대답 대신 여동생의 손가락을 응시했다.

유약한 손이다.

그 여자가 밉냐고?

그가 샤를리즈 알츠베이트에게 가진 감정은 겨우 한 줄로 설명할 수 없었다.

마음속에 있는 기나긴 감정을 하나로 뭉치자면…… 원한과 증오일 것이다.

아리아는 모르는 무수히 많은 사건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 순간 이를 꺼내는 대신 그저 말없이 끄덕였다.

“나, 때문이야……?”

“아니야.”

“그럼, 있잖아, 한 번만, 딱 한 번만…… 공녀님한테도 기회를 주면, 안 될까……?”

그 말에는 숨이 막혔다.

유일한 가족인 여동생을 아끼고 또 아꼈지만 그것만은 차마 답이 나오지 않았다.

아리아는 이해한다는 듯 어색하고 희미하게 웃으며 그를 놓아주었다.

피로했는지 아리아는 순식간에 잠에 빠져들었고, 그는 그대로 조용히 방을 빠져나왔다.

아리아의 방 앞에는 그녀를 걱정하는 이들이 여전히 모여 있었다.

아스킨은 모두를 물리고, 자신의 집무실로 들어갔다.

아무도 없는 방, 그는 소파에 털썩 앉아 미려한 얼굴을 문질렀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왜, 그 여자가…….’

왜 하필 샤를리즈 알츠베이트가 그의 여동생을 이토록 챙겼단 말인가.

“아냐, 오빠, 공녀님은 내가 추울까 봐, 마차 안으로 들여 주신 거란 말이야! 게다가, 내 머, 머리도 빗어 주셨는데……!”

비가 몹시도 쏟아지던 날, 그는 그 여자가 여동생을 괴롭힌 것이 틀림없다 여겼지만, 아리아가 말하는 진실은 달랐다. 믿을 수 없었다.

그 여자가?

“당신이 망가지는 모습이 보고 싶어. 괴로워하면 짜릿해.”

이렇게 말하던 여자가?

“……고, 공작님. 공녀님께서 저희를 도와주셨습니다. 인부는 물론…… 물과 음식을 아무런 대가 없이 지원해 주셨습니다……!”

“가, 가족이 덕분에 기운을 차리고 살았습니다!”

그는 최근에 레무트 영지에서 돌고 있는 ‘샤를리즈 천사설’을 알고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이미 일어난 현상은 모두 그 여자가 새롭게 선보이는 꿍꿍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정말 꿍꿍이를 가졌다고 하기엔 그녀의 행보는 이상했다.

“혼자 넘어진 건데, 할아버지가 오해를 했네.”

“당신도 시간이 필요하겠지. 한번 생각해 봐. 당신 말대로 내가 갑자기 더 미친 사람처럼 만나는 데만 집착하는 게 이상하지 않았어? 만나자고만 했지 다른 수작은 벌이지 않은 것도 처음이잖아?”

가느다란 목소리가 그의 귓가에서 웅웅 울렸다.

“나는 몇 번이고 기회를 주었다. 하지만 걷어 찬 건 저놈이지. 네 짝이 아니었다 생각해라.”

“잠깐만요, 할아버지. 이건…….”

“뭣 하고 있는가!”

언제나 폭군처럼 오만하게 굴던 여자가 힘없이 끌려가며 울 것 같은 얼굴을 했던 것은, 그가 가진 정의에 반하는 모습이었기 때문일까?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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