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아니, 다들 중요한 걸 잊은 거 아니야?
‘……약혼자님이 그런 장소에 퍽이나 오겠다.’
나는 왈칵 인상을 찡그렸다.
그 탓에 막 다가오려던 시녀가 멈칫했다.
“……할아버지나 저놈이나 도움이 안 돼.”
내가 중얼거리며 화를 내는 모습에 공기는 딱딱하게 얼어붙어 갔지만, 화를 삭일 수가 없었다.
일을 꼬기만 하는 원흉들 같으니!
나는 고개를 들었다.
“벗겨 줘. 돌아갈 거야.”
“……예, 공녀님.”
그렇게 옷을 갈아입고 돌아가려는데, 고개를 조아린 이들 중 유독 디자이너의 모습에 시선이 갔다.
나는 잠시 틈을 두었다가 입을 열었다.
“이름이 뭐지?”
황실의 디자이너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놀란 얼굴이었다.
“……로나입니다.”
로나. 평민인 걸까? 나는 고개를 까딱했다.
“드레스 예뻤어.”
생각해 보니 예쁜 옷을 보고 칭찬 한번 못 했네 싶었다.
나는 살짝 미소했다.
“황실 디자이너라도 별거 있겠나 싶었는데, 황실은 황실인 모양이야. 최고만 모였나 보네.”
그대로 방을 나섰다.
디자이너가 나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전혀 모르는 채로.
* * *
다음 날 오전.
오늘도 어제와 다르지 않게 느지막하게 일어났다.
한 가지 다른 게 있다면 어제보다는 약간 일찍 일어났다는 것?
“안녕히 주무셨어요, 공녀님?”
“오늘도 예쁘세요!”
“맞아요, 오늘도 공녀님이 세상에서 제일 예쁘실 거예요.”
……그리고 왜인지 날이 갈수록 하녀들의 인사가 엄청나지는 것 같다.
조금 부담스러운데, 그렇다고 싫지는 않은 기분이랄지.
‘혹시 어제 저녁에 봉급을 올려 준다고 한 것 때문인가?’
어제 저녁, 나는 수잔, 안나, 베스를 내 전담 하녀로 임명했다.
입명하는 동시에 봉급을 올렸다. 한 세 배쯤?
‘사실 나라도 사장님이 하루아침에 연봉을 세 배 올려 준다고 하면, 구두도 한 번쯤 핥을 수 있을 것 같애.’
오랜만에 전지적 회사원 시점으로 생각한 나는 홀로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우리 사이를 금전이 이어 줬지만 이런 끈끈하고도 다정한 아침은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좋은 기분도 아주 잠시 나를 찾아온 사람들 때문에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공녀님! 아름다우신 공녀님을 뵙습니다.”
“영광이어요!”
나는 응접실에 잔뜩 모인 사람들을 보며 고개를 찡그렸다.
‘하나같이 화사한 차림들…….’
게다가 응접실에 가득 쌓여 있는 옷감과 드레스, 장신구에 뭔지 모를 상자들까지.
10분 전, 할아버지의 부관이 나를 불렀다. 응접실에 가 봐야 한다면서.
할아버지의 부름이라, 지난번에 록시디언이 있어서 못했던 말을 하려는 건가?
‘혼나는 건 질색인데.’
이런 생각을 하며 이동했다. 막 응접실에 도착했을 때 나는 황당함을 느꼈다.
‘분명 할아버지가 나를 부른다고 해서 응접실로 왔는데…….’
그랬더니 있다는 할아버지는 없고 이 사람들이 있었다.
“너희 뭐야?”
내가 가만히 침묵하자, 이들은 서로 쳐다보더니 얼른 하나둘씩 제 소개를 시작했다.
“어머머, 저, 접니다. 공녀님! 에이비 의상실의 총괄 디자이너! 호호, 제가 격조하였습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비아크 의상실의 주인입니다. 저희 의상실은 현재 제국에서 가장 떠오르는 의상실로서…….”
“르파파 의상실의 베오네예요, 공녀님. 지난번에 보내 드린 한정판 가방은 잘 받으셨을까요?”
하나둘씩 지저귀는 새처럼 떠들기 시작했는데, 뒤에 가서는 목소리가 겹쳐서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앞선 이들의 말로 이들이 누구인지, 저게 무엇인지는 알아들었다.
‘할아버지가 준 선물이라고?’
기가 찼다. 뭐, 약혼자님의 앞에서 억지로 연행한 것에 대한 사과라도 되나?
나는 삐딱하게 잔뜩 쌓인 옷들과 장신구를 응시했다.
실로 양이 어마어마했다.
듣기로는 할아버지의 명령으로 모든 걸 사들인 탓에 양이 실제로도 어마어마하단다.
어느 정도냐 하면 이 응접실에 놓인 건 고작해야 10분의 1이라나?
……이 무슨 낭비인지.
“호호호, 공녀님께서는 정말 멋진 조부님을 두셨습니다. 알츠베이트 공작님께서 공녀님을 어찌나 아끼시는지……!”
“…….”
“오늘 여기 있는 옷, 가방, 모자, 신발…… 이 모든 것이 전부 제국에서는 더는 나오지 않는 공녀님만의 한정판 제품이 될 것이에요.”
머리부터 발끝까지 지금부터 휘감는 모든 것이 한정판이 될 거란다.
나는 디자이너들의 설명을 들으며 고개를 느슨하게 기울였다.
옆에서 하녀들이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는 것이 보였지만 나는 놀랍지만도 않았다.
‘여차하면 죽게 생겼는데, 게다가 내 사랑하는 코인도 날아가게 생겼는데 이런 게 다 무슨 소용이냐.’
약혼자님의 마음을 돌리지 못하면 죽음은 예정된 수순이다.
게다가 할아버지가 까딱 제멋대로 결정을 뒤집어 다른 약혼자를 잡고 파혼시켜도 사망.
이런 상황에서 언제 멋대로 결정을 바꿀지 모를 할아버지의 선물이란 전혀 반갑지도 필요하지도 않았다.
거기다 인정하기 싫지만…….
폭군 오빠가 선물한 옷이 훨씬 예뻤다.
그 드레스를 본 뒤로 더는 눈에 차는 옷이 없을 정도로 말이다.
마치 약혼자님과 록시디언을 본 뒤로 미남이 더는 미남처럼 느껴지지 않는 것과 같았다.
내가 심드렁하게 서 있자 디자이너들은 일시에 당황했다.
여기에 더해 내가 그 어떤 물건에도 흥미를 보이지 않은 채로 돌아가라 일갈하자, 하나같이 사색이 된 얼굴로 내게 매달렸다.
무엇이 부족하신가요? 말씀만 해 주세요! 공녀님, 원하시는 디자인이 있으실까요?
그러다 내가 찡그리자 모두가 약속한 듯이 입을 꾹 다물었다.
‘샤를리즈의 패악은 기억들 하고 있구만.’
그때였다.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내 허락이 떨어지자, 문 틈사이로 들어온 사람은 처음 보는 하녀였다.
그녀는 쭈뼛대며 내 앞으로 다가와 접시 위에 놓인 편지를 내밀었다.
‘서신?’
나는 속으로 고개를 갸웃하면서 봉투를 들어올렸다.
그러다 적혀 있는 이름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아스킨?”
아스킨 레무트.
눈을 깜빡인다. 다시 봐도 약혼자님의 이름이었다!
“모두 당장 돌아가.”
“고, 공녀님!”
“……제 발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기사들에게 들려서 가고 싶냐는 소리였는데, 용기 내서 말한 디자이너의 얼굴이 사색이 됐다.
곧 자신의 발목만은 보전해 달라고 하는 말을 듣고 왜곡되었음을 깨달았다.
다들 약속이라도 한 듯이 후다다닥 소리가 날 정도로 일시에 사라졌다.
남은 건 잔뜩 쌓인 옷과 물건뿐이었지만.
나는 그 사이를 걸어 아무렇지 않게 앉았다.
대충 느긋하게 앉았지만 속은 긴장이 잔뜩 어린 상태였다.
‘……설마, 이번에야말로 진짜 파혼하고 손절하잔 소리는 아니겠지?’
심장이 아프진 않은데…….
지금까지의 역사가 있다 보니 결코 좋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윽고 긴장한 채로 편지를 열고 열심히 읽었다.
“……헐 대박.”
나도 모르게 입을 가로막았다.
아주 작게 중얼거린 말은 정말이지, 참지 못해 나온 말이었다.
그도 그럴 게 이 편지에는 놀라운 내용이 적혀 있었으니까.
“……나랑 연회에 참여하겠다고?”
놀랍게도 이 남자가 나랑 여신의 축복 기념 연회에 파트너로 참석하겠단다!
왜? 대체 왜?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뜨는 건가?
나도 모르게 하늘을 바라봤다.
멀쩡하게 잘 떠 있는 태양을 한 번 보고 속으로 침을 꿀꺽 삼키고.
다시 편지를 봤다.
「……하여 레무트 공작가는 그대의 도움을 인정하며 그 은혜를 결코 모른 척 넘어갈 생각은 없습니다.」
와, 이 남자 편지로는 존대를 쓰는 건가?
꽤 로맨틱한데? 글씨마저 정갈한 남자였다.
필적에서 본인이 느껴진다니, 신기한 기분이라 살짝 웃었다.
「이번 여신의 축복 기념 연회까지는 공식적으로 그대의 약혼자로서 참석하겠습니다. 이것이 여동생을 도와준 일에 대한 은혜를 갚는 것에 일조는 물론 그대에게 손해는 아닐 것이라 생각됩니다.」
흐음, 그렇지. 나와 연회에 같이 가 주면 너무 좋지.
기왕이면 마음을 바꿔서 나랑 딱 1년만 약혼 유지해 주면 더욱 좋고 말이야.
나는 글씨를 만져 보았다.
왜일까. 그 남자의 머리카락 색을 담은 청초하고도 서늘함이 만져질 것만 같다.
「답신은 보낸 기사를 통해 주십시오.」
나는 마지막까지 이 남자다운 퉁명스러운 인사에 웃고 말았다.
‘끝까지 고맙다는 말은 없네.’
그건 좀 너무한 거 아닌가.
누구는 할아버지의 빈축을 살 각오를 하고 주치의를 부르고 사비를 써 가며 비싼 치료 마법사도 붙여 주었는데 말이지.
그렇게 책 속에서 예의 바르고 공명정대하던 사람이 나한텐 정말 너무한다 싶었지만.
……이 또한 ‘샤를리즈’의 업보이니, 자업자득이라 무어라 할 수조차 없다.
서럽게도 말이지.
“저어, 공녀님.”
내가 피식피식 웃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그러다 말고 흠칫했다.
하녀들이 하나같이 조심스러우면서 초롱초롱한 시선으로 날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어, 감히 여쭤보아도 될지 모르겠으나, 혹시 레무트 공작님의 서신일까요?”
“……그런데?”
“아!”
수잔이 박수를 쳤다.
어쩐지 발그레한 표정이었다.
“그, 실은 공녀님께서 편지를 보는 내내 발그레한 얼굴로 웃고 계셔서요.”
“마, 맞아요, 제가 다 두근거렸어요!”
“외람되지만, 정말 사랑스러우셨어요, 고, 공녀님!”
그 말에 나도 모르게 뺨을 매만졌다.
내가 웃었다고? 발그레하게?
금시초문이었다.
내가 언제?
‘혹시 이 남자와의 진전에 미리 코인을 되찾는 김칫국이라도 마셨나.’
내 코인을 향한 사랑이 드러나고야 만 것인가.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시선을 들어 올렸다.
“수잔, 나가서 디자이너들 다시 데려와! 당장.”
“네? 네! 공녀님!”
수잔이 쪼르르 문으로 달려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