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몰골이 왜 이래?’
아무래도 제대로 시달린 듯한 몰골이었지만, 수잔은 내게 꿋꿋이 보고했다.
“저어, 공녀님, 영애님들께서. ……특히나 클레리아 남작 영애께서 연회 관련하여 꼭 의논드릴 일이 있다고 부디 한 번만 더 여쭤봐 달라고 하셨습니다…….”
한 번이고 두 번이고. 만날 생각이 없다니까.
그러나 보고만으로 전해지는 고집에 나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게다가 수잔의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생각이 좀 달라졌다.
“응접실로 안내해.”
“네? 네……. 알겠습니다.”
수잔은 고개를 숙이다 말고 머뭇거리며 나를 향했다.
그녀의 얼굴로 짧은 순간 많은 고민이 스친 것 같았지만 이내 용기를 낸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저어, 공녀님 괜찮으신가요?”
“뭐가?”
“……만나고 싶지 않으신 것 같아서요. 제가 감히 공녀님의 뜻을 곡해했다면 죄송합니다.”
곡해한 것 아닌데.
‘완전 정답이지.’
보고 싶지 않아. 않다고.
그 인간들, 만나면 또 술부터 까려 들 텐데.
샤를리즈의 지위가 지위다 보니 강요할 일은 전혀 없겠지만 염려가 안 되는 건 아니었다.
“내가 거절하면 네가 고생 아니니? 그냥 내버려 둬.”
나는 그 말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머릿속은 어떻게 술을 피할까 궁리 중이었다.
하는 김에 어떡하면 빠르게 쫓아낼 수 있을지도 말이다.
‘분명 연회 관련 할 말이 있다는 것도 별 시답지 않은 거겠지.’
기억 속 ‘개망’ 멤버들은 하나같이 실속이 없었다.
대개가 집안에 돈만 많거나, 집안은 대단하지만 내놓은 자식이거나. 망나니짓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는 인물들이었다.
‘왜, 한국에서 티브이 속 국회의원 모 아들, 딸이 망나니짓을 했다, 하는 뉴스의 주인공 같은 인물들이랄까.’
대충 가운을 걸쳐 입는데, 옆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수잔이 눈이 마주치기 무섭게 고개를 조아리고는 얼른 방을 나섰다.
‘왜 저러지?’
아무래도 그 영애들 등쌀에 고생 좀 한 모양이네.
하기야, 그들은 샤를리즈가 고작 하녀의 고생에 신경을 쓸 사람이 아니란 걸 잘 알 테니까.
샤를리즈 기억에는 거의 없지만, 아마 모르긴 몰라도 샤를리즈를 모시던 하녀나 시종들은 고생 깨나 했지 싶었다.
“공녀님!”
내가 대충 채비를 하고 응접실에 도착했을 때, 아니나 다를까.
지난번에 봤던 멤버들을 포함한 여러 영애들이 각자 가져온 술을 세팅해 놓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인간들…… 너무 예상 그대로 아니야?’
나는 속으로 황당한 한편 쯧, 혀를 찼다.
“공녀님을 뵙습니다!”
“세상에, 공녀님 너무 오랜만이에요.”
“그간 왜 불러 주지 않으셨어요, 너무너무 뵙고 싶었는데……!”
화려하게 걸친 영애들이 하나씩 돌아가며 인사를 해 왔다.
대부분이 지난번 모임에 왔던 인물이었지만, 간간이 새로운 인물이 보이기도 했다.
나는 고개만 까딱하고 커튼 쪽으로 다가섰다.
이들은 내가 장식장에서 술이라도 꺼내 오는 줄 알고 얼른 자기들끼리 쑥덕거리기 바빴다.
‘여기, 그냥 음료도 있다고 들었는데…….’
목소리를 낮추지도 않아 음성이 그대로 들렸다.
“아우, 그러니까 내 손톱이 날아갈 뻔했다니까요? 일을 어찌나 더럽게 못하는지.”
“세상에, 손톱 관리가 얼마나 중요한데……. 아, 내 하녀는 술 엎은 것 하나 제대로 치우지 못한다니까요?”
“요즘 것들 정말 빠졌다니까?”
꺄르르, 웃음기 섞인 목소리들이 집요하게 귀를 쿡쿡 찔렀다.
대개가 자신의 시녀, 혹은 하녀가 일을 너무 못한다며 험담하는 중이었다.
“아, 그런 거 있잖아요. 병을 깨 버려요. 그리고 그 위에 올라서서 치우라고 해 봐요.”
“어머나?”
“그럼 다음엔 단 한 방울의 흔적도 남기지 않고 잘 치울걸요? 미천한 것들은…… 고통을 줘야 한다니까요.”
“깔깔, 멍청하면 몸으로라도 익혀야지. 좋네요. 고마워요!”
욱씬. 나는 느껴지는 고통에 손을 폈다.
아, 장식장 손잡이를 너무 움켜잡은 모양이었다.
“하, 윤지후 씨. 지방대 나왔으면 일이라도 잘해야 하는 거 아니야?”
“쯧, 멍청하니 몸이 고생이지.”
나는 욱신거리는 손을 쥐었다가 폈다.
저쪽에서 나쁜 짓거리를 좋은 팁이랍시고 공유하는 이들 사이에 거대한 벽이 세워진 것 같았다.
나는 곧 병을 하나 골라 돌아왔다.
내가 테이블로 돌아왔을 때, 테이블 위엔 이들이 차려놓았던 술병들뿐만 아니라 웬 조그만 가방 하나도 올려져 있었다.
‘가방?’
처음 보는 가방이라 속으로 고개를 갸웃하는데, 은근한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니 지난 모임에서도 한번 봤던 영애가 나를 은근한 눈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어딘가 모를 기대가 어린 시선이었다.
‘아, 저 영애…… 이름이 뭐지?’
아니, 샤를리즈는 자기랑 나쁜 짓하는 무리의 이름도 외우지 않았단 말이야?
나는 곧 옆에서 그녀를 부르는 호칭을 듣고서야 그녀가 ‘로타리아’ 백작가 영애라는 걸 알았다.
“앗, 공녀님께서도 보셨나요?”
그녀는 슬쩍슬쩍 내 눈치를 보면서도 은근하게 뽐내는 듯한 눈빛으로다가 입을 열었다.
슬쩍 손으로 입을 가리면서.
“이번에 약혼하는 제 약혼자께서 선물해 주셨지 뭐예요?”
“어머, 로타리아 백작 영애의 약혼자시라면…… 아루스 자작가의 영식이시겠군요.”
“이건 수도에도 딱 세 개만 풀린 색상 아닌가요? 어쩜……!”
“아루스 자작가면 철광석으로 유명한 영지를 가진 곳이니까요. 대단하네요.”
이건 또 뭐야.
나는 가방과 부끄러워하는 듯하면서도 묘한 표정의 로타리아 영애를 번갈아 보았다.
‘……느그 약혼자는 이런 거 안 사 주지? 이건가?’
내가 자리에 앉아 느긋하게 바라보자, 백작 영애는 수줍다는 듯 술잔을 홀짝이며 말했다.
“어휴, 저도 한정판이라 받지 않으려 했는데, 약혼자께서 그분의 사랑을 증명하는데 이 정도는 별거 아니라고 사 주셨지 뭐예요?”
딱히 화가 나진 않았다.
이 사람들이 샤를리즈에게 시기와 고까운 감정, 그리고 동경을 한 번에 복합적으로 품고 있단 사실은 이미 지난 모임에서 파악했으니까.
‘사랑하면 한정판’ 하는 이야기를 반쯤 흘려 듣다 문득 생각나는 일이 있었다.
전생의 일. 내가 죽기 전 그러니까 ‘윤지후’일 때 일이었다.
“요즘 다들 줄 서서 산다잖아.”
“그러게…… 나만 관심 없는 건가? 아니, 사실 하나쯤 갖고 싶기도 하고…….”
내가 죽기 전, 한국은 유례없이 명품에 대한 수요가 대폭 증가했다.
덕분에 관심 없던 사람마저도 흐음 여행 한번 가는 대신 이거 한번 사 봐? 하고 관심을 기울일 정도였다.
그런 상황에서 참석한 동창회에서는 여러 이야기가 오가는 중에 누군가의 소지품에 관심이 쏠렸다.
최근에 승진했다던 친구의 가방이었다.
“와, 이거 천만 원도 넘는 거 아니야?”
나야 무슨 가방인지 몰라 그런가 보다 했지만.
친구 중에 유독 관심이 많던 하나가 알아보고 이야기를 꺼냈다.
“부모님이 사 주셨어.”
“호오, 쟤가 몸값 수백만원짜리구나.”
“글쎄, 승진하면 그에 맞게 옷차림도 바꿔야 한다며 역정을 내시길래, 받았지 뭐?”
그날 나는 나도 모르게 얼마 전 돌아가신 부모님을 떠올리면서, 동시에 몇 년째 나와 함께 하던 바닥이 닳아 버린 가방을 은근히 숨겼다.
사실 부모님이 살아 계셨다고 해도 저런 걸 사 주실 만한 집안도 그런 성정도 아닌 분들이었지만.
어쩐지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를 나누는 친구들 사이에 끼어들 수가 없었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망나니 무리들은 여전히 백작 영애의 가방을 보며 감탄 중이었다.
“정말, 사랑받으시나 봐요.”
“부러워요.”
저들이 나를 흘끗흘끗 보는 눈치가, 내 약혼자 이야기를 꺼내고 싶어 안달이 난 모양인데.
그래도 지난번 일에서 배우긴 했단 건지.
섣불리 꺼내진 않는 듯했다.
‘학습 능력은 있는 망나니들이네.’
나는 그녀들을 바라보다 나도 모르게 술병에 손이 갔다.
초롱초롱한 시선들이 따라붙었다.
“어머, 공녀님 한잔하시나요?”
“짠해요. 짠!”
그녀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잔을 들었다.
나는 싱긋 웃으며 병을 그대로 내려놓고, 내가 가져온 병을 들어올렸다.
“난 오늘 술 안 마실 건데.”
“아…… 네?”
나는 병을 열어 음료를 따랐다.
포도주와 색이 비슷했지만, 더욱 옅은 장미색에 가까운 색이었다.
오, 예쁘네.
“조금 있으면 시작될 여신의 축복을 기념하는 연회를 위해 드레스를 제작했거든. 관리를 위해서 안 먹어.”
의외로 샤를리즈는 자기 관리에 철저했다.
술을 병째로 마시면서 무슨 관리인가 싶은데, 기억을 들춰 보니 나름의 식단 관리 같은 건 한 것 같다.
매우 의외였다.
난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런 중요한 자리를 앞두고 술 마실 생각을 하는 멍청이가 어디 있겠어?”
내 핀잔에 영애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재빨리 다른 이야깃거리를 찾는 눈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