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 * *
“흐암…….”
나는 늘어지게 하품했다.
오늘 늦게까지 잤음에도 불구하고 눈이 절로 감겼다.
‘사람은 일정 시간 이상 자면 오히려 몸이 더 피로해진다던데.’
이게 아니더라도 샤를리즈의 체력이 약한 건 아닐까?
……아니다. 샤를리즈가 쳤던 깽판을 돌이켜 보면 체력 좋은 주폭 망나니 같기도 하고?
‘일단 술도 세고 숙취도 남들보다 덜 느끼잖아?’
술이 남들 배로 센데도 그 이상을 먹다가 난폭한 주정뱅이가 돼서 그렇지.
근데, 그럼 뭐 하나?
‘난 알코올 쓰레기잖아? 망했어. 망했고요…….’
다시금 억울함이 느껴졌다.
샤를리즈 행세를 시키려면 똑같은 몸 상태로 주든가. 이게 뭐냐고.
나는 속으로 중얼거리다가 고개를 들었다.
“…….”
현재 나는 폭군 오빠가 타고 온 마차 앞, 한적한 의자에 아무렇게나 앉아 있었다.
록시디언이 마차에 타고 있으라고 했지만 이렇게 날이 좋은데 안에서 기다리긴 싫었다.
갑갑하잖아.
현재 내 앞에는 말없이 대기 중인 기사가 있었다.
바로 내 호위 기사 중 하나인 제트였다.
“제트.”
“예.”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넌 왜 쫓아왔니?”
“……공녀님의 호위 기사이기 때문입니다.”
너랑 같은 호위 기사인 애들은 다 내 방문 앞에 그대로 서 있던데.
왜 너만 나를 쫓아왔느냐는 말이었는데.
“이대로 나랑 같이 움직이면 할아버지가 너만 불러 경을 칠지도 모르는데?”
“제 주인은 공녀님이십니다.”
그 말에 나는 따로 반응하는 대신 한 손으로 턱을 괴며 멀거니 제트를 보았다.
흐음, 다시 봐도 준수하게 생기긴 했네.
약혼자님이나 폭군 오빠의 외모에 익숙해진 탓에 눈에 들어오지 않을 뿐이지 만약 이곳에서 눈을 뜨고 제트부터 만났다면 충분히 감탄했을 외모였다.
커다란 덩치에 무뚝뚝한 인상이지만 이리 같은 거대한 짐승의 느낌을 주는 분위기.
특히나 저 암녹색 눈동자가 아주 인상적이었다.
“어차피 넌 할아버지가 붙여 준 기사잖아?”
“…….”
내가 툭 내뱉자, 제트가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살짝 미묘한 듯 시무룩한 표정을 짓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시 잊으…….”
“뭐야, 왜 여기 있냐?”
나는 고개를 돌렸다.
폭군 오빠가 어슬렁어슬렁 걸어오고 있었다.
‘흐응, 할아버지랑 기 싸움에선 이긴 모양이지?’
아주 만족스러워 보이는 표정이었다.
하기야 나도 둘이 싸운다면 덜 싫은 쪽이 이기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폭군 오빠가 없는 동안 약혼자님과 파혼을 막을 궁리나 해 보려 했는데, 엉뚱한 생각과 대화를 하느라 날아가 버렸구나 싶었다.
“넌 왜 더러운 곳에 앉아 있냐?”
“안 더러운데?”
나는 제트 쪽을 고갯짓했다.
“내 기사가 닦아 줬거든.”
“아니, 여기 있는 물건은 다 더럽지.”
“그냥 알츠베이트 물건이라서 싫다고 하지 그랬어?”
난 투덜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폭군을 따라 마차에 올랐는데, 의외로 저 인간이 손을 내밀어 올라갈 수 있게 붙잡아 주는 매너를 보여서 놀랐다.
웃긴 건, 손잡고 나서 마치 거북스러운 걸 잡은 것처럼 웩, 하는 시늉을 해서 나도 기분을 함께 잡쳤지만.
“으, 내가 네 손을 잡다니.”
“……나라고 좋은 줄 알아? 다음엔 붙잡지 말든가.”
저거 진짜 윤지훈이랑 하는 행동이 똑같네. 똑같아.
“싫은데? 너 연회에서는 그놈 꽁무니 쫓으면서 붙잡아 달라고 하려고 그러지? 그렇게 둘 것 같냐?”
“아, 네네. 남의 약혼사에 신경 꺼 주시구요. 오빠.”
도대체 약혼자님의 뭐가 마음에 안 드는 건지.
아니면 약혼자님이 어쩌다 폭군의 심기를 거스른 건지 몰라도 우리는 황성에 도착할 때까지 서로 투덜거리기 바빴다.
참다못해 노려보며 제발 신경 좀 꺼 달라고 했더니, 오히려 더 즐거워하길래 그냥 무시하기로 했다.
‘저게 남자 주인공인지 초딩인지.’
속으로 쯧 혀를 차면서.
곧 황실에 도착했다.
문이 열리자 노아의 얼굴이 보였다.
그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나는 곧바로 이전에 방문했던 황성 내 의상실로 안내받았다.
의상실로 들어가자, 기다렸다는 듯 도열한 이전의 디자이너와 조수들, 시녀들이 보였다.
이전에 이곳에서 있었던 일 때문인지 잔뜩 긴장한 표정들이었다.
“오셨습니까, 황제 폐하.”
특히나 시녀들 얼굴에 비친 긴장감이 제일 커 보였다.
“공녀님을 뵙습니다.”
나는 고개를 까딱했다.
오늘은 창문을 열어 둔 건지 커튼이 작게 나부꼈다.
꽤 상쾌한 바람을 맞이하며 고개를 돌렸다.
“드레스는 거의 완성되었습니다. 공녀님께서 입어 보시면 마지막 가봉을 진행하려 합니다.”
나는 칸막이를 보며 슬쩍 찡그렸다.
“그냥 봤다 치고 드레스만 받으면 안 돼? 아니면 집에 가서 입어 볼게.”
입어 보니 드레스란 게 생각보다 거추장스러웠다.
그걸 입고 벗는다 생각하니 영 내키지 않았다.
“……게다가 위대하신 폐하께서 이런 일로 직접 행차하신 게 아직도 영 이해가 안 되는데. 한심하다 생각되지 않아?”
슬쩍 록시디언을 자극해서 집에 돌아가 볼 작정이었는데, 이 폭군 오빠는 내 삐딱한 말에도 짓궂게 픽 웃어 버렸다.
“황제로서 망나니 여동생이 내 명성에 먹칠하는 걸 막는 것도 내 업무 중 하나인데? 아주 중요하지.”
“……말도 안 되는 소릴.”
“중요하다니까?”
록시디언이 나를 보며 웃는 그대로 눈을 좁혔다.
사나운 웃음, 폭군 오빠가 기다렸다는 듯이 손가락으로 동전 모양을 만들었다.
님, 갚을 때까지 뭐다?
내 노예.
……젠장. 나는 속으로 욕을 지껄이며 성큼 칸막이로 돌진했다.
디자이너와 조수들이 서둘러 쫓아왔다.
“불편하신 부분이 있으시면 뭐, 뭐든 편히 말씀해 주십사 합니다, 공녀님!”
“…….”
잠시 뒤, 나는 조수들과 시녀들의 손까지 빌려 옷을 모두 걸치고 나왔다.
시녀들의 솜씨로 머리를 어울리게 정돈하고 장신구까지 한 상태였다.
“뭐야, 나왔냐?”
남은 인형 놀이를 시켜 놓고서 본인은 바빴던 건지, 폭군 오빠는 의자에 앉은 채 어울리지도 않게 서류를 들고 있었다.
옆으로는 보좌 중이었는지 노아 또한 서류를 들고 서서 대기하고 있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폭군 오빠의 얼굴 위로 재미 반, 흥미 반 정도의 표정이 떠올랐다.
“이야, 호박에 줄 그어서 수박 됐네?”
“말은 바로 해야지. 처음부터 수박이었거든?”
아니, 최고급 멜론이다, 이놈아.
이것만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샤를리즈의 미모는 괜히 제국 최고 미인이라 불리는 미모가 아니니까.
좀 사납고 표독스러운 인상을 줘서 그렇지, 뭘 걸쳐도 알아서 소화하는 미친 미모를 가지고 있단 소리다.
‘그래, 그렇게 생각했는데…….’
내가 걸친 붉은 드레스는 신기하게도 샤를리즈의 온갖 장점을 드러내고 있었다.
단순히 드러내는 것 이상으로 잘 살려 주고 있었다.
어깨를 드러낸 오프 숄더형 드레스.
게다가 가슴골마저 살짝 보이는 형태는 샤를리즈의 취향을 반영한 것 같았다.
게다가 목 위로 걸친 푸른색 보석, 거대한 크기를 보면서 처음엔 사파이어인가 싶었는데…….
샤를리즈의 기억이 알려 주었다.
이건, 사파이어가 아니다.
블루 다이아몬드다.
평소 온갖 보석을 꿰고 있던 샤를리즈의 기억과 지식이 말하길, 제국 북부 특별한 지역에서만 나는 거대한 블루 다이아몬드였다.
황실이 독점권을 가지고 있는 보석이었지?
‘샤를리즈가 갖고 싶어 했던 것 같은데.’
물론 샤를리즈에게는 비슷한 것이 이미 있었지만 그녀는 더 크고 굵은 것을 갖고 싶어 했다.
지금 목에 걸린 건 딱 샤를리즈가 원하던 것이었다.
나는 속으로 허허, 웃음 지었다.
‘설마, 망나니 짓 잘해 보라고 이런 것도 지원해 주는 거야?’
* * *
방 안은 고요했다.
샤를리즈는 거울 속 자신의 목걸이를 감상하느라 이런 분위기를 느끼지 못했지만, 그녀를 보던 사람들은 다들 경탄을 금치 못하는 상태였다.
사람은 지나친 감정을 느끼면 오히려 말이 나오지 않게 된다.
이들의 공통된 감정은 놀라움과 감탄이었다.
‘세상에, 미인이란 건 알았지만…….’
‘정말 예쁘시다…….’
‘부러워. 어쩜 이런 외모를…….’
이곳의 조수와 시녀들 중에는 샤를리즈의 안 좋은 소문을 듣고 지나치게 겁을 먹거나 두려워하거나 혹은 싫어하는 자들도 있었다.
샤를리즈의 머리핀을 꽂고 있던 시녀 또한 샤를리즈에 대한 소문을 뼛속까지 믿던 자 중 하나였다.
그러나 샤를리즈가 가진 외모만큼은 싫어하는 이들조차 설득시키는 미모였다.
“고, 고, 공녀님!”
황실 디자이너는 갑작스럽게 샤를리즈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샤를리즈가 의아하게 디자이너의 정수리를 응시했다.
‘……이 사람 왜 이래?’
그녀는 속으로 당황했지만, 겉으로는 전혀 드러나지 않아 알아차리는 사람은 없었다.
황실 디자이너, 아니, ‘로나’는 디자이너로서 산지 20년, 대단한 영감을 받았다.
‘이건, 절대, 절대 놓칠 수 없어……!’
그는 록시디언의 디자이너로서 살아왔다.
그렇기에 황제의 명이라고는 하나 황제가 아닌 다른 이의 옷을 디자인하는 것이 내키지는 않았다.
그 사람이 악명 높은 망나니 알츠베이트 공녀라면 말이다.
소문답게 몹시도 아름다웠지만, 그것만으로 로나가 가진 인식을 바꾸진 못했다.
그러나 그녀는 황제의 가신. 맡은 바에는 최선을 다하자.
그렇게 최선을 다해 만든 드레스를 샤를리즈가 입고 나왔을 때, 이야기는 달라졌다.
로나는 디자이너로서 지각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