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와, 어쩜 저렇게 딱 적절한 표현이 있지.
할아버지가 살집이 있다 보니, 겹친 턱 선 같은 것에 너구리란 호칭이 딱이었다.
……게다가 탈모. 음, 탈모까진 아닌 것 같은데.
“페하께서 제 사랑스러운 손녀와는 무슨 일이십니까?”
“공작의 외손녀 말고 내 여동생을 보러 오긴 했지.”
“……그렇습니까?”
“내가 내 동생 만난다는데 무슨 불만이라도 있어?”
“여부가 있겠습니까.”
알츠베이트의 외손녀나 황제의 여동생이나 결국 나를 가리키는 건 매한가지인데.
보이지 않는 팽팽한 끈이 보이는 것 같았다.
“다만, 제 사랑하는 손녀에게는 불필요한 소리는 말아 주십시오.”
“불필요한?”
“이는, 폐하께서 더 잘 아시지 않습니까?”
나는 심심해서 가지고 나온, 악녀템. 부채를 입가에 가져다 댄 채로 흥미진진하게 두 남자의 기 싸움을 보았다.
와 이거, 나를 두고 싸우는 거긴 한데.
‘내 얘긴데도 재밌다!’
남의 일처럼 느껴졌다.
‘불필요한 소리라면 혹시…… 전에 폭군 오빠가 내게 한 소리 같은 건가. 알츠베이트를 버리고 황족이 되라는?’
샤를리즈 기억에는 없지만. 어쩌면 록시디언 쪽에서 그런 얘기를 몇 번 떠본 게 아닐까.
그리고 할아버지 쪽도 그걸 알았고?
“하, 애정이라. 그런 애정을 품은 공작이 내 동생을 그런 쭈구리 같은 놈이랑 약혼시켰냐?”
이어진 폭군의 오빠에 말에는 감상도 잊고 놀라 쳐다보고 말았다.
약혼자님을 쭈구리라고 하다니. 그런 사람은 너밖에 없을 거다. 하는 시선으로.
‘……솔직히 나도 마음에 드는 건 아니지만 쭈구리는 아닌데?’
록시디언은 내 시선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찡그렸다.
그러나 자신의 비아냥거림을 취소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레무트 공작은 어느 누구처럼 자신의 지위만 믿고 까불지 않고 분수를 아는 사람이지요. 게다가 내실이 튼튼한 남자이니 제 손녀의 배필로 충분하다 생각합니다.”
적의 적은 오히려 동료라고 했던가.
‘내 마음엔 쏙 드는데? 내 알 바?’라고 해석되는 대사였다.
할아버지는 평소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욕을 일삼던 약혼자님을 칭찬해서까지 폭군의 심기를 거스르고 싶은 모양이었다.
“하, 내실이 좋아? 그렇게 내실이 좋은 인간이 돈에 팔려 약혼도 하던가.”
“제 손녀딸의 약혼자를 모욕하시는 겁니까? 지금 비웃으신 레무트 공작이 스무 살에 만든 공적을 황실이 꿀꺽 삼킨 일은 이 늙은이 기억에도 선명합니다만.”
“나는 값이라도 아주 잘 쳐 줬지. 아, 늙은이들이 고작 스무 살 꼬맹이가 정계에 들어올까 싶어 짖어 대던 꼴은 아주 선명하네.”
“…….”
록시디언이 기분 더럽다는 듯 확 찡그렸다.
“그대야말로. 돈만 있다면 바로 떠날 놈을 그리도 아낀다는 손녀와 짝지어 준 게 자랑인가? 그 애정 참 얄팍하기도 하군그래. 과연 외조부로서 잘한 짓이냐?”
차가운 목소리에선 서릿발 같은 비아냥이 이어졌다.
정말 사실만을 나열하듯 목소리 높낮이에 큰 변화가 없다 보니, 더욱 큰 타격으로 오지 않을까 싶었다.
나야 흥미롭게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보다 조금 놀랍긴 했다.
‘와, 이 오빠는 샤를리즈보다는 저 할아버지가 훨씬 싫은가 봐.’
이쪽도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법인지. 나를 감싸면서 저 할아버지를 폭격하고 있었다.
통쾌해서 좋지만.
“……말씀 신중히 생각해 보지요.”
할아버지는 빡쳤지만 꾹 참는 눈치였다.
하기야 이러니저러니 해도 록시디언은 광증만 제외하면 일신의 능력이 대단한 황제였다.
게다가 무력도 출중한 황제.
‘대놓고 반기를 들 수 있을 만한 사람은 아니지.’
그렇다고 할아버지가 성격상 자존심을 구기게 만든 사람을 그냥 두는 사람은 아닐 테니.
아마 뒤에 가서 뭐든 하지 않을까? 못된 꿍꿍이라거나.
나한테 불똥이나 안 튀면 좋겠네.
‘아니, 내 평화로운 약혼 유지 계획에도 말이지.’
태평하게 바라보던 내게로 할아버지의 시선이 닿았다.
그보다 먼저 커다란 폭군의 손이 내 어깨를 짚었다.
“야, 너 먼저 가 있어.”
“어어? 어, 어딜?”
“내 마차. 당장.”
나는 폭군이 떠미는 대로 쭉쭉 밀렸다.
할아버지의 눈치가 좀 보였지만 사나워진 폭군 오빠의 눈과 등쌀에 밀려 결국 건물 밖으로 걸어갔다.
할아버지는 몹시도 못마땅한 기색이었지만, 나를 붙잡으려 하다 황명을 운운하는 폭군의 말에 뒤로 물러났다.
슬쩍 뒤를 돌아보면 할아버지의 뒷모습과 폭군의 심상치 않은 표정이 보였다.
‘흐음, 설마 이 저택에서 한판 하진 않겠지.’
* * *
“최근 방문이 잦으시군요.”
샤를리즈가 사라지기 무섭게, 알츠베이트 공작의 얼굴로 서늘한 표정이 어렸다.
이는 록시디언 또한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샤를리즈 앞에서 지었던 표정이 장난이었다는 듯 살벌해진 얼굴이라 공작 근처에 있던 기사들이 절로 긴장했다.
그만큼 록시디언이 내뿜는 적의와 기세는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이 사나웠다.
“제 외손녀를 너무 자주 찾아오지 말아 주시겠습니까?”
록시디언이 비웃었다.
“내가 왜?”
“황족이 아닌, 알츠베이트의 딸입니다.”
록시디언이 멈칫했다. 당황해서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속으로 재밌다는 듯 웃고 있었다.
공작이 이리도 깊게 믿고 있는 제 외손녀, 샤를리즈. 이 공작은 곧 아끼는 외손녀를 제 손으로 내치게 될 테니까.
원래부터, 필요 없다면 뭐든 미련 없이 내치는 사람이었다.
심지어 자신의 딸조차도.
“알츠베이트의 것이란 말입니다.”
지금이야 사람들이 쉬쉬하지만, 오래전 알츠베이트 공작이 딸을 황실에 직접 판 것이나 다름없다는 얘기는 유명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의 모친이었던 알츠베이트 공녀는 잠행 나온 황제를 평민 남자로 오해하고 사랑에 빠졌다.
그리고 이를 알게 된 알츠베이트 공작은 미천하고 하찮은 것과 사랑에 빠졌다며 불같이 화를 냈다.
이후 평민 남자가 황제란 걸 알게 되자, 공작의 태도는 180도 변했다.
“황제에게 가거라.”
직접 자신의 딸을 황제에게 바친 것이다.
물론 그들이 낳은 아이 중 하나는 알츠베이트에게 넘긴다는 계산적인 조건까지 딸에게 내걸게 하면서.
어렸던 샤를리즈는 모르겠으나, 록시디언은 이 모든 것을 아주 어린 시절부터 귀가 아프도록 들어 왔다.
록시디언은 알츠베이트 공작의 날 선 반응에도 속으로 피식 웃었다.
‘과연 언제까지 그렇게 지껄일 수 있는지 보자고.’
그는 즐거워졌다.
과연, 제국의 망할 망나니이자 악녀인 제 여동생이 또 얼마나 큰 사고를 쳐서 이 집안에서 쫓겨날까. 기대가 될 지경이었다.
“기왕 제 손녀딸을 직접 내쫓으셨으니, 묻겠습니다. 제 저택까지는 무슨 일로 친히 방문해 주셨습니까?”
“내가 그대에게 방문 목적을 말해야 하나?”
내가 황젠데, 목적씩이나 말해 줘야 하냐?
삐딱한 록시디언의 대꾸에 알츠베이트 공작이 입을 꾹 다물었다.
어딜 보아도 외조부와 손자의 대화로는 보이지 않는 모습이었다.
“왜 왔냐라.”
록시디언은 변덕을 부리려는 듯 돌연 조소를 지우고 씩 웃었다.
“그래도 핏줄인데 이번 여신의 축복 날 기념 연회에서 후줄근한 드레스나 걸치고 올까 봐 황실에서 직접 제작한 드레스를 선물 주러 왔지.”
“……예?”
알츠베이트 공작의 수염이 잘게 떨렸다.
그는 분노를 간신히 참고 록시디언에게 말했다.
“저는 이미, 제 손녀에게…….”
“아 됐고. 별로 궁금하진 않네.”
록시디언이 피식 웃는 그대로 알츠베이트 공작을 위에서 아래로 훑고는 그대로 지나쳐 걸어가 버렸다.
“피차 다시 보지 말자고. 기왕이면 그대가 좀 피해 봐. 난 귀찮으니까.”
나이 든 공작의 어깨가 마구 떨렸다.
록시디언의 걸음 소리가 멀어졌다.
알츠베이트 공작이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로 자신의 부관을 불렀다.
“……당장, 제국에서 가장 비싸고 좋다고 생각되는 장식품, 옷감, 옷, 뭐든 다 사서 샤를리즈에게 주도록 해!”
“네, 넷! 알겠습니다.”
알츠베이트 공작의 분노가 두려웠던 부관이 머리가 땅에 닿도록 조아렸다.
본래 알츠베이트 공작은 최근 잦은 샤를리즈의 외출을 나무라러 온 것이었다.
여행에서 돌아와서는 그리도 조용히 살라 했건만 도통 지키질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록시디언이 끼어들면서 알츠베이트 공작의 목적은 사라졌다.
‘뭐, 내 손녀에게 드레스를 줘?’
웃기지 마라. 내 손녀의 터럭하나 내주지 않을 테니.
알츠베이트 공작의 목적은 완전히 바뀌었다.
황실의 재력에 질 수 없다.
록시디언의 비웃음에 헤집어진 공작의 속은 쉽사리 진정되지 않았다.
아니, 다른 것은 몰라도 재화와 부, 돈에 대한 자부심만큼은 황실 못지않은 게 바로 이 알츠베이트가였다.
자신이 바로 그 황금의 주인 알츠베이트 공작이었다!
“황실 디자이너가 누군지 알아내라. 그리고 샤를리즈에게 간 드레스는 돈을 더 주더라도 더는 똑같은 옷은 만들지 못하게 막아. 말을 듣지 않는 자가 있다면…… 죽여 버려도 좋다.”
“……네, 명심하겠습니다. 각하.”
그사이, 록시디언은 걷다 말고 복도 끝에서 슬쩍 알츠베이트 공작 쪽을 돌아보았다.
자신의 예상대로 속이 뒤집어질 대로 뒤집어져 길길이 날뛰는 제 외조부가 보였다.
예상대로였다.
‘당신은 돈만 아는 탐욕스럽고 성가신 돼지란 말이지.’
록시디언은 배부른 짐승처럼 흡족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