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한 가지만 묻자. 그렇게 더러운 돈 왜 빌렸니?”
“…….”
“한창 아쉬울 땐 더럽다는 생각, 안 했던 거야?”
틀린 말이 아니다. 샤를리즈, 그 여자를 진정 증오했지만.
진정 그 여자를 증오할 자격은 있던가?
결국 그 더러운 돈을 빌리기로 한 것은 모두 자신의 결정.
아스킨이 자신의 눈을 덮은 채로 꾹 눌렀다.
“대신 금액이 변경되었으니 제 쪽에서 한 가지 조건을 더 제시하겠습니다.”
샤를리즈의 가는 목소리가 멀어지고, 이안 차일드의 예의 바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알츠베이트 공녀님과 반드시 파혼해 주십시오.”
아스킨은 자신도 모르게 이를 갈았다.
차일드 가문의 꿍꿍이는 또 무엇인가? 세상에 공짜는 없다.
……그가 파혼을 목적으로 돈을 빌리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어째서 갑자기 반드시 파혼해야 한다는 조건을 요구한 것인가?
아스킨이 천천히 눈을 떴다.
미려한 얼굴이 느릿하게 기울어졌다. 차가운 표정이 떠올랐다.
“……새로운 장난감이라도 찾은 건가.”
만약 그 여자와 이안 차일드가 미리 짜 놓고서 자신을 기만할 확률은 얼마나 되는가.
샤를리즈의 새로운 약혼자가 혹시 이안 차일드가 될 예정인 건가?
아니, 아니. 그럴 이유가 없었다.
아스킨은 자신이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했다는 것에 조금 충격을 받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 * *
짹짹짹.
나는 아주 느지막하게 일어났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제일 먼저 안절부절못하는 하녀들을 마주했다.
“뭐야, 왜 그러니.”
“고, 공녀님……!”
수잔이 대표로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오, 오전 8시부터 공작님의 명으로 기, 기사들이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아아. 그래?”
나는 심드렁하게 고개를 돌렸다.
하녀들은 다들 놀란 기색이었지만, 나야 뭐.
‘예상했던 일이지 뭐.’
제트가 말하지 않았던가. 할아버지의 귀에 들어갈 텐데 괜찮겠냐고.
분명 어젯밤에 맘대로 의사랑 마법사를 보낸 게 들킨 거겠지.
짐작했던 일이었다.
오히려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지금 바로 가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생각은 그렇게 하면서도 느긋하게 하품을 했다.
‘원래 나한텐 청개구리 기질이 있었지.’
어제부로 할아버지를 향한 생각이 확 바뀐 참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좋지 않은 인식에 ‘그나마 손녀딸은 지극히 사랑하는 할아버지’에서 이제는 그 애정 아래 깔린 진실도 알아차렸달까.
괘씸하게까지 느껴졌다.
기왕 생각도 바뀌고, 삐딱해진 김에 이대로 버텨 볼까 싶기도 했다.
그렇게 방 안에서 옷을 갈아입기는커녕 대충 가운만 입고, 방에 마련된 디저트를 늦은 첫 끼 삼아 우물거렸다.
다리는 소파에 쭉 뻗은 채로 흔들흔들.
느긋하게 신문이나 펼치는 체했다.
나를 보던 하녀들이 더욱 어찌할 바를 몰라 하다가, 내 행동이 이어지자 무슨 결심을 한 건지 열심히 시중을 들기 시작했다.
“고, 공녀님……! 쿠, 쿠키는 식사로 부족해요. 샌드위치도 드셔 보세요.”
“목 막히시죠? 음료도 드셔야 해요.”
“……어? 어.”
나는 졸지에 내미는 잔을 얻어먹으며 눈을 깜빡였지만.
그렇게 작정하고 시간을 죽이는데,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그냥 노크가 아닌 거칠기 짝이 없는 소리였다.
‘흐응, 올 것이 왔나.’
나는 저 거친 소리에도 느긋하게 턱을 기댄 자세 그대로 문을 향하기나 했다.
아마 할아버지가 기사들을 닦달하고 더는 참지 못한 기사들이 문을 저렇게 두드리는 거겠지.
이제 문을 거칠게 박차고 끌고 가기라도 하려나?
갈등되겠네. 당장의 공작의 분노를 감당할지, 악녀의 후폭풍을 감당할지.
‘뻔히 보이는 선택지지만.’
이 저택의 주인이 누군지는 뻔하지 않나.
문이 열리고 누군가 성큼 들어왔다.
관심 없는 척 발소리나 듣다 고개를 돌린 순간, 눈을 크게 떴다.
‘폭군?’
눈앞에 폭군 오빠가 서 있었다.
“뭐야? 그 띠꺼운 표정은.”
“……오빠?”
“그럼 네 오빠지 누구겠냐?”
록시디언이 삐딱하게 선 채로 목깃을 쭉쭉 잡아당겼다. 불편하다는 듯이.
“인사도 안 하냐?”
“……갑자기 무슨 일이야?”
다시 눈을 떠도 록시디언이었다.
시선을 옮기면 문 근처에서 서성이는 내 호위 기사들이 보였다.
나를 보면서 모두가 당혹스럽거나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폭군이 여기 오는 건 저쪽에서도 예상 못한 일이었다는 건데.’
어째 할아버지 쪽 기사들을 보고 있으려니 통쾌해졌다.
그래 난감해해라, 해. 기사들 중에 유일하게 평온한 표정을 한 사람이 있다면 제트였지만.
나는 시선을 떼어 내 폭군 오빠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무슨 일로 찾아온 건데?”
“허어, 무슨 일이 있어야 보냐?”
“……그럼?”
내가 고개를 갸웃하자, 록시디언은 표정을 와락 일그러트렸다.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이었다.
왜, 뭔데. 뭐. 뭐가 또 심기에 거슬린 건데?
“됐다. 아량이 드넓은 황제께서 친히 봐주시마.”
뭐래는 거야. 이번엔 내가 찡그릴 차례였다.
어쨌거나 이대로 있었다면 꼼짝없이 기사들에게 연행당할 처지였으니.
고맙고 반갑던 처지라 한번 참아 주기로 했다.
“됐고, 너 나 좀 따라와라.”
“……갑자기?”
“그래.”
그런데 이놈의 폭군 오빠의 텐션은 내가 따라잡을 수 있는 게 아니었던 걸까?
“디자이너가 드레스 완성됐다고 데려오라던데.”
“……한낱 디자이너가 황제를 오라 가라 했다고?”
그게 아니라 님이 그냥 오고 싶어서 쳐들어왔다고 하면 말이 되는데.
나는 뒷말을 삼키며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폭군을 보았다.
폭군은 ‘뭐, 왜. 죽을래?’로 해석될 만한 표정을 했다.
저 띠꺼운 표정을 보고 있으려니 왜 윤지훈이 겹쳐 보이는 건지.
“아, 어쨌거나. 입어 봐야 된다잖아. 징징 울잖아? 일어나기나 해.”
“어딜 가려고? 설마 황성?”
“그럼 어딜 가겠냐?”
폭군이 틱틱 대는 표정으로 나를 재촉했다.
“안 갈 거냐?”
“안 갈…… 리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폭군이 이상하게 느끼지 않을 정도의 속도로.
이미 속은 쌈바 춤을 추고 있었다.
마침 할아버지 얼굴 보기 싫었는데, 너무 잘됐잖아?
나는 빈둥대는 것이 언제였냐는 듯, 하녀들을 불러 빠르게 준비했다.
물론 옷 갈아입겠답시고 폭군을 내쫓는 것도 잊지 않았다.
폭군은 ‘뭐야, 감히 황제를 내쫓아?’ 짜증을 내면서도 웬일로 얌전히 나가 주었지만.
나는 하녀들 덕분에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외출 준비를 마치고 나설 수 있었다.
그렇게 준비를 마치고 문을 여니, 폭군이 문 맞은편 벽에 삐딱하게 기대어 있었다.
‘오, 역시 남자 주인공 아니랄까 봐. 생긴 것만은 그림이네, 그림.’
나는 생긋 웃었다.
오빠의 얼굴 위로 익숙하지 않은 기다림으로 인한 짜증이 역력한 게 그대로 보였다.
오, 진짜 남매도 아닌데, 마치 윤지훈의 불행은 내 행복이었던 날처럼 기쁜 건 왜일까.
내 안에 남아 있는 샤를리즈의 기억 때문인가?
“왜 이제 나와? 장난해?”
“이 정도면 엄청 빨리 준비한 건데.”
“감히 날 기다리게 하다니.”
나는 속으로 웃음을 참았다.
조금만 지나면 님을 아주 열심히 기다리게 만들 여성이 등장할걸?
여주인공이라고, 님을 아주 그냥 사랑의 포로로 만들 거다.
나는 책 속 내용을 떠올리며 속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나저나 이 인간은 황제씩이나 되면서 왜 호위나 부관 하나 없이 혼자 다녀?
아무리 본인이 대단한 사람이라고는 하지만 너무 조심성이 없는 거 아니야?
“왜 오빠는 혼자 다녀?”
“있어. 귀찮아서 두고 왔을 뿐이지.”
“어디에?”
록시디언이 짧게 마차에. 하고 응수했다.
아니, 결국엔 혼자 쳐들어온 거 맞잖아? 나는 허, 혀를 차고는 어깨를 으쓱했다.
알 게 뭐람. 본인이 알아서 하겠지.
게다가 그림자를 쭉 찢고 나타나던 노아의 모습을 떠올리면 그리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얼른 가기나 하자. 드레스 궁금해.”
“허어. 누가 주인인지.”
폭군이 쯧 혀를 차면서도 내 옆을 쫓아왔다.
그렇게 막 세 걸음쯤 더 걸었을 때였다.
모퉁이 너머로 누군가 막 돌아서 이쪽으로 오는 것이 보였다.
익숙한 얼굴, 할아버지였다.
할아버지 또한 우리를 보았는지 자리에서 멈춰 섰다.
정확히는 폭군 쪽을 보고 찡그리는 것 같았지만 잠깐이었다.
“……제국의 태양, 금빛 아래 우짖는 짐승의 왕.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폭군은 삐딱하게 할아버지를 볼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나를 향해 짓궂은 듯 장난 가득한 표정을 짓던 것은 온데간데없이 겨울 서리처럼 차갑고 날 선 얼굴이었다.
아니, 저 오빠는 기본 얼굴이 좀 날 서고 사나운 쪽이지.
곧 록시디언의 입가로 삐딱한 웃음이 걸렸다.
결코 우호적인 미소는 아니었다.
“황실의 신성한 짐승이 이따위로 불리는 꼴도 다 듣는군. 공작. 이런, 조롱도 작작해야지.”
게다가 자신의 외조부를 부른다기엔 차가운 적의와 냉소가 어린 목소리.
할아버지 쪽도 이런 태도가 익숙한 모습이었다.
“조롱이라니, 존경하는 폐하의 앞에서 가당키나 한 언행이겠습니까.”
“그래? 그럼 나도 지껄여 볼까. 곧 머리가 벗겨질 탈모 예정 너구리. 아, 물론 공작을 말하는 건 아닐세.”
“…….”
“……푸훕.”
할아버지의 시선이 내게 머물기 전에 나는 얼른 표정을 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