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 * *
“세상에, 이미 드레스를 제작하신 건가요?”
오늘도 은근히 레무트 공작의 이야기를 꺼내 샤를리즈의 속을 긁어 보고 싶었던 영애 하나가 기다렸다는 듯 말을 꺼냈다.
사실 속으로는 욕을 하는 중이었다.
조금 전 샤를리즈의 한마디.
중요한 자리를 앞두고 술을 마실 생각하는 멍청이가 어딨냐는 말이 꼭 자신들을 조롱한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샤를리즈의 심기를 거스를까 무서워 얼른 화제를 돌렸다.
“오늘 할아버지의 명으로 디자이너들이 음, 열쯤 다녀갔나?”
그녀의 말에 영애들이 눈을 빛냈다.
이번엔 또 어떤 특이한 물건을 선보일 생각인 걸까.
영애는 샤를리즈가 싫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녀가 가진 권력이, 재산이, 미모가 부러웠다.
“……혹시, 외람되지만 이번 연회에서는 어떤 색의 드레스를 걸치시나요?”
영애들 중 비교적 그나마 소심한 편인 영애 하나가 물었다.
샤를리즈는 그 말을 듣고서 속으로 의문을 느꼈다.
내 드레스 색은 왜 묻지? 디자인을 묻는 것도 아니고?
그 순간 샤를리즈의 머릿속으로 진짜 샤를리즈의 기억이 하나 떠올랐다.
“이런, 그러게 나랑 같은 색을 입고 오면 어떡해요.”
샤를리즈가 지난 연회에서 자신의 드레스와 같은 색의 드레스를 입었다며 한 사람의 드레스에 와인을 잔뜩 부어 버린 일이었다.
좀 더 자세히 떠올려 보자면, 그날 샤를리즈는 아스킨을 파트너로 불렀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처럼 차갑게 거절했고, 샤를리즈에게는 그날의 분풀이였을 뿐이었다.
‘……아이고야, 업보도 다양하게 쌓았네. 쌓았어.’
샤를리즈는 진짜 샤를리즈의 기억에 혀를 찼다.
동시에 영애들이 어째 망나니들답지 않게 간절한 시선을 하는 이유도 깨달았다.
그 연회 이후로 영애들에게 샤를리즈 알츠베이트의 드레스 색을 미리 아는 게 매우 중요한 일이 되었다.
커다란 연회에서, 그것도 수많은 이들이 있는 자리에서 웃음거리가 되는 것이야말로 최악의 일이다.
게다가 항의할 수도 없는 권력자를 상대로는 말이다.
“글쎄, 이번에는 뭘 입더라…….”
샤를리즈의 시선이 느긋하게 한쪽으로 향했다.
홀짝 나른하게 음료를 마시고는 입술을 훔치는 모습은 같은 여성이 보더라도 홀릴 만큼 아름다웠다.
샤를리즈가 그 악행으로 어마어마한 원한을 사는 동시에 음지에서 그녀를 동경하는 무리가 자꾸만 생기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아, 직접 볼래?”
샤를리즈의 시선이 한곳을 향했다.
이 방 바로 옆방에 무엇이 있는지를 잘 알고 있었으니까.
샤를리즈는 시종을 불러 방과 방을 이어 둔 중문을 활짝 열게 했다.
그리고 문이 열리고 맞은편 드레스 룸이 그대로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그곳에는 오늘 하루 짧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저택의 하녀들이 오늘 디자이너들이 들고 온 모든 상품의 정리를 완벽하게 끝내 놓은 모습이 보였다.
완벽하고도 깔끔한 정리였다.
문이 열리는 동시에 이곳에 모여 있던 제국 망나니 아가씨들의 동공이 톡 튀어나올 만큼 커졌다.
“……에이비 의상실? 아니, 비아크?”
“고, 공녀님 혹시 좀 더 가까이서 봐도 될까요?”
누군가의 중얼거림을 시작으로 한 영애가 눈을 빛내며 침까지 튀겨가면서 다급하게 말했다.
샤를리즈의 허락이 떨어지자 그녀들은 좀 더 가까이서 볼 수 있었다.
‘세상에 이건…….’
그리고 보고야 말았다.
이것들은 전부 그녀들이 처음 보는 물건이었지만, 몹시도 호화롭고 아름답게 보였다.
알츠베이트 공작이 돈을 아낌없이 쓴 탓이었다.
“……르파파에서 이런 제품도 있었나요?”
“분명 에이비 의상실 것 같은데, 처음 보는 디자인이에요! 너무 예쁜 걸요?”
“세상에, 이런 색이 있다니…….”
그녀들은 샤를리즈와 몰려다니던 무리답게 유행에는 자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렇기에 이곳의 디자이너 의상 혹은 소품에 이런 제품도 있었느냐며 감탄하기 바빴다.
그녀들 사이에서 소요 겸 난리가 난 중간에, 그녀들은 또 하나의 사실을 발견했다.
「one of one」
제국 내 장인의 상품에는 모두 그들만의 각인이 새겨진다.
디자이너들도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그중에서 이 제국에, 그리고 장인 혹은 디자이너의 손에 단 하나만 만들어진 제품에는 이와 같은 각인이 새겨졌다.
‘세상에 하나뿐인’이라는 뜻의 각인이었다.
영애들은 눈에 보이는 모든 제품에 이 각인이 새겨진 것을 보고 소름과 전율이 일었다.
대체 돈을 얼마나 쓴 거야? 경악하는 이도 있었다.
당연히 더욱 난리가 났다.
돌아온 영애들은 자리에 앉아서도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샤를리즈가 아무런 말이 없는 사이 자신들끼리 감상을 주고받기 바빴다.
“세상에 맙소사, 저건 판매하는 제품이 아니라고 했는데…….”
“저런 디자인은 처음 봐. 맞춤인가 봐!”
샤를리즈는 감흥 없이 음료를 홀짝 들이키다가, 떨떠름한 표정을 한 로타리아 백작 영애를 발견했다.
그녀는 슬며시 테이블에 올려뒀던 제 가방을 뒤로 감추고 있었다.
샤를리즈는 백작 영애가 가방을 내세우며 대화를 은근히, 그리고 노골적으로 화제를 약혼자로 만들려던 시도를 기억했다.
“보다시피 너무 많아서…….”
샤를리즈가 입가에 살짝 맺힌 음료를 손으로 우아하게 닦아 내며, 피식 웃었다.
“한정판이라는 것도 별거 없는 것 같네.”
샤를리즈의 심드렁한 표현에 로타리아 영애의 뺨이 발끈 달아올랐다.
그러나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사이 샤를리즈의 말을 듣고 정신을 차린 망나니 영애들은 샤를리즈에게 어떤 색의 드레스를 입을 거냐며 조심스럽게 묻기 바빴다.
‘모쪼록 이번 연회에서의 대상이 내가 될 순 없다!’
한마음 한뜻으로 물어보았지만, 샤를리즈는 의뭉스런 미소만 지었다.
“황실에서 여러 벌을 제작 중이라…… 어떤 색을 당일 날 입을지 모르겠네.”
샤를리즈가 턱을 괴며 대답했다.
조금 전 백작 영애가 약혼자의 이야기를 꺼낼 때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영애들은 한 방 먹은 기분으로 눈치를 보기 바빴다.
샤를리즈는 이번엔 같은 색의 옷을 입는다고 해서 괴롭힐 생각은 없지만.
‘그렇다고 딱히 내 드레스 색을 가르쳐 주고 싶지도 않은데.’
샤를리즈의 눈이 살짝 차가워지는 순간, 누군가 조심스럽게 그녀를 부르며 손을 들어 올렸다.
* * *
“저, 혹시…… 이번 여신의 축복 기념 연회에는 공녀님의 약혼자이신… 레무트 공작님께서도 참석하실까요?”
쩌억-. 아마 이곳이 호수였다면 그대로 얼어붙었을 것 같은 한기가 내려앉았다.
내가 보여 준 명품들로 나름 화기애애했던 분위기는 바로 한겨울 서리 같은 냉기가 대신했다.
“…….”
거, 이 언니는 끝까지 시비네?
나는 일부러 대답하지 않고 침묵했다.
그러자 아주 잠시지만 눈앞의 백작 영애의 눈으로 고소가 스쳐 지나갔다.
알아보지 못할 만큼 미세했지만 내겐 선명하게 보였다.
‘샤를리즈는 악의를 몰랐던 게 아니고 아는데 신경 쓰지 않았던 게 분명해졌네.’
샤를리즈의 몸과 기억은 악의에 민감하다.
내가 저 미세하게 스쳐 지나간 고소와 조소를 알아차릴 만큼.
“올 건데?”
나는 산뜻하게 대답했다.
그런데…… 나를 바라보던 망나니 영애들의 표정이 오묘했다.
동시에 샤를리즈의 기억이 하나 떠올랐다.
작년, 샤를리즈가 추방을 가장한 여행을 떠나기 전 마지막 황실 연회에서 있었던 일이었다.
“온다고, 온다고 했다고!”
샤를리즈는 아스킨의 거절을 한 차례 받았음에도 연회에 오기를 강요했고, 아스킨은 끝끝내 연회에 참석하지 않았다.
샤를리즈는 제 약혼자가 온다며 이곳저곳에 다 떠들었으나, 아스킨은 오지 않았고.
결국 그날 언제나처럼 술을 잔뜩 먹고 깽판을 쳤다.
그로 인해 황실의 수습으로도 어려운 사고를 치고 말았고.
그렇게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아하…… 오시는… 군요?”
백작 영애가 살살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떼었다.
“그럼 그날 여신의 축복 기념 연회가 끝나고…… 늦은 밤 제 약혼자가 청혼 기념 파티를 열기로 했답니다.”
간드러지는 목소리였다.
“그날 이 제국에는 단 스무 병밖에 없다던 ‘트루제 120년 산’ 와인이 나올 예정이라, 기회가 된다면 공녀님을 꼭 한번 초대 드리고 싶은데……. 공녀님께서는 레무트 공작님과 시간을 보내야 하시니 참석이 어려우시겠지요?”
백작 영애의 말에 주변 영애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호들갑을 떨었다.
“어머나, 세상에 로타리아 백작 영애, 약혼을 하는 게 아니라 청혼받으신 거였나요?”
“몰랐어요, 벌써 받으셨던 건가요? 이런 기쁜 일이 있나요. 축하드려요!”
그녀들은 난리법석을 떨면서도 내 눈치를 봤다.
백작 영애는 축복 사이에서 무슨 생각을 한 건지, 아무튼 그리 느낌이 좋지 않은 시선을 유지한 채로 내게 빙긋 미소했다.
공손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공녀님께서도 이제 레무트 공작님과 사이를 회복하신 것이지요? 얼른 혼인해 버리세요!”
……이거 참. 샤를리즈야, 네게 그나마 친구라고 할 만한 사람들은 이 ‘개망’ 멤버들인데.
‘너는 친구도 뭐 이렇게만 사귀었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