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9화 (40/194)

39화

얼마 지나지 않아 디자이너들이 각기 헐떡이면서 응접실로 다시 들어왔다.

생각보다 빠르게 나타나 의아했는데, 멀리 가지 않았었다고 한다.

‘……할아버지가 부른 거라 차마 가볍게 돌아가진 못하고 그렇다고 샤를리즈의 후환이나 패악이 두려워 이 주변을 맴돌기라도 한 건가?’

합리적인 추측이었다.

디자이너들은 내가 다시 불러들였단 것에 각각이 희망을 가진 표정들이었다.

나는 다리를 꼰 채로 앉아 손으로 입술을 톡 두드렸다.

내 눈이 간드러지게 휘어졌다.

누군가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너희는 뭐든 만들 수 있다고?”

“네, 네! 그렇습니다!”

“저희 의상실, 비아크를 이용해 주세요!”

“저희는 뭐든 가능합니다, 그 어떤 파격적인 것도!”

“쉿.”

나는 다시 고요해진 방을 만족스럽게 응시했다.

그러고는 근처에 있던 기사를 까딱 손짓으로 불렀다.

오늘 제트는 어디로 간 건지 다른 기사가 주춤하며 다가왔다.

“너, 가서 레무트 공작가 소속 디자이너를 붙잡아 와.”

“……예?”

나는 말을 하다 아차 싶었다.

……과연 그 공작가에 전속 디자이너가 있을까?

그 남자가 그런 걸 둘까.

아니, 고용할 돈으로 아리아를 치료하는 데 쓰겠지.

‘하지만 공작가가 디자이너를 아예 안 쓸 리는 없어.’

나는 눈을 굴렸다.

방금 내린 명령을 얼른 철회했다.

“아, 취소. 레무트 공작이 옷을 맞추는 디자이너를 알아내서 잡아 와.”

“……고, 공녀님.”

“당장.”

기사가 무어라 하려다, 내 서슬 퍼런 시선을 보고는 얼른 고개를 꾸벅 숙였다.

저 기사에게 미안하진 않았다.

나를 번쩍 들어 연행했던 사람 중 하나니까.

아니, 제트 외에는 모두가 나를 억지로 연행하는데 함께했더라?

‘호위 기사 중에서 쓸 만한 사람은 그 남자 하나뿐이라는 거지…….’

기사가 사색이 돼서 뛰어간 덕분일까.

내 응접실로 기사처럼 사색이 된 디자이너 하나가 들이밀어지기까지는 생각보다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나는 시계를 보고 꽤 신기해했다.

‘반나절보다 더 걸릴 줄 알았는데…….’

약혼자님이 웬일인지 감사하게도 나와 함께 연회를 참석하겠다고 했지만, 문제가 있다.

그 남자는 분명 옷에는 신경 쓰지 않을 게 뻔했다.

물론 그 남자가 후줄근하게 입는단 소리는 아니다.

언제나 청초하고 단정하던 남자니, 제게 맞게 깔끔하게 입겠지.

하지만 폭군 오빠가 정한 기준이 그냥 기준일 리 없고, 분명 약혼자님의 사정을 파악해서 기준을 정했을 거라 생각한다.

그래서 약혼자님이 입던 그대로 입고, 폭군의 잔꾀에 연회에서 쫓겨나기라도 한다?

잘될 것 같던 판이 폭삭 망하는 거지.

망한다 뿐인가, 사망이지.

‘그건 안 돼.’

게다가 쫓겨나고 그 남자가 가만히 있겠나.

기회가 왔구나 하고 얼씨구나 파혼을 더 외치겠지.

아이고, 내 신세야!

나는 고개를 번적 들었다.

“당신, 고객의 사항은 모두 외우고 있겠지?”

눈이 마주치자마자 인사를 올리려던 레무트 공작 담당 디자이너가 움찔했다.

얼른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예, 예, 예!’ 덜덜 떨리는 음성은 덤이었다.

“좋아. 저들에게 레무트 공작의 치수를 알려 줘.”

“……예. 예?!”

레무트 공작 담당 디자이너라는 사람은 심약한 인상의 남성이었다.

그는 덜덜 떨면서도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러나 내가 빤히 쳐다보자, 결국은 눈을 질끈 감고 디자이너들을 향해 다가가 치수를 모두 토로했다.

“당신들이 모두 할아버지가 인정한…… 대단한 디자이너들이라지?”

“…….”

나는 생긋 예쁘게 웃었다.

“그럼 남성복 하나 만드는 건 일도 아니겠어.”

“고, 공녀님……!”

“사이즈는 너희도 들었을 테고.”

나는 손가락을 까딱였다.

“만들어.”

디자이너들은 사색이 됐다.

내 명령을 거절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이 자리에서 벗어나지도 못할 테니 진퇴양난이었을 것이다.

나는 옆에 있던 수잔에게 고갯짓했다.

“‘그거’ 가져오렴.”

“네, 공녀님!”

기사가 약혼자님의 디자이너를 데리러 간 뒤 기다리는 동안 수잔과 하녀들에게 미리 지시해 둔 것이 있었다.

곧 문이 열리며 안나와 베스가 들어오고, 이어서 시종들이 조심스럽게 무언가를 들고 들어왔다.

그것의 정리가 끝나는 동시에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이건 내가 이번 여신의 축복 기념 연회에서 입을 드레스야. 이것과 세트가 될 만한 남성복을 만들어 와.”

드레스는 샤를리즈의 기억과 정보가 있는 내가 보더라도 몹시도 아름답고 잘 만들어진 옷이었다.

그러니 전문가의 눈으로 보면 오죽할까.

디자이너들이 놀란 눈에 더불어 몇몇은 질시마저 담은 채 드레스를 정신없이 훑는 것이 느껴졌다.

‘샤를리즈는 유행을 선도한다.’

좋든 싫든 악명도 유명세라, 또래 영애들은 쉬쉬 욕을 하면서도 선망했다.

할아버지가 이토록 많은 의상실 주인과 디자이너를 불러 한아름 가져오게 한 속이야 잘 보였다.

게다가 어떻게 이용하면 좋을지도 잘 보였다.

“할아버지라면 내가 선택한 의상실에서만 주문해 주겠지. 앞으로 쭉 말이야.”

“……나, 남성복을 만들고 선택을 받으면…… 앞으로 그 의상실에서만 주문하시겠단 말씀이실까요?”

누군가 용기를 내어 물었다.

나는 대답 없이 웃었지만, 그건 이들에게 긍정으로 보였을 터였다.

“뭐, 이번 기회에 한동안 정착해도 나쁘지 않겠네?”

내 말에 디자이너들의 눈으로 별이 확 튀어나오는 줄 알았다.

헉, 깜짝이야.

나는 마치 뼈다귀를 앞둔 강아지처럼 숨을 삼키거나, 손을 어찌할 바를 모르는 이들에게서 태연한 척 시선을 돌렸다.

“내 약혼자께서 옷을 만들 때 주의사항 같은 거 있니?”

“네? 네? 아…… 그것이.”

“저들에게 알려 줘.”

약혼자님 담당 디자이너가 어색하게 끄덕였다.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디자이너들이 남자를 에워쌌다.

그는 마치 3일 굶은 아귀 떼에 잡혀 가는 먹이처럼 나를 보았지만.

미안합니다. 그래도 저들이 해치진 않을 거예요…….

파이팅…….

곧이어 약혼자님의 디자이너에게 여기까지 끌려온 값 내지는 입막음 비용 조로 금화 주머니를 슬쩍 건넸더니. 표정이 달라졌다.

부려만 주십쇼!

이어서 남자를 탈탈 털어 정보 하나까지 벗겨 먹으려 드는 디자이너들에게 일정을 고지했다.

“네? 고, 공녀님 하지만 그 일정은…….”

“흐응?”

다들 촉박하다고 생각하는 눈치였지만 내가 팔짱을 끼며 바라보자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아무래도 촉박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아예 불가능한 날짜는 아닌 듯했다.

사실 나도 이렇게 촉박하게 맡기고 싶지는 않았지만…….

이게 다 폭군 오빠, 그놈이 되도 않는 이상한 심술을 부렸기 때문이다.

나는 더는 많은 사람을 마주하고 싶지 않아 물러나라 명했고, 이는 디자이너들도 원했던 일이었는지 기다렸다는 듯이 짐을 싸고 나갔다.

모두가 물러간 자리.

나는 호화로운 물건 사이에서 그 어떤 것에도 눈을 주지 않은 채 가만히 테이블을 응시했다.

곧 테이블에 놓인 편지를 잡았다. 나는 이 서신을 만지작거렸다.

보고 있어도 안 믿기네.

그 남자가 먼저 이렇게 연락이 와서 함께한다고 할 줄이야.

‘뭔가 틈이 보이는 건가?’

속으로 기쁨과 뿌듯함이 차올랐다.

눈앞으로 내가 끝끝내 단 한 번도 쓰지 못하고 죽음으로서 놓쳐 버린 사랑스러운 코인이 왔다 갔다 하는 기분이랄까.

지금 이 방을 채운 수없이 화려하고 호화로운 물건들이 내가 돌아간 세계에서도 펼쳐질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래, 드디어 순풍이 도는 거라고.

‘폭군 오빠 그놈이 부릴 심술과 할아버지의 망언만 막으면 된다…….’

한참 편지를 보며 희희낙락 하고 있는데, 문득 고개를 들었다.

방 안을 채운 물건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모든 것이 다 하나같이 내가 있던 세계에서 ‘명품’으로 불릴 법한 급의 물건들이었다.

그런데 왜일까 이것들이 조금 다르게 보였다.

수없이 많은, 아니, 너무 많은 명품이 눈앞에 놓여 있으니 더욱 행복하기는커녕 신기하게도 흥미가 떨어지는 신기한 경험이랄까.

‘……샤를리즈의 것이 내 것처럼 느껴지지 않아서인가?’

* * *

다음 날.

나는 앞선 이틀 동안 늦게 일어난 것과는 다르게 오늘은 일찌감치 일어났다.

“공녀님?”

“이거 입을 거야.”

하녀들은 일찍 일어난 나를 신기하게 여기는 것으로 모자라, 의상실로 간 나를 당연하게 총총 쫓아와 내가 가리킨 의상을 보면서 끄덕끄덕하기 바빴다.

어째 세 사람이 똑같이 끄덕이는 모습 흡사 아기 새 3마리를 보는 것 같아 속으로 웃음을 꾹 참았다.

“갈 곳이 있는데, 반드시 따라나설 필요는 없어.”

“아! 그럼…… 동행해도 괜찮다는 말씀이시지요?”

그렇게 말하진 않았는데?

기억 때문인가.

어느새 샤를리즈의 말투가 내 말투처럼 착 달라붙었다.

나는 슬쩍 찡그리면서도 ‘마음대로 해.’ 하고 말았다.

그렇게 옷을 걸쳐 입고, 나는 마차에 올라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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