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 * *
“…….”
아스킨은 침묵하는 샤를리즈를 흘끗 훑었다.
그는 당연히 샤르리즈의 속을 알지 못했다.
겉으로 전혀 드러나지 않는 샤를리즈의 표정 덕에 속으로 ‘아스킨이 평소와 다르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다.’ 하고 생각하는 것 또한 그가 알 길이 없었다.
그저 아스킨은 속으로 가만히 생각했다.
‘……진짜 몸이나 정신에 문제가 생긴 건가?’
비꼬는 것이 아니라 진지한 고민이었다.
생각해보면 샤를리즈는 과거처럼 보자마자 시비를 걸거나, 어떻게든 그의 반응을 이끌어 내고 싶은 것처럼 모욕과 비난을 하진 않았다.
“그렇게 얼굴 찌푸리고 붉힐 필요가 있어?”
이 한마디에 멍청하냐고 대꾸한 건 조금 심했던가.
아스킨의 표정이 더욱 찌푸려졌다. 이게 맞는 생각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던 탓이다.
자신이 저 여자로 인해 이런 생각을 하다니?
잊었던 혼란이 그의 머리를 덮었다.
딱히 느끼고 싶던 혼란이 아니었다.
샤를리즈가 ‘아스킨이 소문을 듣진 못한 것 같다’ 생각하며 안도하는 사이, 아스킨은 또 한 번 생각에 잠겼다.
입이 떨어지기 전까진 오래 걸리지 않았다.
“……고맙다.”
샤를리즈가 고개를 갸웃했다.
마침 소문이 여기까지 퍼지지 않았다는 안도감에 속으로 혼자만의 파티마저 벌였던 그녀로서는 별안간 떨어진 그의 인사를 이해하는 데 시간이 조금 걸렸다.
……뭐에 대한 인사인 건데?
“아, 설마 그거 아리아를 위해 의사랑 마법사를 보낸 거?”
“……내 여동생의 이름을 담은 것도 특별히 이번만 허락하지.”
그러자, 샤를리즈의 입꼬리가 보기 좋게 올라갔다.
실로 외모만큼은 천 년 전 멸종한 포악한 드래곤마저 홀릴 정도란 찬사를 받는 이답게 샤를리즈의 미소는 눈이 부실 정도로 예뻤다.
“나 참, 아리아가 허락한 것을, 왜 당신이 허락 운운하는 건지.”
샤를리즈는 입을 슬쩍 가린 채 쿡쿡 웃고는 슬쩍 눈을 들어 올렸다.
우아하게 말려 올라간 긴 속눈썹이 팔랑 움직이다가, 이내 눈매가 그윽하게 반달을 그렸다.
“그래도 고마움을 알긴 아는구나?”
“쓸데없는 소리를 하려고 온 건가?”
“어머나, 쑥스러워하는 거야? 좀 귀엽다.”
“…….”
아스킨의 얼굴이 찡그려지기 무섭게 샤를리즈는 얼른 말을 돌렸다.
저 얼굴이 더욱 얼음장이 되기 전에 꺼내야지. 암.
“실은 당신이 나랑 연회에 함께 가기로 했잖아?”
“그래서?”
샤를리즈가 화사하게 웃었다.
“그때 함께 입을 옷을 가져왔어. 한번 입어 봐.”
“거절하지.”
“……너무 단칼에 거절하네?”
내가 이걸 만드는데 어떤 노력을 들였는지 안다면 그렇게 말 못할 거라며, 샤를리즈는 속으로 투덜거리기 바빴다. 겉으로 내지 못할 소리였다.
한순간이지만 시무룩하게 가라앉은 샤를리즈의 표정을 본 아스킨의 시선이 찰나 흔들렸다.
“……확실히 지난번 일은 감사를 전하지.”
아스킨이 답지 않게 틈을 두고 말했다.
“그 보답으로 내가 당장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기에 네가 작년부터 말하던 알츠베이트 공작의 뜻을 따라 네 가문에 먹칠하지 않기 위해 연회 참석을 제의한 것이지, 그렇다고 너와 나 사이에 달라진 것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너 또한 그렇지 않나?”
“와, 긴말을 듣기 좋은 목소리로 듣는 것도 나쁘지 않네.”
“뭐?”
샤를리즈가 어깨를 으쓱했다.
“아, 난 그렇게 생각 안 해. 한번 입어 주면 안 돼? 정말 잘 뽑혔거든.”
두 사람의 시선이 팽팽하게 맞섰다.
“……날 인형 취급하지 마라.”
차갑기도 해라.
그러나 그녀는 이제 이런 단호한 거절에 찔끔하기엔 짧은 시간 이 남자를 아주 잘 겪은 뒤였다.
아랑곳하지 않고 생글생글 웃던 샤를리즈가 미소를 살짝 지우며 말했다.
“얘기했잖아. 딱 1년만 약혼자로서 서로 노력해 보지 않겠냐고. 생각해 봤어?”
“생각해 볼 가치도…….”
“없다기엔 그날 단칼에 거절하진 않았잖아.”
“…….”
샤를리즈와 아스킨의 시선이 허공에서 팽팽하게 맞섰다.
“부탁할게. 1년만, 부디 1년만 서로 노력해 보지 않겠어? 이 기간 후에도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그때는 깨끗하게 파혼해 줄게. 이때 비용도 내가 책임질게.”
그녀의 목소리가 은밀해졌다.
“생각해 봐, 넌 전혀 손해 보는 게 없지 않아?”
샤를리즈가 속으로 제발 1년을 못 버티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자신의 절박함을 애써 숨기며 태연하게 의견을 이어 갔다.
“이미 파혼 준비는 잘 해 가고 있으니, 헛소린 그만하고 돌아가는 게 좋겠군.”
“우와, 웬일로 꽤 부드럽게 말하네.”
“……부드러워?”
“꺼지란 말은 안 했잖아?”
뭐. 과거의 샤를리즈가 이 남자에게 저지른 만행을 떠올려 보면 아스킨이 꺼지라고 하다못해 욕설을 지껄이더라도 충분히 이해가 되긴 했다.
“……연회에선 입 꾹 다물고 약혼자 역할을 할 테니 염려 말고 당장 돌아가.”
“너무 갑자기 그렇게 부드러워지지 마. 설레잖아.”
“허?”
샤를리즈가 우아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맞아. 네 말대로 빚을 다 갚기 전까진 우린 약혼 관계이고, 넌 내 약혼자인 건 맞으니까 이 옷 입어.”
“무슨 그런 억지를,”
“이 옷 입고 그날 마차를 가지고 갈 테니 함께 가. 파트너잖아? 선심 써서 내가 보내 준 마법사와 의사의 값은 이것까지 치는 걸로 해.”
“……싫다면?”
반쯤 단호한 아스킨의 말에 샤를리즈가 뚱한 표정을 지었다.
“빚 다 갚든가. 지금 당장.”
샤를리즈의 뚱한 표정에 아스킨은 조금 당황했다.
“지금 내 말을 거역해?”
그도 그럴 게 이쯤에서 나올 법한 표독스러운 표정이라거나 평소의 독기 가득한 패악이 나올 차례였기 때문이었다.
“몰라, 지금 다 갚아. 아니면 이대로 드러누워서 안 일어날 거야. 알았어?”
“……어린애인가? 아니, 어린애도 그렇게 굴진 않겠군.”
“아, 그래. 네 영지 애들은 조숙하더라. 그건 그거고, 나 철없는 거 몰랐니?”
샤를리즈가 뻔뻔하게 말했다.
“해 줘.”
“…….”
분명 아스킨의 상식 내에서 이걸 두고 ‘생떼’라고 부른다.
그 샤를리즈와 생떼라니.
스스로 생각해도 너무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한편 정말로 드러누울 생각이었던 샤를리즈는 차게 가라앉은 아스킨의 얼굴을 보고 쫄고 말았다.
‘쪼, 쫄지마 윤지후!’
물론 그는 어이없을 뿐이었지만 이미 그의 싸늘함을 과도하게 체험한 샤를리즈는 지레 겁을 먹었다.
‘……음, 여기까지만 할까. 그래, 옷만 슬쩍 여기 던져두고 가자.’
샤를리즈는 마차에 있을 옷을 떠올리며, 대충 시종에게 맡겨 버리고 돌아가자고 결심했다.
그 샤를리즈가 단단히 얘기해 두고 맡기는 것이니 감히 중간에서 버리지는 않을 거다.
샤를리즈는 이대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막 몸을 돌리는 순간 생각나는 것이 있어 홱 반쯤 돌렸던 몸을 제대로 했다.
샤를리즈의 얼굴로 사나움이 스쳤다.
“그리고 이봐, 당신.”
“당신?”
“그래. 이쁜아. 누나가 충고하는데, 이렇게 잘나신 분인 건 잘 알겠으니까 여동생 아플 때나 옆에 좀 있어 주라고. 알겠어?”
뜬금없이 버럭 화를 내는 거야, 샤를리즈의 과거 모습을 돌이켜보면 없는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나오는 말의 내용이 아스킨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화를 내는 내용이 다른 것도 아니고 여동생의 일이라니?
아스킨이 황당함에 무어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이미 샤를리즈는 몸을 돌려 성큼 나가 버린 뒤였다.
샤를리즈야 아스킨이 무슨 화를 낼지 몰라 줄행랑친 것이었지만, 아스킨 눈에는 달랐다.
미련 없이 가 버린 모습에 묘한 허탈감마저 들었다.
우습게도 말이다.
‘……이리도 깨끗하게 돌아갈 줄 아는 여자였나?’
샤를리즈가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스킨은 급히 방을 나섰다.
그가 향한 곳은 아리아의 방이었다.
‘……혹시나 그 여자가 아리아에게 이상한 얘기를 한 건 아니겠지?’
아스킨으로서는 정당한 의문이 솟구쳤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돌아가면서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아리아를 언급하다니.
충분히 의심스러운 상황이었다.
한편, 아스킨이 아리아의 방에 도착하기 전, 아리아는 창문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원에 나가고 싶지만 몸 상태가 따라 주지 않을 때 이렇게 서 있곤 했다.
다만, 오늘은 서 있는 이유가 달랐다.
샤를리즈와 너무 빨리 헤어진 게 아쉬워, 혹시 샤를리즈가 돌아갈 때 돌아가는 모습이라도 보기 위해 이렇게 하염없이 서 있는 것이었다.
‘……공녀님이랑 조금 더 같이 있고 싶었는데.’
아리아의 얼굴이 시무룩해졌다.
‘오빠한테 한 번만 공녀님과 조금 더 같이 있고 싶다고 말했다면…….’
아리아는 평생 오빠의 말이라면 뭐든 따랐다.
그녀를 위해 희생하는 오빠였다.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평생 오빠 말에 ‘싫어’, ‘아니오’ 같은 단어는 말해 본 적 없기에, 조금 전 샤를리즈와 함께 있을 때 돌아가란 말에도 그대로 따랐다.
그리고 방에 돌아와 아쉬움을 못내 감추지 못했다.