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가, 감히 청, 청컨대, 폐하, 고, 공녀님. 곧 서해를 건너 최고급 소재가 들어오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걸로 공녀님의 옷을 만들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머릿속에 미친 듯이 영감이 떠올랐다.
창작자로서 이건 반드시 붙잡아야 했다.
제 인생 걸작, 그것이 탄생할 것이다!
‘……무릎을 꿇을 정도로 바라는 게 저거라고?’
전생의 현대 사회에서 날아온 샤를리즈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 말은 굳이 무릎 꿇지 않고 해도 되지 않아? 샤를리즈라면 자기 아부 정도는 좋아할 것 같은데?
물론 샤를리즈는 이 방에서 있었던 지난 일로 시녀를 비롯한 디자이너, 조수들 머리에 공포가 뼛속까지 박혔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허락한다.”
잠자코 보고 있던 록시디언이 허락했다.
디자이너 로나의 얼굴로 화색이 돌았고, 샤를리즈는 고개를 갸웃하고 말았다.
로나는 자신에게 다시없을 영감을 붙잡을 기회가 생겨 감격했다.
평생 황제에게 충성할 것을 맹세했다.
록시디언은 제 턱을 잡고 고개를 느릿하게 기울였다.
‘어머니랑 똑같이 생겼네.’
죽은 록시디언과 샤를리즈의 모친, 알츠베이트 공녀였던 선황후는 살아 있을 적 지금의 샤를리즈처럼 제국 제일의 미녀로 유명했다.
“앞으로 향후 천 년간은 너희 엄마만큼 예쁜 사람 다시 안 나올 거다.”
무뚝뚝하기 그지없던 부친이 모친 앞에서는 이렇게 주접을 늘어놓을 정도였다.
다만, 그들의 모친은 좀 더 눈꼬리가 내려간 인상이었다면 샤를리즈는 부친을 닮아 눈꼬리만큼은 자신과 똑같았다.
록시디언은 저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돌아가신 어머니가 떠올랐다.
‘역시 알츠베이트 따위에서 쓰는 디자이너가 만든 옷과는 비교도 안 되지.’
록시디언은 멍청한 여동생이지만 싸구려 옷은 입게 할 수 없다는 신념이 있었다.
이런 생각을 옆의 보좌인 노아가 알았다면 그 알츠베이트에서 샤를리즈에게 싸구려를 입게 할 리가 없다며 진실을 알려 주었겠지만 거기까진 생각하지도 않았다.
록시디언이 삐딱한 미소를 지었다.
“이야, 옷이 날개네.”
“…….”
“좋겠네. 덜 못돼 보인다?”
거울을 열심히 보던 샤를리즈가 거울 너머로 제 오빠를 노려보았다.
저 인간은 초를 치는데 뭐가 있네 있어. 이렇게 생각하면서.
록시디언은 샤를리즈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훤히 읽혔다.
제 욕이나 하고 있겠지.
“황실 디자이너가 아주 훌륭하지? 알츠베이트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말이지.”
“……그런 훌륭한 디자이너를 뒀는데, 오빠 옷은 왜 그 모양이지?”
그럼 너는 왜 황실 디자이너가 만든 옷만 입는데, 그 모양이냐?
샤를리즈의 이런 한마디에 록시디언이 발끈했다. 아니, 어이가 없었다.
“허, 제국에서 나 정도 옷 태가 나는 사람이 어딨냐? 동생아 아무리 눈이 장식이라지만 똑바로 보거라, 엉?”
“있는데?”
샤를리즈가 고개를 갸웃했다.
도도하면서도 평온한 표정이었다.
“레무트 공작.”
“허?”
“그 사람은 옷태로만 보면 고급 재료 하나 쓰지 않더라도 태는 아주 최고던데? 제국 최고.”
“…….”
록시디언이 발끈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지금 감히 그 쭉정이랑 나를 비교해?”
“내가 언제 비교했어? 그냥 내 눈엔 그만큼 잘생긴 사람도 있었다는 거지.”
샤를리즈가 왜 그러냐는 듯 살짝 찡그리며 갸우뚱했다.
“오빠가 못생겼다고 한 것도 아니고. 왜 발끈해?”
“지금 내 앞에서 그놈을 감싸?”
“……아니 그러니까 내가 언제?”
샤를리즈는 매우 억울해졌다.
* * *
‘쟤 왜 저래?’
나는 황당했다.
자기 말고 옷태 나는 사람 있냐고 물어서 있다고 대답한 것뿐인데, 저쪽에서 엄청난 급발진을 하고 있다.
그럼 뭐, ‘아 뉘예뉘예 님이 최고세요, 최고 폭군, 최고의 광기! 짜릿해! 최고야!’ 뭐 이런 말이라도 해 주란 말인가?
약혼자님이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드는 건지 모르겠지만.
세상에 너 말고 미남이 또 있다는 것 정도는 인정해.
나는 한마디 하려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엄마야.’
록시디언의 눈으로 금빛이 어리는 걸 보았던 것이다.
잠깐, 잠깐만! 그 말이 그렇게 빡치다 못해 폭주를 앞둘 정도야?
‘허, 나르시시스트인가? 자기 자신을 엄청 사랑하는가 보네?’
나는 살짝 찌푸리며 목걸이에 손을 가져다 댔다.
블루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걸치긴 했지만 샤를리즈 모친이 준 목걸이는 벗지 않았다.
암, 제일 귀한 보물이자 생명줄이나 마찬가지인데 떼어 놓을 순 없지.
……잊어버렸다간 저 폭군 오빠가 나를 살해할지도 몰라.
내 뜻을 알아차린 건지, 폭군 오빠가 정신을 차린 모양이었다.
다행히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목걸이를 쓸 일도 저놈이 그렇게 쪽팔려 하는 모습을 보일 일도 없어서 다행이었다.
자기 망신을 준 거냐며 화를 내는 모습은 딱히 보고 싶지 않았으니까.
‘나도 이 능력은 딱히 알려지지 않았으면 하고.’
록시디언이 자신의 머리를 쓸어 올렸다.
여전히 못마땅한 표정이 가득했지만 더는 화를 내진 않을 모양이었다.
“됐고, 그건 연회에 올 때 잘 입고 오기나 해.”
“오, 목걸이는?”
“뭐?”
“이거.”
“…….”
폭군 오빠는 대답 없이 뭐 그런 걸 묻느냐는 듯한 얼굴을 했다.
오, 그럼 이건 내 거라는 건가?
곧 떨떠름한 목소리로 목걸이까지 가지라는 말이 떨어졌고 나는 조금 신난 기분을 느꼈다.
아무래도 샤를리즈가 가진 기억과 정보가 내게 약간이지만 영향을 미치긴 하나 보다.
샤를리즈가 갖고 싶은 걸 가지게 돼서 기분이 좋아지다니.
‘뭐, 일단 나한테 준 거면 나중에 갖다 팔아도 되지 않을까?’
샤를리즈 님, 자산을 선물받았습니다, 어디서 이런 메시지를 받은 느낌이었다.
할아버지가 준 것들은 추적이 쉽거나 감시를 받을 테니까.
이런 것이 있어서 나쁠 건 없겠지.
……나중에 연회 뒤에 이거 팔아서 약혼자님 빚에 보태 줄까?
그럼 좋아하지 않을까?
“야, 듣고 있냐?”
“어?”
“허, 이게 집중 안 하지?”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목걸이에서 손을 뗐다.
“무슨 말인데?”
“여신의 축복 연회 날 내가 직접 데리러 갈 테니까 저거 잘 입고 오라고.”
“……어?”
난 멈칫했다. 뭐라고?
‘데리러 온다는 건, 곧 연회에서 에스코트를 저 폭군 오빠가 맡겠단 소리잖아?’
에스코트란 무엇인가.
연회에서 파트너가 하는 일, 파트너는 연회가 끝날 때까지 붙어 있어야 한다.
즉, 저놈과 연회 내내 붙어 있어야 한다!
“싫어.”
생각한 순간 즉답이 흘러나왔다.
말하고서 앗차 싶었다.
“뭐?”
“아니, 싫다고. 왜 오빠가 날 에스코트해? 잊었어? 내겐 멀쩡히 약혼자가 있어.”
“아아, 네가 어떻게 되든 신경도 안 쓰는 그 쭉정이?”
“…….”
음, 그건 부정할 수 없다.
나는 오빠가 던진 팩트 폭력에 말을 잃었다.
아니, 진짜로. 약혼자님은 지금 당장 내가 마차에 치이더라도 신경도 안 쓸 것 같은데.
혹은 ‘드디어 사라졌군.’ 하고 통쾌해할 것 같은데.
“너도 할 말 없지?”
근데 그건 그거고.
저놈이 히죽 웃는 꼴은 보기 싫었다.
내가 찡그리자 더 좋아하는 꼴을 보자니 배알이 꼴렸다. 저놈이?
“생각해 보니, 그놈은 연회장에 입고 올 옷도 없을뿐더러, 그날은 내가 특별히 더 엄격하게 복장 점검을 하라고 명령해 두지. 품격 있는 연회가 되어야 할 테니 말이다. 그러니…….”
오빠가 자신만만하게 팔짱을 꼈다.
와, 꼴 보기 싫어. 잘생겼는데 꼴도 보기 싫어!
“그 쭉정이 놈이 연회장에 발을 디딜 일은 없겠어.”
마지막으로 피식 짓궂게 웃음으로 마무리한 폭군 오빠가 그대로 돌아섰다.
나는 왈칵 인상을 찌푸리면서 그쪽을 보았다가 그대로 멈칫했다.
“…….”
멍하니 서 있던 노아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줄곧 저런 표정이었던 건지, 몽롱한 낯이었다.
내 시선과 마주하고서야 일부 정신을 차린 듯한 표정이었다.
새파란 머리카락과 더불어 매번 학자풍의 시니컬하던 사람이 저런 낯을 하고 있으니, 나도 모르게 화도 접어들 만큼 놀랐다.
‘저 사람은 왜 저래?’
록시디언도 자신의 부관 상태를 확인한 모양이었다.
쯧, 낮게 혀를 차더니 노아의 뒷목을 그대로 콱 부여잡았다.
“뭐 하는 거냐. 부관아? 따라와.”
“아…… 알겠습니다. 폐하? 제, 제 발로 걷겠습니다.”
“오냐, 닥쳐.”
폭군 오빠가 노아의 뒷목을 잡고 그대로 질질 끌고 나갔다.
쟤는 무슨 자기한테 충성하는 보좌관에게도 저런 식이냐? 나는 속으로 쯧 혀를 찼다.
저런데도 폭군이 좋을까?
노아가 왜 저런 건지는 몰라도 안됐단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폭군 오빠가 자리를 비운 의상실에는 아주 잠깐 침묵이 돌았다.
나는 주변을 돌아보며 후, 한숨을 쉬었다.
‘폭군 오빠나 할아버지나 내 약혼자님을 못 잡아먹어 안달이군.’
이쯤 되면 약혼자님이 미약한 바람에도 아픈 척 자지러지는 아기 고양이처럼 구는 이유를 잘 알 것 같았다.
이때까지 여동생을 수단으로 자기를 휘두르려 들었던 사람이 얼마나 많았을까.
물론 소위 ‘내로남불’이 되어서 미안하지만 나만은 좀 다르게 받아들여 주면 좋겠는데 말이지.
“그리고 이번 황실 연회에서 너와 레무트 공작의 결혼 날짜를 공표할 예정이니 알아 두거라.”
“넌 얌전이나 떨면서 그놈의 마음이나 얻어 두거라. 그 미모로 사로잡기라도 하란 말이다. 쯧, 언제까지 모양 빠지게 쫓아다니기만 할 셈이냐?”
할아버지의 말이 스치듯 떠올랐다.
게다가 조금 전 약혼자님이 연회에 나타날까 어울리지 않게 까탈을 부리던 폭군의 모습까지.
절로 한숨이 나오는 상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