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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화 (46/194)

45화

따로 허락이 없음에도 문이 살짝 열렸다.

어째 누군가 낑낑대면서 여는 듯 열리는 속도가 매우 느렸다.

“무, 무거…….”

곧 얕은 신음이 들리는가 싶더니 문틈 사이로 쏙 고개를 내민 건 다름 아닌 아리아였다.

나는 눈을 깜빡였다.

“공녀님!”

나를 본 순간 아리아의 표정이 단숨에 밝아졌다.

그녀는 쪼르르 달려오려 했고,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뛰지 마요!”

“네? 아, 네!”

나도 모르게 나온 외침에 그녀는 갸웃하면서도 온순한 토끼처럼 챡 얌전해져서는 사뿐사뿐 걸어왔다.

내 앞도 아니고 내 옆에 그대로 앉으며 방긋 웃었다.

“보고 싶었어요, 공녀님!”

……나, 방금 사랑에 빠진 거 아닐까?

아리아의 환한 얼굴이 몹시도 눈부셨다.

그간 아팠다는 말이 그냥 있던 소리가 아니라는 듯 창백하고 가냘픈 낯이었음에도 빛이 나더라.

‘이 애는 정말 건강해지기만 하면 제국이 뭐야, 대륙을 씹어 먹을 미인이 될 거다.’

내가 확신해.

방금까지 막 초상화를 보고 있던 탓일까.

뺨의 살이 조금 더 내린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조금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이제 몸은 괜찮아요?”

“네!”

가냘픈 손이 조심스럽게 내 손을 꼬옥 잡았다.

창백하던 아리아의 낯에 발그레 분홍빛이 돌았다.

그렇지 않아도 예쁜 눈이 더욱 예쁘게 휘어졌다.

“공녀님께서 보내 주신 마, 마법사랑 의사 덕분에 그날…… 저는 정말 오랜만에 편안하게 푹 잤어요.”

아리아가 머뭇거리다가 살짝 속삭였다.

오빠가 속상해할까 봐 이건 공녀님한테만 알려 주는 말이라고.

어딘가 모르게 어린아이 같은 말과 행동이었다.

어디 모자라다거나 정말 어린 아이 같다기보다는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이 보여서 나도 모르게 손을 들어 올렸다.

조금 푸석함이 남아 있는 은빛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었다.

“잘됐네요. 다음엔 약속했던 빗을 가져올게요.”

“아.”

“미안해요, 오늘은 급하게 오느라 잊었어요.”

“아, 아니에요!”

아리아의 얼굴이 발긋 달아올랐다.

“저, 저는 매번, 받기만 하고, 그 오늘은 꼭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어서……!”

“알아요. 사실 지금 미소 하나가 천 냥 빚을 갚았단 생각을 하고 있었거든요.”

“네?”

“아, 혼잣말이에요.”

나를 빤히 바라보던 아리아가 나를 따라 배시시 미소했다.

그러다 문득 시무룩해졌다.

왜 이러지?

어째 아리아 머리에 길게 달린 토끼 귀가 추욱 처진 듯한 착각마저 일었다.

“그날, 마법사를 부르고 의사까지 데려와 주시느라…… 돈을 많이…… 쓰셨겠죠?”

그녀가 내 눈치를 보더니 눈을 아래로 내렸다.

가냘픈 손이 옷자락을 꾹꾹 쥐었다가 놓았다.

불안해 보이는 얼굴과 몸짓이었다.

“특히나 치료 마법사는 정말, 돈이 많이 드셨을 텐데…… 저 때문에 불필요한 지출을 하신 것 같아 죄송해요.”

진심이 어린 염려스러운 표정이었다.

게다가 아리아의 입에서 그 돈을 어떻게든 자신이 갚겠다는 말이 나오자 나는 나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돈은, 일을 해서라도, 헙! 고, 공녀님?”

“아, 나도 모르게 그만.”

나는 씩 웃으며 아리아의 입에서 손을 뗐다.

아니, 말의 내용도 내용이지만 미안해하는 모습을 보기가 싫었다고 해야 할까.

‘사실 아리아가 내게 딱히 미안해할 필요는 없는데 말이지.’

샤를리즈와 얼음 오빠 토끼, 그리고 이 겁먹은 동생 토끼.

토끼 남매와의 관계를 생각해 보면, 아리아 쪽에서 샤를리즈에게 ‘니가 먼저 시작했잖아, 앙?’ 하고 성질을 부리더라도 충분히 이해가 가지 않았을까.

‘물론 그렇게 할 인물은 아니지만. 하더라도 재밌겠다.’

게다가 아리아가 말하는 돈에 관해서도…….

“돈은 딱히 신경 쓰지 말아요.”

“네? 하지만!”

“내겐 그 정도 돈은 아무것도 아닌걸요.”

이렇게 말했지만 며칠 전 치료 마법사에게 지불한 돈은 어떻게 메꿔야 하나 고민했던 건 비밀이다.

‘폭군 오빠에게 돈을 빌릴 수 있어서 천만다행이었지.’

못 빌렸다면 어쩔 뻔했어.

‘미운 놈이긴 해도 이건 고맙다고 해야겠지.’

이렇게 생각하며 나도 모르게 손을 움직였다.

무의식중에 아리아의 머리카락을 톡톡 두드리거나 만졌다.

아직 건강이 좋지 않아 푸석한 느낌은 있지만 기본적으로 폭신한 머리카락이었다.

하필 토끼를 떠올려서일까.

이렇게 보니 폭신한 털마저 더욱더 토끼와 일치하는 느낌이었다.

‘그럼, 약혼자님 쪽은 차가운 눈 토끼…….’

거기까지 생각하고서 웃음을 꾹 참았다.

그 예쁘고 잘생긴 남자와 토끼라니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반대로 아리아와 닮은 걸 생각해 보면 어울리기도 한 것 같았다.

그렇게 웃음을 참다가 나는 슬그머니 아리아의 눈치를 보았다.

지금 아리아가 내 눈치를 볼 때가 아니다. 내가 보면 봤지.

‘눈치를 봐서는…… 다행히 아직 소문을 모르는 거 같지?’

어째서인지 아리아는 모르는 눈치였다.

지금 이건, 아리아만 모르는 걸까.

아리아를 제외한 이곳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고?

갑자기 달라진 시종들의 태도를 봐서는 알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은데.

아리아가 충격받을까 봐 이 아가씨에겐 말을 하지 않고 말이지…….

일리가 있어.

“저, 공녀님…….”

아리아가 머뭇거리더니 내 손을 꼬옥 잡았다.

“사실 부탁이 하나 있는데, 호, 혹시 말씀드려도 될까요?”

나는 아리아의 간절한 얼굴에 속으로 긴장해서는 침을 꿀꺽 삼켰다.

‘엄마야, 이거 설마 우리 오빠랑 파혼해 주세요, 이런 말 하려는 거 아니야?’

등 뒤로 식은땀이 줄줄 흐르는 기분이었다.

솔직히 아리아가 갑작스럽게 이렇게 말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최근에야 내가 이 몸에 들어와서 어찌 저찌 정상적인 대화를 나눴다고 하지만, 이전에 샤를리즈가 워낙에 저지른 일이 많았어야지.

설마, 아리아가 그간 몰랐던 자기 오빠한테 저지른 일을 알게 된 거 아니야?

온갖 불길한 상상이 흘러갔다.

그러나 아리아의 입을 막기도 전에 아리아의 핏기 없는 입술이 먼저 떨어졌다.

“저, 그…… 제 머리를 다시 한 번만 빗어 주실 수 있나요?”

“안 돼요!”

“네?”

“네?”

우리는 서로를 놀란 눈으로 쳐다봤다.

반응을 보인 건 아리아였다. 그녀는 토끼 같은 눈을 아래로 내렸다. 어깨가 추욱 처졌다.

나는 그녀의 머리 위로 또 한 번 토끼 귀가 축 처진 모습을 본 기분이었다.

“……그렇죠, 역시 감히 이런 부탁을 하는 건 아니겠죠? 죄, 죄송해요. 제가 무례했어요.”

“아니에요.”

나는 서둘러 물러나는 아리아의 손을 잡았다.

아리아가 놀라 흠칫했다.

“미안해요, 내가 요즘 귀가 좋지 않아 잘못 들었지 뭐예요.”

“네?”

“그런 부탁을 뭘 그렇게 어렵게 해요.”

와, 정말 놀랐네.

“친구라면서요.”

“…….”

아리아의 커다란 눈이 살짝 떨렸다.

눈이 워낙에 크다 보니, 떨림이 아주 잘 보였다.

한순간이지만 내 심장을 들었다 놓은 이 어린 아가씨가 우물쭈물 입을 열었다.

“제, 제가 너무 무례하지 않았나요?”

“아뇨. 오히려 그런 건 편하게 부탁해 줬으면 해요.”

“……정말요?”

“나 빈말 안 해요.”

나는 씩 웃었다.

“빈말 따위 안 해도 되는 사람이거든요.”

아리아가 도망갈까 싶어 조심스럽게 아리아의 손을 잡아당겼다.

얼른 뒤돌아 머리카락을 맡기라는 내 말에 아리아는 놀란 표정이면서도 얼른 돌아앉았다.

‘귀엽네. 정말.’

나는 아리아의 머리카락을 만지면서 물었다.

“혹시 빗 있어요?”

“여, 여기요!”

오, 이미 준비까지 하고 온 거였구나?

잽싸게 내밀어진 빗을 보다 살짝 웃음을 머금었다.

……이렇게 귀여워서 어떡한담.

‘사실 아리아가 오래 살았다면 이 아가씨가 주인공이 되는 거 아니야?’

물론 그렇다기엔 폭군 그놈이랑 나이 차가 꽤 나서 탈락이다.

게다가 폭군에게는 너무나 아깝기도 하고.

물론, 주인공 언니도 생각할수록 그놈에겐 아까운 불쌍한 언니이긴 한데.

일단 이 소설이 19금에 감금물 맛집이니까 말이지.

나는 일단 생각을 지워 내며 빗을 고쳐 잡았다.

‘……낡았네.’

빗은 오래 쓴 건지 손때가 많이 묻어 있는 모습이었다.

오래된 것치곤 정돈이 잘된 모습이었지만 장식이 거의 떨어지고 칠이 벗겨진 걸 보고 있으려니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나한테 내가 좋아하는 보석이 박힌 빗이 있어요.”

“네? 네.”

“근데 그게 2개나 되네? 하나는 영애에게 줘야겠어요. 가져요.”

“네? 아뇨, 그런 귀한 건…….”

“친구랑 똑같은 물건, 가지고 싶지 않아요?”

“…….”

“나는 그런데.”

돌아본 아리아에게 씩 웃어 주자, 아리아의 뺨이 상기되었다.

곧 그녀가 입술을 꾹 다문 채로 열심히 끄덕였다.

나는 그녀에게 다시 고개를 돌리게 하고는 정성껏 머리를 빗어 주었다.

물론 마차에서 했던 것에서 발전한 건 없었다.

빗을수록 아리아의 머리가 붕 뜨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아리아가 기분이 좋아 보였기에 나는 최선을 다해서 조심조심 빗었다.

‘더는 이 예쁜 머리를 망칠 수 없다……!’

마치 이태리 장인처럼, 한 땀 한 땀 수를 놓는 정신으로다가 집중할 때였다.

아리아에게서 수줍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사실, 저는 어릴 때부터 언니가…… 있었으면 어떨까 상상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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