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맞은편에는 가위바위보에서 이긴 안나와 수잔이 앉았다.
셋 다 따라올 것 같았는데, 전담 하녀 중 하나는 반드시 저택을 지킬 의무가 있다나?
“저택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려 드리는 것도 저희 임무니까요!”
내가 물었더니 이런 대답이 돌아오더라.
어쩐지 아까 새를 떠올린 탓인지, 근엄한 표정을 짓는 아기 새처럼 보이기도 해서 슬쩍 웃음을 참았다.
맞은편에 앉은 수잔의 품에는 커다란 바구니가 안겨 있었다.
나는 그 바구니를 흘끗 보면서 물었다.
“내가 말한 건 모두 챙겼니?”
“아, 네. 공녀님!”
수잔이 얼른 끄덕였다.
“말씀하신 것 단 하나도 잊지 않고 넣었어요.”
“그래.”
나는 분홍빛 도는 바구니를 뿌듯하게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마차가 익숙한 길을 달렸다.
내가 도착한 곳은 이제는 알츠베이트 저택보다도 더 고향같이 느껴지는 레무트 영지였다.
어째 이상한 건 내가 영지 안에 들어서기 무섭게 마차 근처로 사람이 몰리는 것 같았는데, 마차가 움직이고 있다 보니 확신할 수는 없었다.
“으음…… 오늘은 사람이 더 많은 것 같아요.”
“수잔, 너도 그래? 나도 그렇게 느꼈어. 오늘 무슨 행사라도 있는 걸까요?”
나야 모르지.
나만 느낀 건 아니었는지, 수잔과 안나도 고개를 갸웃하는 것이 보였다.
그렇게 마차는 내가 인부를 통해 고쳐 주었던 마을과 길을 좀 더 달려 성 앞에 도착했다.
워낙에 많이 찾아 왔다 보니, 이제 성문을 지키는 기사도 익숙하게 느껴졌다.
내가 마차에서 내리자, 언제나처럼 어색하고도 딱딱하게 굳는 모습이 잘 보였다.
“방문할 건데. 내 약혼자님은?”
“아……. 공녀님을 뵙습니다! 고, 공작님께서는…….”
“됐어.”
오늘도 거절이겠지.
아니나 다를까, 내가 더 묻지 않았음에도 입장이 불가하다는 답이 돌아왔다.
뭐, 거기까진 충분히 예상했지만 살짝 실망하긴 했다.
아니, 마음이 좀 풀린 줄 알았더니.
나 아직 입장 금지야? 이놈의 ‘입뺀’은 언제까지 당해야 돼?
속으로 괜히 투덜거리며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성문을 지키는 기사가 나를 보면서 할 말이 있는 듯 안절부절못했단 점이었다.
이곳 기사들이 나를 두려워하거나 어려워하는 건 알고 있었다.
그건 어디까지나 미움, 혐오, 분노에서 기반한 부정적인 감정이었다.
하지만 지금 저 반응은 거기서 기인했다기엔 조금 애매하게 보였달지.
“공작님께 소식을 전하겠습니다.”
“음?”
나는 눈을 살짝 크게 떴다.
“……공작님께서 성내 입장은 금지하셨으나, 공녀님께서 오실 시에 알리시라 말씀하셨습니다.”
기사는 고개를 꾸벅 숙인 뒤에 잠시 멈칫했다.
그러더니 내 앞으로 다가와 고개를 깊이 숙였다.
“감사합니다.”
뭐가? 나는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공녀님께서 인부를 불러 도움을 받은 영지민 중에 제 남동생이 있습니다. 더, 덕분에 집이 빠르게 수복되어 몸이 약한 아이가 감기에 걸리지 않고 지나갈 수 있었습니다.”
기사는 무슨 랩을 하듯이 빠르게 말을 이어 가고는 고개를 들고 다시 한번 까딱인 뒤 돌아섰다.
덕분에 표정은 보지 못했지만.
“우와, 저 사람은 은혜를 아는 사람인가 봐요, 공녀님.”
내가 멈칫한 사이에 반응은 수잔이 대신 해 줬다.
“하긴 당연히 인사가 필요한 일이죠. 공녀님께서 도와주셨는데!”
“맞아요, 저는 수잔에게 듣기만 했지만 정말 좋은 일 하신 거잖아요.”
더는 샤를리즈에게 편견을 갖지 않게 된 두 하녀의 대화를 듣고 있으려니 기분이 묘했다.
흐음, 평판을 바꾸는 건 아주 어렵다고 생각했는데…….
‘이거, 가능성 있다고 봐도 돼?’
괜히 기분이 좋아져,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을 만끽하고 있는데, 저 멀리서 다가오는 남자가 보였다.
워낙에 훤칠하고 덩치가 크니 못 알아볼 수가 없었다.
약혼자님이었다.
그가 내 앞에 도착했다.
살짝 기대했건만, 애석하게도 표정은 이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무슨 꿍꿍이냐는 표정이 반, 성가시다는 표정 반.
경계가 잔뜩 얼룩진 표정을 보고 있으려니 헛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오늘도 찾아왔군.”
“응, 오늘도 찾아왔지.”
하지만 기사의 인사라거나 약간의 변화가 있기 때문인가.
그리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당신, 편지에서는 그렇게 정중하더니. 그거 반만 지금 모습에서도 보여 주면 안 되나?”
나는 손에 쥐고 있던 편지를 슬쩍 입술에 가져다댔다.
아스킨은 내 손에 들린 편지를 보고 놀라는가 싶더니 찡그렸다.
당황한 표정이었다.
“그걸 왜…… 가져온 거지?”
“님이 주신 연애편지인데 손에 쥐고 다녀야지.”
“연애편지? 그, 무슨……! 버려라. 당장.”
“싫은데?”
아스킨이 본능적으로 손을 뻗었고 나는 뒤로 손을 물렸다.
그는 나를 노려보는가 싶더니 그대로 다시 물러났다.
시원한 향기가 성큼 다가왔다가 멀어졌다.
조금 아쉬움을 느꼈다. 좀 더 발끈해 주면 좋을 텐데 말이지.
“약혼 관계에서 주고받은 편지가 어째서 러브레터가 아니야? 난 이렇게 생각할래.”
“……멋대로 생각하든 그대 마음이겠지. 망상에 날 끌어들이지 마라.”
음? 나도 모르게 멈칫했다.
지금 나를…… 뭐라고?
‘와아, 호칭 하나 바뀌었을 뿐인데 느낌이 색다르네.’
그저 너, 당신에서 그대라는 호칭으로 변했다는 것이 조금 묘하게 느껴졌다.
정작 저 남자는 자각이 없는 건지 신경 쓰지 않는 건지 모르겠지만.
……이대로 좀 더 꼬셔 보면 더 좋은 결과가 나올까?
나는 슬쩍 성 쪽을 가리켰다.
“나 들어가도 돼?”
“안 된다.”
에이, 좋다 말았네.
나는 텄다 싶은 눈으로 약혼자님을 훑었다.
‘나 참, 오늘도 미모만은 반짝반짝하네.’
이런 사람이 나랑 커플룩을 걸치고 연회에 참석한단 말이지?
흐음, 폭군 오빠의 심술을 반드시 타파해야겠다는 의무감 같은 것이 생겼다. 아니, 더 강해졌다.
“아리아의 건강이 좋지 않다. 모든 외부인의 방문을 받지 않는다.”
웬일인지 약혼자님은 평소와 다르게 사족을 붙였다.
그 이유는 납득하기에 충분했다.
‘아리아가 계속 건강이 좋지 않구나…….’
“많이 아파?”
“……위독한 정도는 아니다.”
아스킨이 나를 빤히 보더니, 눈썹을 찡그렸다.
“대체 내 여동생에게 뭐라고 지껄인 거지?”
“응?”
영문을 몰라 되물었지만 아스킨에게 더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단호하기 짝이 없는 표정을 보다가 내 쪽에서 말끔하게 물러나기로 했다.
“뭐, 이 편지는 대필 같은 게 아니라 당신이 보낸 게 맞는 것 같으니까. 이대로 물러나 줄게.”
“……드물게도 도움이 되는 말이군. 그런데 대필? 그건 무슨 소리지?”
“아, 난 또 갑자기 이런 편지가 왔길래. 당신이 어디 납치라도 당해서 억지로 썼나 싶었지.”
나는 편지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그리고 눈을 간드러지게 휘었다.
“다음에 혹시나 납치당하면 당근을 흔들라고.”
편지에 당근 그려 주면 누나가 달려갈게, 응? 살살 장난치듯 말했더니, 이 남자가 상대도 안 해 주더라.
나 참.
편지로 나도 모르게 쌓였던 내적 친밀감 0.1퍼센트가 그대로 증발하는 기분이었다.
나는 입술을 삐죽이다 곧 바로 하고는 고개를 돌렸다.
수잔을 쳐다보며 고갯짓했다.
“됐고. 이만 물러갈 테니까. 이거나 받아.”
“필요 없다.”
“그 필요는 당신이 아니라 아리아한테 물어보고.”
내 손짓에 수잔이 낑낑대며 바구니를 내밀었다.
아스킨은 받지 않았고, 나는 그것을 바닥에 내려놓도록 했다.
“아리아가 단 거 좋아하는 것 같던데, 내가 좋아하는 것만 아주 최고급으로 넣었어. 버리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해.”
그러고는 내 할 말은 끝났다는 듯 미련 없이 돌아섰다.
좋아. 혹시나 이 편지가 가짜는 아닌가 싶었는데. 그건 아니란 말이지.
목적은 달성했다.
‘아리아를 못 본 건 아쉽지만.’
나는 막 생각났다는 듯 슬쩍 돌아섰다.
“아, 버리든 말든 상관없는데, 나중에 아리아한테 잘 먹었냐고 물어볼게?”
묘한 표정으로 나를 보던 잘생긴 얼굴과 눈을 마주하고는 휙 돌아섰다.
‘후후, 이럴 땐 또 미련 없이 돌아가 줘야지.’
이래야 날 조금이라도 궁금해하겠지.
* * *
레무트 저택에서 알츠베이트 저택으로 막 돌아왔을 때, 내가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저택이 어수선해졌다.
정확히는 날 찾은 손님 무리가 있었다.
“누가 와?”
“그…… 클레리아 남작 영애를 비롯한…….”
방문객들의 이름을 듣자마자 기분이 확 나빠졌다.
‘망나니 클럽이잖아? 수도의 개망나니들.’
줄여서 ‘개망’이라 불리던 이들이 다시 한번 나를 찾아왔다는 소리였다.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 내가 분명 술까지 부어 가면서 쫓아내지 않았나?
다시 안 찾아올 거라는 순진한 생각을 한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시간을 오래 두고 찾아올 거라 생각했는데?’
어쨌거나 내 쪽에서 그 망나니 클럽을 만날 생각이 없었다.
당연하지. 지난 모임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못박아 뒀다고.
만나 봐야 도움도 되지 않을 사람들이었다.
“바쁘다고 해. 아주 많이.”
“네, 공녀님.”
수잔이 정중하게 고개를 조아리고 나갔지만.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사색이 되어 다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