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순간적으로 내 손이 멈칫할 뻔했지만 나는 자연스럽게 머리를 빗어 내렸다.
아리아가 내게 등을 돌린 그대로 얼른 손사래를 쳤다.
“오빠가 싫은 건 절대, 절대 아니에요!”
“알아요. 하지만 언니가 하나 더 있었으면 했다?”
“네……. 오빠도 좋지만, 예전에 옆에 있었던 시녀에게 언니가 있었거든요. 사이좋은 게 항상 부러워서…….”
아리아가 주먹을 꾹 쥐고 고개를 홱 들어올렸다. 동그랗게 뜬 눈이 열심히 말하고 싶은 의지를 알려주는 것 같았다.
“그, 시녀의 언니는 집에 가면 항상 만날 수 있다고 하더라구요.”
그러고 보니 약혼자님은 책 속에서 항상 여동생의 치료법이나 치료약을 구하기 위해 늘 바빴지.
이뿐 아니라 공작의 의무나 몬스터로부터 영지를 수호하기 등 해야 할 일도 많은 사람이었다.
자연히 여동생과 단둘이 시간을 보내는 일은 드물었을 것이다.
아리아의 목소리에서는 미약한 아쉬움과 외로움이 묻어 나왔다.
나는 이를 지적하는 대신에 태연스럽게 화제를 바꿨다.
“그렇구나. 그 시녀는 지금 무얼 하고 있어요?”
“그 시녀는…….”
이런, 화제를 잘못 잡았던 걸까.
아리아의 어깨가 순식간에 축 처졌다. 조금 전까지 신났던 아가씨가 말이다.
‘……이거 누가 봐도 그 시녀랑 무슨 일 있었다는 모습이잖아.’
내가 황급히 말을 꺼내기도 전에 아리아가 얼른 손을 흔들었다.
“아무튼 저는 언니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아주 많이 상상했어요!”
어째 황급히 꺼낸 말치고는 목소리에 은근함이 느껴졌고 살짝 의미심장하게도 느껴졌다.
내 착각일까?
‘……끙, 그러게요. 날 향해 한 말이라면 나 좀 도와주면 정말 좋을 텐데.’
이 말을 차마 꺼내지는 못하고, 속으로 꾹꾹 눌러 참았다.
“그렇구나. 난 여동생이 있으면 좋겠던데.”
이건 진심이었다.
오빠인 윤지훈 그놈이 나를 괴롭힐 때 나도 여동생이나 언니가 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었거든.
초등학생 때, 예쁜 여동생이 있었으면 나는 절대 윤지훈 그놈처럼 안 괴롭혔을 거라고 일기장에 적기도 했다.
‘이후로 엄마한테 여동생 만들어달라고 조르다가 등짝만 맞았지.’
이때, 아리아가 완전히 돌아서서는 나를 향해 물었다.
“……공녀님, 공녀님은 우리 오빠가 왜 좋으세요?”
“네?”
생각지도 못한 직구였다.
우리 서로 자매가 있었으면 좋겠단 이야기 나누고 있던 거 아니었어요?
초롱초롱한 시선에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 궁금했어요. 공녀님께서는 우리 오빠 어디가 그렇게…… 좋으신 거예요?”
이 질문은 사실 내가 아니라 샤를리즈가 해 줄 수 있는 것 아닌가?
나야, 내게 주어진 목표 때문에 열심히 매달린 거지.
샤를리즈가 아니기에 정작 샤를리즈가 그 약혼자님이 어디가 그렇게 좋았는지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샤를리즈의 기억을 훑어본다 한들 내가 샤를리즈의 정확한 감정까지 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대답하지 못한 채로 정적이 흘렀다.
……대답을 더 지체하면 안 될 것 같은데?
나는 얼른 입을 열었다.
문제는, 다급한 나머지 속마음이 그대로 흘러나가 버렸다.
“얼굴이요.”
내뱉고서 속으로 당황했다.
저기요, 나님? 지금 무슨 개소릴 한 거야.
다시 한번 정적이 흘렀다.
안 되겠다, 이건 뭐라도 변명을 해야겠다 마음먹은 순간이었다.
별안간 아리아에게서 꺄르르, 맑은 웃음소리가 튀어나왔다.
“맞아요, 우리 오빠가 잘생기긴 했어요.”
“어……. 그렇죠?”
그건 사실이지.
이미 책 속 남자 주인공에다 서브 남주까지 만났는데, 전혀 꿇리지 않는 외모의 소유자였으니까.
“어릴 때부터 아주아주 예뻤는걸요.”
꿇리지 않다 뿐인가, 거의 남주랑 투톱을 이룰 만큼 예쁘고 잘생겼던데.
아리아의 말을 들어보니 어릴 때도 마찬가지였나 보다.
아리아가 몹시도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저는 공녀님의 솔직함이 부러워요……. 정말로요!”
“……솔직한 게 좋기만 한 게 아닐걸요?”
“아니에요, 배우고 싶을 정도예요!”
……아니, 샤를리즈의 솔직함은 배우면 안 돼요, 이 아가씨야.
사회생활이고 관계고 뭐고 죄다 망하는 지름길이라고.
나는 속으로 기겁하면서도 겉으로는 최대한 차분하고 자연스럽게 아리아를 만류했다.
혹시나 오해가 발생할까 봐 언어 선택에 주의하면서 말이다.
얼른 화제를 또 한 번 바꾸느라 진땀 뺐다.
“그, 레무트 공작이 잘생겼다는 말에 그런 얘기까지 나올 일인가요?”
“으음, 오빠가 잘생긴 건 맞지만…….”
다행히 아리아는 옮겨온 화제에 맞춰 고개를 갸웃했다.
“저는 실은, 오빠 같은 스타일보다는…… 좀 더 남자답게 잘생긴 사람이 좋아요.”
“그래요?”
약혼자님의 얼굴을 떠올렸다.
약혼자님이 남자다움이 부족한 건 아니었다.
오히려 딱 벌어진 어깨라거나 거대한 덩치에서 모자람 없이 찾을 수 있을 정도다.
다만, 그 얼굴은 남자다움을 넘어서 아니, 성별을 뛰어넘은 아름다움과 청초함이 공존하긴 했다.
‘사실 아리아는 오빠랑 자기랑 너무 닮아서 별로인 게 아닐까?’
그도 그럴 게 거울을 보면 매번 오빠 얼굴을 보는 기분일 거 아니야.
나는 속으로 나름 이해과정을 거쳤다.
“나는 레무트 공작처럼 생긴 쪽이 좋던데.”
“정말요?”
“네. 오히려 음…… 사납게 생긴 쪽이 취향이 아니에요. 절대.”
솔직히 말하자면 소설이나 만화로 볼 때야 누가 됐든 미남이기만 하면 됐는데.
여기 와서 취향이란 게 생긴 건 다 그놈의 폭군 오빠 때문이다.
그놈처럼 생긴 건 다 싫어!
웩, 웩. 어쩌면 샤를리즈 몸에 남은 잔재인지도 모르겠지만.
흡사 윤지훈이 한 남성으로서 괜찮은가, 하는 구역질 나는 질문을 떠올린 기분이었다.
참고로 나는 윤지훈과 싸울 때마다 윤지훈이 누굴 데려오든 그 언니 분이 세상에서 제일 딱한 여성이 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앗, 그럼…….”
아리아가 무어라 말을 더 꺼낸 상황이었다.
이때, 달칵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문 너머로 익숙한 모습이 보였다.
약혼자님이었다.
우리의 시선이 마주쳤다.
어째서인지 아스킨은 나를 빤히 보는가 싶더니 자연스럽게 시선을 아리아 쪽으로 옮겼다.
“오빠!”
나는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행이다. 오늘은 오해할 상황이 없어서.’
혹시 몰라 아리아의 머리카락을 점검했는데, 정말 장인 정신으로 열심히 빗은 덕분일까?
아리아의 머리카락은 평소보다 윤기가 돌았다.
후, 잘했다. 한다면 할 수 있었잖아?
더 예뻐진 머리카락을 보고 있으려니 괜히 뿌듯해졌다.
“아리아. 방에 있지 않더군.”
“응, 공녀님을 뵈러 왔어. 오빠.”
나는 조금 신기한 눈으로 저 남매를 보았다.
그러고 보니 평화로운 상황에서, 아스킨이 아리아를 대하는 건 처음 보는 거지?
아스킨은 놀랍도록 온화한 얼굴이었다.
내게 늘 갑옷처럼 두르고 있던 차가움과 그 아래 깔린 분노, 증오를 지우면 저런 얼굴이구나 싶었다.
‘얼음 왕자처럼 생겨서는…… 저런 표정도 짓는구나.’
조금 전에 아리아를 보며 토끼를 떠올리면서 저 남자에게도 함께 대입했었는데.
어울리면서도 어딘가 어울리지 않는단 생각과는 달리, 이렇게 보니 평소 아리아를 향한 얼굴이 어떤지 엿보였다.
‘그렇지. 나한테만 얼음 토끼셨구나.’
절대 이 남자를 미워할 일은 아니지만 괜한 억울함에 속으로 입술을 삐죽였다.
“그래, 밖에 너무 오래 나와 있었어. 이제 그만 방으로 돌아가.”
“하지만…….”
“아리아. 네가 아프면 나을 때까지 나도 밤을 새울 거야.”
“…….”
아리아가 내 쪽을 보더니, ‘힝’ 하고 외칠 것 같은 얼굴을 했다.
곧 아리아는 시무룩한 얼굴로 내게 인사를 하고 돌아갔다.
사실 그 모습이 어찌나 귀엽던지, 부풀기 직전으로 보이는 뺨을 콕 한번 찔러 보고 싶었다.
‘다음에 만나면 빗 선물해 주면서 한 번만 찔러 봐도 되냐고 물어봐야지.’
창백하긴 해도 살결만은 뽀얀 뺨, 가끔 상기 돼서는 분홍빛으로 물들던 뺨을 떠올리며 웃음을 삼켰다.
아리아가 나가기 무섭게 아스킨의 얼굴이 변했다.
내가 늘 알던 그 표정이었다. 조금이지만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무슨 용건으로 왔지?”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만. 얼음장 같은 표정에 나도 모르게 콧잔등을 슬쩍 찌푸렸다.
“그렇게 얼굴 찌푸리고 붉힐 필요가 있어?”
“……이제 머리까지 멍청해진 건가?”
과거의 일을 다 잊었냐는 소린가.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몇 번이나 이야기하고 싶지만 과거의 걔는 내가 아니라고.
한편으로 나는 평소와 전혀 다르지 않은 약혼자님의 모습을 보며 속으로 무진장 안심했다.
‘……다행히 소문을 듣지 못한 것 같지?’
이렇게 생각하자, 조금 전에 살짝 느꼈던 서운함은 무슨.
매우 행복해졌다. 그래, 듣지 못한 게 틀림없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모습에 행복함을 느낄 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